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83화-진짜배기 (2)
“죽겠네.”
[죽을 것 같다는 건 좋은 신호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같은 심리 치료는 거부하고 싶은데요.
너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 오히려 거부감이 드네.
[거부하고 싶은 거겠지. 쯧쯧, 나 때는 말이야…….]
“또 라떼는.”
거 라떼가 뭔지도 모르는 양반들이 뭔 라떼를 그리 찾아.
혀를 차는 암영의적의 잔소리를 대충 흘린 설천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학관에 돌아오고 일주일.
철백의 독은 당화유가 해독해 줬다.
당화유의 목적은 희귀한 혈교의 독을 채취하고 연구하는 거였으니까.
겸사겸사했다고 볼 수 있지.
거의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 왜 움직였나 했더니 대충 감이 잡히는 이유였다.
‘게임에서도 동료로 들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지.’
당화유를 확정적으로 동료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찾은 유저가 없었다.
정말 가끔, 아주 가아아끔 예상치 못하게 동료로 들어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유저들이 캐릭터 육성 방향을 잡을 때 동료 목록에서 제외시키는 캐릭터였고.
능력은 확실하지만 함께할 방법이 불확실하니 어쩔 수 없었지.
없었는데…….
“……왜 자꾸 따라오십니까?”
“호기심.”
“아, 예.”
“혼잣말은 습관?”
“뭐, 그렇죠. 비슷한 겁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설천위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걸었다.
밖에서 달리면 이게 좋다.
돌아가면서 걷는 것으로 어느 정도 근육을 풀어 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돌아갈 생각을 안 해야 진짜 제대로 체력을 쥐어짤 수 있기도 하고.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해서 해야 하는 걸 알아도 뒤가 있으면 잘 안 하는 법이다.
……라고 천마가 말했다.
덕분에 죽어 나가는 건 나지만.
한숨과 함께 걷다 보니 이젠 대놓고 따라오는 당화유의 기척이 느껴졌다.
“뭘 그리 따라오십니까?”
“호기심.”
“아, 예.”
4차원 캐릭터는 진짜 이해하기 힘드네.
이해하기 힘들어서 4차원이라고 말하는 거지만.
뭐, 당화유는 일반 상식은 있는 편이라 막 그렇게 이상한 짓은 안 할…….
“……피 빼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안 돼?”
“안 돼요.”
이년이?
그새 붙어서 침으로 피를 빼 갈 생각을 하네?
침이 너무 얇아서 잘못하면 찔리는지도 모를 뻔했다.
저렇게 얇은 침으로 피를 가져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 외의 이유가 안 떠올라 그냥 찔러 본 건데 정답이었던 게 더 신기하지만.
“그 독,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자체적으로 해독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어.”
오, 말이 길어졌다.
뜬금없이 본론 꺼내는 것 보소.
일주일간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데.
“거기에 훌륭한 회복력. 그거 당가에서 필요한 재능.”
뛰어난 해독 능력과 재생 능력.
둘 다 독공을 익히는 데 필수 요소긴 하지.
독을 섭취한 뒤에 죽기 전에 해독을 해야 하고, 아무리 빨리 해독을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은 육체를 회복해야 하니까.
사실 생각이 없던 건 아니다.
“독공, 무(武)에 대한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된다.”
“뭐…… 그건 맞는데요.”
독을 뿌리는 방법만 연습하면 생각보다 효율이 좋으니까.
전신에 독을 두르고 그저 버티기만 해도 적을 죽일 수 있다는 건 상당한 이점이지.
생각해 본 적 없는 건 아니다.
혼령술을 본격적으로 익힌다고 해도 독공은 분명 훌륭한 선택지니까.
그렇지만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하나, 일단 독공 자체가 배우기 어렵다.
당가를 제외한 독공의 대부분은 사파에 있으니 제대로 익히려면 당가에 들어가야 하는데, 당가는 극히 폐쇄적이라 외부인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게임에서 독을 쓰고 싶으면 당가 캐릭터에게 은혜를 쌓아 배우거나 사파의 것을 강탈해야 한다.
또한, 독공은 익히는 데 돈이 많이 든다.
최대한 많은 독을 섭취, 흡수할 필요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은 물론 회복에 필요한 약재도 많이 든다.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무공이지.
당가가 폐쇄적으로 변한 이유가 외부인까지 가르치려면 돈이 부족해서라는 말도 있고.
내가 설천위로 살아가기로 다짐한 시점에선 이 두 가지 조건을 도저히 충족할 수가 없어서 일찌감치 포기했다.
무엇보다.
“독공이라도 무(武)를 담지 않으면 익히는 의미가 없죠.”
이게 문제다.
후반에 나오는 대부분의 적들은 영체 혹은 초월자인데…….
그냥 독으로 공격한다?
어림도 없지.
독공을 진짜 극성까지 익혀 의념을 담는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무(武)에 대한 재능은 필수이고.
어차피 끝에 가면 어려워질 길, 굳이 큰돈 써 가면서 걸어갈 필요가 없지.
내 대답이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당화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너, 그 말 누구에게 들었어?”
“예? 아니, 당연한 거죠. 독만 쓴다고 강해질 수 있으면 사파랑 당가가 짱먹었겠죠.”
뭘 당연한 걸 묻냐.
뭐, 보통은 생각 안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이제 코앞에 보이는 훈련장의 문을 열며 당화유를 바라봤다.
“여기서부터는 외부인 출입 금지예요.”
* * *
“흐음? 그래요? 아직 별말은 안 했군요.”
저녁 시간, 훈련장.
최근 들어 자주 찾아오는 유예린의 말에 설천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고정시켰다.
마보는 왜 하면 할수록 힘들까.
무게가 늘어서 그런가.
……그게 맞겠지.
뇌에 피가 덜 가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네.
멍청하게 흘러가는 사고를 접은 설천위는 눈동자를 돌려 유예린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건데?”
“그 사람은 여러모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욕심나는 건 가지려고 할 거예요.”
그건 또 뭔 소리야.
“그 사람, 가문에 진짜 헌신적이거든요.”
“그거랑 설 소협을 주의 깊게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휴식 겸 유예린의 곁에 앉아 있던 서하영의 질문에 유예린의 눈동자가 스산해졌다.
“그때 설 공자가 보여 줬던 기이한 해독력과 독을 흡수하는 힘. 그걸 가문에 가져갈 수 있다면 몸도 내던질 걸요?”
“내던져요?”
“스스로 정략결혼을 요구해서라도 데려가려 한다는 거죠.”
“……그건 꽤 대단하네요.”
가문을 위해서 스스로 정략결혼을 할 정도의 헌신이라니.
그건 또 그것대로 대단하다.
혀를 내두르는 서하영의 감탄에 유예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서운 점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
그건 또 뭔 소리야.
여기까지 오니 슬슬 흥미로워진 설천위까지 귀를 기울였다.
“가문에 그렇게 헌신적인 데도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을(乙)에서 병(丙)으로 강등 당했죠.”
“설마 선악의 구분이 없다는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가문에서 교육받은 것 이외의 부분에서는 뒤가 없다고 봐야겠죠.”
무서운 인간이네.
가문을 위하는 건 맞지만, 스스로 판단을 내리면 그대로 행동한다는 거 아니야.
혹은.
“명예는 별 관심이 없다든가?”
“아마 그럴 거예요.”
철저한 실리주의.
본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즉 본인이 사고를 쳐서 가문에서 잃을 게 명예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면 망설임 없이 행동할 수도 있다.
상당히 사파스러운 발상이구먼.
실리를 위해 명예 따윈 버린다는 마인드니까.
뭐, 게임에서 봤던 이미지랑 대충 비슷하긴 하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유예린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런데 왜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
사람 집중하기 힘들게.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유지하며 물어보는 설천위의 모습에 유예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하는 낭군님을 보고 싶어서요?”
“……또 왜 그러냐.”
왜 갑자기 이렇게 들이대는 거야.
원래 적당히 거리 유지를 했었잖아.
외부 시선도 있고.
찡그려지려는 미간을 필사적으로 편 설천위는 가만히 유예린을 바라봤다.
“됐다. 있고 싶은 만큼 있어.”
딱히 내보낼 마음도 안 들고.
……심장이 좋다고 두근거리고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아마 당화유가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걸 막으려 이곳에 있는 걸 테니까.
“그런데, 손님이 오신 것 같네요.”
유예린의 눈이 훈련장 정문을 향했다.
* * *
훈련장을 찾아온 교관을 따라 학관장실에 도착하니 학관장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것마저 의외였는데, 그 사람이 꺼낸 이야기는 더 의외였다.
“……후원이요?”
“예. 철귀라는 간악한 악인과 혈교의 사특한 무리를 쓰러트렸으니 충분히 받을 만하시지요.”
염소수염에 살짝 간사해 보이는 외모.
최하급 관리.
현대로 치면, 대충 9급 공무원쯤 되는 인간이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선 백성을 돕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협객 여러분들에게 항상 상을 내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아예 그런 조직이 신설됐다는 건가요?”
“예, 그렇죠.”
……이건 냄새가 난다.
의건청(義建廳).
의(義)를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한 관청으로, 주업무는 방금 사내가 말한 것과 같다.
공을 세운 무인에게 보상을 내리는 것.
대부분의 명문 정파는 관에서 무림에 손을 뻗는다고 싫어하는 부서이고, 실제로 소속이 없는 무인들이 이를 통해 관 쪽으로 많이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주로 후원의 대상이 되는 건 명문 대파의 인물이 아니라 소속이 없는 인물인데…….
“이걸 저에게요?”
“예입. 청혈단(淸血團)이라고 합니다.”
알지, 알고말고. 청혈단.
피를 맑게 해 준다는 이름처럼 몸의 보신에 상당히 좋은 영단이다.
제조법은 황실에서 가지고 있기에 시중에선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물건.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저는 가문이 있습니다.”
“하하! 가문이야 누구나 있지요. 생각하시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공을 세워 민초를 구한 업적에 대한 보상입니다.”
누가 민트초코를 구해.
나 그런 사람…….
아니, 그게 아니라.
헛생각으로 빠지려는 정신을 잘 수습한 설천위는 작게 호흡을 고르고 영단을 손으로 잡았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는 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지.
여기에 독이 들어 있을 리도 없을 테니까.
설령 있다고 해도 해독을 얻은 지금 즉사는 면할 수 있겠지.
청혈단을 받은 설천위는 자신을 칭찬하는 관리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준 뒤 바로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영약을 받았다고요?”
“어. 아무래도 내가 가문에서 버려진 자식이란 소문 때문인 것 같은데?”
정말 공을 치하해서 줄 거였으면 유예린에게 줬겠지.
“그럼 이상하네요. 철 소협도 충분히 받을 만한데.”
“그러니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아닌데…….
“뭐, 주면 나야 고맙지.”
대충 어떤 세력이 움직인 건지는 감이 왔다.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경계해야 하는 건 맞겠지만, 너무 과도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머릿속 한구석으로 의심을 밀쳐놓은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영단을 입에 넣었다.
“부탁해.”
“네.”
설천위가 약의 기운을 흡수하는 사이, 그 곁을 지키고 선 유예린은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절대 안 뺏겨요.”
그 상대가 독을 품은 전갈이라고 해도.
* * *
까득.
“황제 폐하의 직속 조직에서 영약을?”
“예.”
부하처럼 부리는 학생의 보고에 설천강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지원을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나뿐인 형은 갑자기 찾아와선 대놓고 혼내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설천위를 감싸는 모습을 보인 후 돌아갔다.
그래서 자중했다.
자중했는데.
까득.
“그 더러운 놈이…….”
어머니가 다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설천강은 설천위가 싫었다.
무엇보다 그런 반푼이가 가문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공을 세우고 또 세워서 이젠 황실의 상까지 받았다.
“……꺾어 줄 때가 됐군.”
인내의 시간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