제91화
90화-선발 (4)
첫 주의 끔찍한 폭력을 견뎌 내고, 금세 찾아온 다음 주 수업.
그 수업도 거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날 신나게 맞고, 다른 곳에 들러 지도한 남궁선이 다시 돌아와 또 신나게 맞는 것을 반복하는 수련뿐이었다.
하지만 첫 주와 다른 게 하나 있었으니.
‘아, 다음 수업 전까지 등급 올려놔.’
학관을 떠나기 전에 남궁선이 앞마당의 낙엽이나 쓸라는 듯 가볍게 툭 던진 과제.
하지만, 그 과제에 철백과 주현운, 서하영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정급(丁級)!”
그게 친선전 출전의 최소 조건이었지!
남궁선이 당연히 나가는 것처럼 말해서 까먹고 있었다.
“어떡하죠? 저희 공적이…….”
학관의 계급이 무림맹의 직책으로 이어지는 무림학관의 특성상, 위로 올라갈수록 단순히 무공의 경지만으로 등급을 올릴 수 없었다.
무공 외적으로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시험으로 증명하든가, 아니면 그런 증명 따윈 필요 없을 정도의 확실한 실적을 쌓든가.
옛날, 배천문이 기(己)에 오르겠다고 설천위들의 뒤통수를 쳤던 것도 그런 이유다.
학관에서 내주는 까다로운 시험보단 실적으로 증명하는 게 더 편하니까.
애초에 설천위가 업적을 쌓으려고 한 이유가 뭔가.
그런 자잘한 부분을 다 건너뛰기 위해서다.
물론,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초절정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낼 수 있다면 병(丙)은 몰라도 정(丁)은 바로 오를 수 있다.
철백과 주현운, 서하영은 그게 안 돼서 그렇지.
설천위도 마찬가지였다.
설천위는 초절정을 이길 순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초절정은 아니니까.
그렇기에 절망적인 공기가 일행들 사이로 퍼져 나가려는 순간, 한 줄기 구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 소협과 서 소저는 아마 바로 시험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정말입니까?”
“네. 우직하게 수련만 한 분들을 위한 제도가 있거든요.”
유예린의 말에 서하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한 사람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저는 힘들 수도 있다는 겁니까?”
“네. 아쉽게도.”
유예린의 대답에 설천위는 작게 미간을 찡그렸다.
게임 속 무림학관은 일정 수준이 되면 그야말로 칼같이 승급을 시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게임에서는 임무를 수행해 스탯과 스킬을 얻지 않으면 강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강해진다=임무를 많이 수행했다가 성립되니 자연스럽게 승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승급에 대해 딱히 걱정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문제는 주현운이 너무 아까운 인재라는 건데…….’
이번 흑룡학관과의 친선전은 무조건 이기는 게 좋다.
보상이 캐릭터의 성장 방향을 정해 줄 정도로 든든하니까.
물론 주현운 없이도 이기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주현운의 성장이 더뎌진다.
게임에서 주는 보상이 아니더라도 주현운 같은 천재는 흑룡학관과의 비무로 얻는 게 많을 테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은데…….
설천위가 고민하는 사이 유예린은 철백과 서하영을 바라봤다.
“철 소협과 서 소저는 추천인 제도를 사용할 것입니다. 상위 등급의 학생 셋 이상이 추천해 공적과 상관 없이 시험을 보는 제도죠.”
“……그런 제도가 있었어?”
“거의 쓰이지 않지만요. 교관들이 놓친 인재를 같은 위치에 선 학생들이라도 발견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라고 하더군요.”
따로 알아봤구나.
유예린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철 소협과 서 소저는 제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조금 망설이는 대답.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를 알기에 설천위는 유예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그래 주면 저야 좋죠.”
빙긋 웃는 속도가 조금 늦었지만, 유예린은 설천위의 손길을 순수하게 즐겼다.
잠깐 설천위의 온기를 느낀 유예린은 주변에서 꽂히는 시선에 작게 헛기침을 하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상당히 뻔뻔해진 설천위는 그 틈에 몸을 뺐고.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유예린은 철백을 바라봤다.
“두 분을 추천하는 것에 저와 남궁 소협은 이미 동의했어요.”
“병(丙)은 몰라도 정(丁)이 되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실력이지.”
유예린의 말에 남궁천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천위의 곁에 있으면서 자극이라도 받은 듯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두 사람이다.
심지어 얼마 전엔 혈교의 잔당과 싸우는 실전까지 겪었다.
설천위의 활약이 크고 유예린이 함께했다는 사실 때문에 공적을 많이 인정받지 못했지만 임무 한두 가지만 더하면 추천 없이도 승급 시험을 볼 수 있었을 터다.
“나도 추천해 줄게.”
그리고 당화유의 목소리에 철백과 서하영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주현운의 질문에 유예린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주 소협은 분명 뛰어난 인재이고 훌륭히 발전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직 부족하네.”
유예린의 흐린 말끝을 남궁천이 단호하게 매듭지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내공의 부족, 둘은 검이 아직 어색하다는 것일세.”
남궁천의 담담한 지적에 주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으니까.
[천무지체라고 한들 내공까지 쉽사리 해결할 순 없는 법이지.]
천마의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현태중의 무공을 가르치곤 있지만, 내공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현태중의 심법도 알려 주긴 했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을 들여 내공을 쌓는 정공의 심법.
배운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지금 큰 효력을 발휘할 순 없었다.
하지만…….
“꼭 이번 주에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선발 시험까지 그리 긴 시간이 남지 않았네.”
이젠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정말 길어야 3주.
그 정도일 거다.
일정에 따라 조금 늦어질 순 있겠지만 교관들의 집중 훈련을 소화하려면 최대한 빠르게 인원을 추릴 필요가 있다.
남궁선이 괜히 저런 과제를 내준 게 아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남궁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봤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그런 남궁천의 걱정에 설천위는 웃었다.
이것들이 치트캐를 우습게 보네.
주현운이 괜히 초보자용 캐릭터겠냐?
발로 키워도 최종 보스의 목에 검을 들이댈 수 있는 게 주현운이란 캐릭터다.
정말, 최소한의 할 것만 해 주면 저 하늘에도 검을 닿게 할 수 있는 괴물이란 말이다.
3주?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내가 사기캐의 위엄을 알려 주마.
동시에 설천위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얌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의 무인이 그곳에 있었다.
* * *
“……생각보다 쉽군.”
정(丁)이 적힌 패를 받은 철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패를 바라봤다.
바닥에서 아등바등하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이제 슬슬 1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놀라운 성장을 이뤄 냈다.
하늘처럼 높아만 보이던 교관들이 이젠 얼마든지 손아귀에 붙잡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할 만큼.
“뭔가 기분이 묘하네요.”
함께 정으로 승급한 서하영의 목소리에 철백은 그저 웃었다.
기분이 묘한 건 맞으니까.
그나저나.
“쟤는 뭐 하는 거지?”
“또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는 거겠죠.”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서하영은 창을 쥐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배우는 것도 무학(武學)이지만 일단 혼자 배운 것부터 소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남궁선과의 대련으로 얻은 것을 아직도 전부 소화해 내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서하영이 다시 집중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참, 한결같네.
생각해 보면 계(癸)에 있을 때도 수련 하나는 참 열심히 했었다.
‘부모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로.’
지금도 딱히 감이 오는 사람은 없다.
자신은 무림의 정세에 그다지 밝지 못하니까.
유 소저는 알고 있는 것 같긴 하던데…….
‘관심 둘 일은 아니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만큼 떳떳해져서 만나면 될 일이니까.
마음을 태양 아래 고스란히 드러내는 건 그다음이다.
지금은 그저 서로의 눈빛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시 수련에 집중하는 서하영의 모습을 잠시 보던 철백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를 피했다.
이대로 가다간 창에 휘말려서 수련을 방해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철백이 자리를 옮기니…….
“여기서 뭘 하고 계시오?”
“아, 철 소협.”
멍하니 앉아 있던 소윤혜가 어색하게 웃었다.
“혹 여러분들께 필요한 게 없나 지켜보고 있었어요.”
“소저, 우리는 다 같은 학생이오. 너무 과한 배려는 오히려 부담스럽소.”
시종도 아닌데 왜 자기 훈련을 안 하고 그러고 있냐.
그런 의문을 돌려서 말하는 철백의 배려에 소윤혜는 작게 웃었다.
“무림학관에 입학하긴 했지만, 역시 저는 무인으로서…….”
“약하다?”
“……비슷해요.”
다리에 있는 천형(天刑).
걷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뛰거나 달리는 행위, 혹은 무게를 다리로 견뎌 내는 행위는 할 수 없다.
과하게 움직이면 강렬한 통증이 엄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힘이 풀린다.
병명도 모른다.
당연히 치료법도 모른다.
조부의 막대한 내공을 품고도 걷는 게 고작이다.
그런 자신이 대체 무슨…….
“나는 내공이 없소.”
“……알고 있어요.”
그렇기에 존경한다.
자신처럼 무인에게 필요한 필수 요소 중 하나가 없는 데도 그것을 극복하고 위로 올라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자신과는 궤가 다르다.
자신은 그에게 있는 재능이 없다.
소윤혜의 눈빛에 서린 감정을 읽은 철백은 가볍게 혀를 찼다.
철백은 우둔하지 않다.
또한, 감정이 메마르지도 않았다.
소윤혜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고 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건 포기한 자들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지.”
“예?”
“사람은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법이고, 짊어진 것의 무게가 어떻든 간에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마음은 결코 평안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무엇을 물려받아 짊어지고 있지?
순간, 몸 안에서 요동치는 기운이 단전을 감싼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편해지고 싶다면 이뤄 내시오. 약점이 극복해 낼 수 없는 거라면, 장점으로 그 약점을 덮으면 될 일.”
무엇보다.
“포기하지도 않아 놓고 마치 포기한 것처럼 구는 건 도망칠 구실을 만드는 것일 뿐이오.”
그 말을 끝으로, 철백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장소를 옮겼다.
여기서도 수련하긴 그른 것 같으니까.
그렇게 멀어지는 철백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윤혜는 손을 바라봤다.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손.
요 며칠 홀로 도를 쥐었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서서히 주먹을 움켜쥔 소윤혜는 결국 몸을 돌렸다.
무언가로 간질거리는 가슴속이 미치도록 불편했다.
* * *
“호오?”
남궁선의 입꼬리가 최근 들어 가장 크게 휘어졌다.
요 며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름 재미있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천재는 천재로구나.”
선발되지 못하면 학관장에게 따로 말을 해서라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훌륭하다.”
자신의 검을 쳐 내는 주현운을 보며 남궁선은 빙긋 웃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다.
변(變)의 극치.
그것을 담은 이 검법은 설천위가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천위에게서 배웠을 터.
그런데, 설천위보다도 훨씬 잘 쓴다.
[재능의 차이지.]
[아주 토양 자체가 다르구나.]
천마와 암영의적의 평가에 설천위는 입술을 삐쭉였다.
새끼, 무슨 2주 만에 따라잡냐.
누구는 심상 세계에서 뒈져 가면서 배우고도 이 정도인데.
더러운 치트캐.
더러운 세상.
선발 시험까지 남은 시간 3일.
주현운은 세 사람의 추천을 얻어 냈다.
그리고.
“자, 슬슬 나오는 게 어떠냐? 보는 건 질릴 때가 됐을 텐데.”
모두의 대련이 끝났는데도 움직이지 않던 남궁선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던 사람.
천천히 훈련장 중앙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허리엔 한 자루의 도(刀)가 걸려 있었다.
속도를 중시한, 폭이 얇은 도.
“한 수 배우겠습니다.”
소윤혜가 천천히 도를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