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80화-혈사자(血師資) (6)
“크으으윽!”
잘려 나간 팔의 부위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씹어 삼키며, 혈사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이럴 순, 이럴 순 없다.
용과 늑대라니.
풍문으로 들었던 술사들의 싸움 방식이지 않은가.
무림(武林)이라는 이름답게, 그들의 영역은 비좁기 그지없다.
영적인 존재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실체에는 큰 힘을 쓰지 못하는 이들.
그런 존재가 바로 술사란 놈들이다.
그런데, 이놈은 대체……!
[크르르르르르.]
용의 울음소리와 함께 등줄기를 타고 섬뜩한 한기가 스쳐 지나간다.
본능에 이끌려 필사적으로 몸을 비튼 혈사자는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노오옴!!”
이런 어린놈이!
분노가 솟구쳤지만, 이성이 분노를 짓누른다.
순간적으로 소리친 것과 달리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혈사자는 설천위의 상태를 확인했다.
‘확실히 지쳤다.’
독특하고 난해한 공격으로 숨기고 있지만, 그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은 게 한눈에 보였다.
용과 늑대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들고 있는 도(刀)의 날카로움은 한없이 무뎌진 게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무려 네 명의 합공을 견뎌 내며 억지로 셋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중상.
이렇게 서서 싸우고 있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수준이다.
‘……빠진다.’
결심은 빨랐다.
늑대는 술사에게서 떨어진 상태에서도 공격할 수 있지만, 용은 술사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몸을 쭉 뻗어 공격해 오긴 하지만, 술사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진 않는다.
아마 제약이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거리만 벌릴 수 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
늑대만 떨쳐 내면 되니까.
살아서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다.
살아서 이 괴물 같은 녀석의 정보를 알릴 필요가 있다.
영(靈)과 무(武)가 조화된 괴물.
무림 단체이면서 천신의 강림을 추구하는 교에게 치명적인 적이 될 녀석이다.
처분해야 한다.
반드시.
굳은 결심을 세운 혈사자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력을 한껏 담은 일격.
이 한 방으로 거리를 벌려 탈출하리라.
“도망치게?”
입꼬리를 비트는 설천위의 물음에 혈사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조롱? 그게 무엇이 대수라고.
수치? 그런 건 아무런 가치도 없다.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천신(天神)의 재림(再臨).
혈세(血世)의 도래(到來).
이 최대의 가치 이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수치를 씹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자신들의 역할은 그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
굳은 결심으로 가득한 혈사자의 눈빛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놈들이지.
게임에서도 혈사자는 도망치는 패턴이 있는 괴랄한 몹이었다.
문제는 놓치고 나면 다음 혈교의 임무에서 적의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간다는 점이다.
참신한 기믹이라고 유저들이 칭찬 많이 했었지.
올라간 난이도가 거지 같다고 욕도 많이 했었고.
물론.
“놓아줄 생각 따윈 없는데?”
실전에서 굳이 하드 모드로 플레이할 만큼 변태가 아니라서 말이야.
담담하게 걸음을 내딛는 설천위를 향해 혈사자는 말없이 손을 내질렀다.
혈사자가 긴 세월에 걸쳐 쌓은 혈기(血氣)가 가득한 일격.
그냥 받아 내면, 반드시 큰 부상을 입게 되겠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받아 내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피하리라.
그런 계산이 깔린 일격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참으로 뻔하고.
참으로 조잡하다.
“쯧, 몸 상태가 개판이구나.”
[쯧, 몸 상태가 개판이구나.]
혀를 차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혈사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하다.
여태까지와 눈빛 자체가 달라졌다.
독기로 가득 차 있던 눈빛이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마치 한평생 오로지 한 가지만 갈고닦은 노인처럼.
그 순간.
서걱.
무언가가 베였다.
혈사자가 그리 느낀 순간, 소백진이 물었다.
“됐느냐?”
[됐느냐?]
그 물음에 소백진의 빙의를 해제한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요.”
반으로 갈라진 혈사자의 손.
손바닥부터 팔까지.
일직선으로 갈라진 모습은 너무도 끔찍해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설천위는 웃었다.
잔인해도 좋다.
끔찍해도 좋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지고, 얼마든지 끔찍해지마.
“끄아아아아악!!”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혈사자가 팔을 부여잡았다.
가득 실렸던 혈기가 잘려 나가며 폭주한 팔의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미처 쏟아 내기도 전에 잘려 나간 팔 때문에 내부에서 흐트러진 거다.
그 틈을 파고든 설천위의 손이 혈사자의 가슴에 닿았다.
콰득.
동시에, 설천위의 어깨에서 뻗어 나간 패융이 이미 만신창이가 된 혈사자의 팔을 물어뜯었다.
자르는 것이 아닌, 물어뜯는 끔찍한 광경이 한 번 더 펼쳐졌지만 설천위는 담담하게 혈사자를 바라봤다.
“도망칠 생각을 안 했다면 조금 더 버텼을 텐데.”
도주만을 생각하며 방어를 고려하지 않은, 이런 무식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소백진 할배를 불렀다고 한들 이리 싱겁게 끝나진 않았을 거다.
최소 몇 합을 겨뤘겠지.
만신창이인 이 몸으론 그 부하를 견딜 수 없을 테니 아마 소백진 할배를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일격.
한 번 정도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기에 이리도 싱겁게 끝나게 됐다.
소백진의 도(刀)를 쓴 대가로 몸 곳곳이 욱신거렸지만 뭐, 이 정도 통증 정도야.
가벼운 근육통 수준이지.
“이, 이이!!”
“말을 잊었구나, 피의 스승 놈.”
설천위의 비웃음에 혈사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지금 이놈이 뭐라고 한 거지?
“아, 외부인은 모르는 비밀이었나?”
히죽.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의 조롱에 혈사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노오오오옴!!”
분노와 당황함이 뒤섞인 최후의 발악.
억지로 욱여넣은 내공을 담은 발차기가 설천위의 옆구리를 향해 파고든다.
허나 거기까지.
어느새 물고 있던 팔을 뱉어 낸 패융이 그 다리조차 물어 비튼다.
뼈와 근육이 비틀리는 아찔한 통증에 혈사자가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컥!”
어느새 목을 움켜쥔 설천위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너는 혈신을 불신하게 되기 전까지 고통 받을 거다.”
우드드득.
뼈가 비틀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혈사자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그 마지막 의문과 함께 혈사자의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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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 혈사자(血師資)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혈사자를 단신으로 격파하였습니다!
업적 달성!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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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뭐야.
이것도 업적이야?
하긴 혈사자는 학생 때 잡기 힘든 녀석이긴 하지.
무려 초절정급의 괴물이니까.
그나저나 목표 달성이 안 떴네.
이건 임무가 아직 남았다는 건데…….
설마 남궁천이 향한 곳이 정리돼야 임무 달성으로 쳐주는 건가?
아니면 밖으로 나가 있는 인원들도 전부 죽여야 하나?
“천위!”
“오, 무사했냐?”
“내가 할 말이다. 괜찮은 거냐?”
“괜찮아 보이냐?”
“음……. 안 괜찮아 보이는군.”
피 칠갑을 한 철백은 설천위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전부 적의 피가 묻은 거지만, 이 녀석은 자신의 피가 대부분이다.
아마 지금 서 있는 것도 힘든 중상이겠지.
기이한 회복력을 보여 주니 금세 털고 일어나겠지만…….
“소협.”
“음, 온 거요?”
“네. 서 소저는 이미 저쪽에서 준비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빨리 가 봐야겠군.”
혈사자를 호위하던 절정급 적들은 유예린이 합류하면서 전멸시켰다곤 하지만, 아직 적들은 남아 있었다.
외부로 나갔던 병력들.
이렇게 화려하게 싸우고 있는데,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최대한 빨리 암살하고 빠져나갈 생각이었지, 이리될 줄은 몰랐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철백은 단숨에 밖으로 향했다.
서하영 혼자 막기엔 부담스러운 전력이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많은 상처를 입은 서하영이다.
적들과 충돌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철백이 다급히 뛰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예린은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봤다.
“괜찮으신가요?”
“응.”
“초절정의 고수를 꺾었으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겠네요.”
“뭐래, 이 녀석 무늬만 초절정이잖아.”
초절정의 영역을 뛰어넘는 혈기(血氣)를 쌓아 그만한 힘을 낼 뿐, 무공 자체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장법도 무식한 경우가 대다수였고.
만약 진짜배기 초절정이었으면 합공 단계에서 설천위는 최소 팔 하나는 잃었을 거다.
“무공의 깊이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강함을 증명하는 건 아니지요.”
아무리 부드러움을 담아내도 그 모든 것을 짓이기는 힘을 만나면 무너진다.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
무의 깊이도, 내공의 차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는 것은 오로지 승자뿐.
그런 의미를 담은 유예린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부족해.”
한참이나.
앞으로 나올 진짜 괴물들을 상대하려면 두 가지를 모두 손에 쥐어야 한다.
그래서 무림학관을 포기 안 하고 이렇게 붙어 있는 거 아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설천위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예린은 몸을 돌렸다.
“쉬고 계세요.”
초절정이 섞여 있지 않은 적들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담담하게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는 유예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나가자.
솔직히 슬슬 움직이는 게 힘들어졌으니까.
전투 중의 흥분으로 무시하긴 했지만, 솔직히 움직이는 것도 무리인 중상이다.
조금이라도 회복하지 않으면 되레 짐만 되겠지.
당장이라도 도우러 가고 싶은 조급한 마음을 삼킨 설천위는 몸을 움직여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혹시 모르니 안쪽에서 운기해야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설천위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좋아, 일단 내공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해서 회복으로 몸을 회복시키자.
……뭔가 말이 좀 묘한데, 아무튼.
일단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게 먼저…….
“……흠.”
눈을 감고 운기하려던 설천위의 눈에 작은 혈지(血池)가 들어왔다.
피로 된 연못.
고개를 돌리니 한쪽에 쓰러져 있는 소년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보면 분명 무언가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흠.
뭐지?
이 상황에서 혈교가 하려던 게 뭘까?
게임에선 아예 관심도 없었던 문제다.
전부 쓸어버리고 보스를 잡으면 끝나는 미션이니까.
그런데 지금 임무가 다 안 끝났다.
어쩌면 유예린이 향한 곳에 있는 이들을 정리하면 목표 달성을 이뤄 낼 수도 있겠지만…….
철귀의 때처럼, 게임에선 할 수 없었던 목표 달성이 있진 않을까?
그런 의문이 설천위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피의 연못을 향해 걸어간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 앞에 선 설천위는 무릎을 굽혀 그 연못을 바라봤다.
[아, 안……!]
[안 되긴 뭐가 안 돼!]
미처 말을 다 꺼내지도 못하고 주둥이에 박힌 주먹에 쓰러지는 혈사자.
죽은 후부터 설천위에게 혼이 붙잡혀 천마에게 두들겨 맞은 혈사자는 피눈물을 흘렸다.
이, 이 악독한 놈들!
마지막 자존심으로 꺼이꺼이 울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혈사자의 눈은 설천위를 향했다.
저 어린 괴물 놈이 대체 뭔 짓을 하려는 거냐.
‘이, 이대로 가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 죽어도 저 혈지만 멀쩡하면 되거늘!
저, 저!
혈사자의 두 눈이 부릅뜬 것을 느낀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이거구나?”
히죽이는 미소.
비틀린 그 얼굴에 혈사자가 당황하고,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혈지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 돼!!]
혈사자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