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89화-선발 (3)
폭력.
무림인에게 따라붙는 숙명과도 같은 단어다.
검을 휘두른다는 것,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전부 폭력의 범주에 들어간다.
허나, 그것은 수호(守護)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어 자기 구제의 수단이란 명목으로 행해질 뿐이다.
그 검 끝이 적을, 사파를 향하면 그것은 나와 가족 더 나아가 백성을 지키기 위한 정의가 된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것이 그렇게 정의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돼도 되는 걸까?”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고, 상처가 없는 곳을 찾기도 힘들다.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는 설천위의 헛소리에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또 헛소리군.”
“수련이란 명목으로 자행되는 폭력……. 이건 학대야.”
“원래 수련과 학대는 종이 한 장 차이일세.”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자네가 하는 수련은 다른 학생들이 보기엔 전부 자기 학대지.”
……그런가?
철백의 말을 차마 반박하지 못한 설천위는 부어오른 눈 사이로 작게 보이는 하늘을 바라봤다.
참 더럽게도 맑구나.
“……유 매는?”
“신나게 맞고 있네. 그나마 가장 오래 버티고 있군.”
“남궁천이 아니라?”
“그 친구는 오히려 더 빨리 나가떨어졌네. 아마 무공을 훤히 알고 있어서겠지.”
그것도 그렇겠네.
남궁천이 배운 무공은 남궁선도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빈틈 하나라도 있으면 그냥 두들겨 맞았겠네.
“참고로 저쪽에서 기절 중이네.”
“……씁.”
듣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하나 더 접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아예 눈을 감았다.
첫 번째로 맞아서 정신을 이리 차리고 있는 거지, 주현운이랑 서하영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유예린은 기절까진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너는 상태가 어떤데?”
“자네랑 똑같지 뭐.”
유예린 바로 직전에 싸운 철백.
설천위처럼 기절하지 않고 버텨 낸 철백이다.
그 정신력은 진짜 인정해 줘야겠지.
“그나저나, 진짜 괴물이군.”
“그렇지.”
화경(化境).
그 뜻은 쉽사리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간단히 풀자면 무언가가 되어 버린 경지다.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이 넘을지도 모르는 무림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저 너머의 경지에 도달하면 정확히 무엇이 되는지 명확히 정의해 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화경(化境).
무엇이 되는지는 사람마다 전부 다르다.
그러나 표현되는 무의 강함은 대체로 하나로 통일된다.
강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거 하나다.
검기는 일류 정도라면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만 그 효율이 좋지 못할 뿐이지.
그런 검기를 자유자재로 만들어 내며 자연스럽게 초식에 실을 수 있다면 흔히 절정 고수가 됐다고 말한다.
그 검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 출납이 가능해지면, 즉 검기를 쏘아 내거나 외부로 돌려 활용할 수 있게 되면 흔히 초절정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건 무(武)의 한쪽 면만을 바라본 아주 치우친 구분법이다.
그래서 초절정이니 절정이니 하는 경지를 가르는 구분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다.
검기를 쏘아 내지 못한다고 해서 약한 게 아니고, 검기를 자유롭게 초식에 섞어 쓰지 못한다고 해서 약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강기는 아니다.
화경의 증표가 강기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강기가 가진 파괴적인 힘의 영향 때문이기도 있지만, 그 생성 과정 때문이기도 하다.
기(氣)의 응축과 실체화.
공기 중의 기체를 모아 배열해 액체나 고체로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수준의 능력이다.
화산이나 행성의 중력이 행하는 일을 인간의 의지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화경.
물론 이 세상의 사람들에겐 그런 지식은 없겠지만, 수많은 유저들이 강기의 대단함을 이렇게 해석했다.
설천위도 거기에 동의했고.
그래서 솔직히 말해, 강기만 아니면 어떻게든 붙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구나.]
“……강기가 단순한 부산물일지는 몰랐는데 말이죠.”
선후가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기의 응용력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기의 응용력이 압도적으로 좋아졌기에 강기를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끙.”
오랜만에 듣는 철백의 앓는 소리에 설천위는 다시 희미하게 눈을 떴다.
“새끼, 많이도 처맞았네.”
“멍이 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강철과 호형호제를 해도 될 만큼 단단한 철백의 몸 곳곳에도 멍 자국이 가득했다.
정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대항한 탓에 더 심한 것 같기도 하고.
“고작 기를 담기만 한 검이 그리도 아플 줄이야.”
“무장색인 줄.”
“그게 뭐냐?”
“아, 별거 아니야.”
……나도 패기를 주먹에 둘러 볼까?
혹시 모르지, 해적왕이 될 수 있을지도.
뭐, 이 깊은 내륙에선 헛된 꿈이지만.
또 쓸데없는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잡념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슬슬 눈이 좀 떠지네.
회복을 열심히 발동시킨 보람이 있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하는 시야를 인지하며 설천위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맞춘 듯 귀신같이 멈추는 남궁선과 유예린.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몸 곳곳에 멍 자국이 보이는 유예린이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후.”
“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예, 뭐. 차륜전이라도 하려면 바로 들어가야죠.”
“하하하하! 그런 거 좋아해. 열정적인 수강생은 가르치는 맛이 나는 법이지.”
고개를 숙이고 서하영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유예린을 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시작합니다?”
“얼마든지.”
남궁선의 허락과 함께 설천위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내공과 육체.
둘 다 온전히 회복됐다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건 남궁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무려 초절정 고수 셋에 절정 고수 넷이다.
당화유는 독을 아예 쓰지 못해 조금 약해졌다곤 해도 초절정은 초절정이다.
거기에 서하영은 이젠 초절정을 바라보는 완숙된 절정급 무인.
이건 뭐, 지치지 않으면 약물 사용을 의심해 봐야 하는 수준이다.
그렇기에.
“흐음?”
닿는다.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려 처맞았던 첫 비무 때와 달리 겨우 공격의 주도권을 설천위가 쥐는 데 성공했다.
검이 작지만 착실한 움직임으로 남궁선을 압박한다.
‘호오?’
그 뛰어난 실전 능력에 남궁선의 눈에는 놀람이 깃들었다.
고작해야 한 번.
심지어 첫 번째 공격에 반쯤 혼이 빠져서 정신없이 방어만 했을 첫 대련.
손발이 꼬이다가 맞은 기억밖에 없었을 대련에서 새겨진 두려움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몸을 적극적으로 들이댄다.
거기에다 대체 그 상황에서 어찌나 침착하게 봐 둔 건지 검을 보는 눈동자는 물론이고, 그 움직임까지 날카롭기 그지없다.
역시 보고 이해하는 건 꽤 잘하는가 보군.
설천위에 대한 판단에 한 줄을 추가한 남궁선은 손에 살짝 힘을 더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검의 궤적은 변한다.
여태껏 설천위가 보지 못한 움직임으로.
“커헉?!”
순간적으로 변하는 검에 강타당한 설천위가 마른기침을 토해 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 와중에 검으로 막아 낸 건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
거기에다.
‘완벽하게 통제한다, 이건가?’
아까 전에 처맞을 때도 그랬지만, 신체 능력을 올리는 그 이상한 힘은 쓰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쓰도록 일부러 더 험하게 몰아붙였는데도.
중간중간에 살기를 섞어 자극했음에도 절대 쓰지 않는다.
이런 녀석을 남궁선은 보통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정신력이 남다르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학생 시절 여러모로 신세를 졌던 학관장님의 부탁이고, 동생도 있으니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 철백이란 아이의 재능에도 흥미가 있었고.
그런데 이건…… 참 여러모로 재미있지 않은가.
“훌륭하구나!”
순간 거력을 품은 남궁선의 검이 단숨에 설천위를 날려 버린다.
여태까지 설천위가 피하고 막을 수 있었던 건 전부 남궁선의 배려 덕분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그야말로 항거할 수 없는 힘.
그 힘에 훨훨 날아간 설천위가 이를 악무는 순간.
“제 차롑니다.”
“좋다!”
철백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며 남궁선은 검을 들어 올렸다.
“얼마든지 덤비거라!”
* * *
“누님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격차가 더 심하더군.”
남궁천의 목소리에 호응한 철백은 약재와 함께 붙어 있는 천들을 만졌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몸에 상처가 많이 생긴 건.
특히 타격에 의한 공격은 금강육골(金剛肉骨)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한 후부터 상처 하나 난 적이 없었다.
멍이 든다는 감각을 까먹을 정도로.
그런데 이렇게 그걸 다시 새겨 주다니.
“그나저나 유 소저도 참 대단하더군.”
“선배님께서 봐주신 거죠.”
한쪽 구석, 마찬가지로 몸 곳곳에 천을 동여맨 유예린은 남궁천의 칭찬에 고개를 저었다.
“한 단계의 차이. 그게 그토록 큰 줄은 몰랐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에나 있는 것이 정상인 화경.
그 경지에 오른, 몇 살 위의 언니는 어떻게든 비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표도 결국 그 경지였으니.
하지만.
“멀었군요.”
주어 없는 유예린의 말에 남궁천과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재미?”
쟤는 맞는 게 취미인가?
순간 고개를 갸웃하는 남궁천의 의문에 어색하게 웃던 주현운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차츰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는 맛이 있잖아요?”
“저 재능충 새끼…….”
보통은 그 차츰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안 되기에 절망하는 법이다.
주현운의 말에 대답한 건 누워서 꿈틀거리던 설천위였다.
“응? 자네 살아 있었나?”
“저는 제가 과부가 된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철백과 유예린의 장난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6번.
남들이 3번에서 4번 정도 도전할 때, 설천위는 6번을 도전했다.
그 원동력은 강한 정신력과 빠른 회복.
상처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으니 도전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만큼 더 많이 처맞았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패룡지체(覇龍之體)]를 사용하지 않았다.
설천위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대충 아는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내공을 쓰지 않고 대련하는 것과 같은 수준 아닌가.
하물며 남궁선의 그 매서운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힘을 억누르고 버틴다?
죽진 않더라도 불구가 될지도 모르는 공격 속에서?
“다들 고생하셨어요.”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사이, 연수화와 소윤혜가 간단한 요깃거리와 마실 것을 들고 왔다.
“고맙소. 소저.”
“별말씀을요.”
남궁천의 감사에 웃으며 대답하는 연수화.
그리고 그런 그녀와 함께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소윤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다시 누웠다.
[이놈! 어서 말해라!]
“거, 남이 부추긴다고 할 만한 짓도 아니고 나이가 나인데 스스로 결정해서 하게 해야죠.”
전생에 헬스를 다닐 때 느낀 점이 있다.
운동이란, 즉 몸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은 결코 남의 지시로 할 수 없다.
본인의 의지.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고, 그것만큼 필요한 게 없다.
“하고 싶으면 스스로 말하겠죠.”
대련 도중 끊임없이 도에 손을 올리던 소윤혜.
그런 그녀를 남궁선이 몇 번이고 흘깃흘깃 보던 것을 기억한다.
하긴 처음부터 이상했다.
소윤혜는 도기를 날려 목을 베는 도술(刀術)의 고수.
서하영과 주현운이 친선전 후보에 올랐는데, 소윤혜가 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다.
남궁선은 어찌 알아낸 건진 몰라도 소윤혜의 사정을 알고 있다.
기동성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죽음조차 각오하고 도를 휘두르는 의지.
남이 시킨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소윤혜가 훈련을 참관하는 것을 막지 않은 이유도 그거겠지.
앞으로 한 3주 정도 남은 시간.
‘……빨리 결정해야 할 텐데.’
전력은 하나라도 더 늘면 좋은데 말이야.
“그런데 누님은 어디 가셨지?”
“다른 곳에도 대기 중인 후보들이 있다더군.”
……또 대련하러 갔다고?
“한참 멀었네…….”
서하영의 중얼거림이 훈련장에 퍼지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