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78화-혈사자(血師資) (4)
혈사자(血師資).
피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인 그들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무력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천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주력으로 하는 교육자다.
간단히 말해, 사상 교육을 담당하는 놈들이다.
혈교 내에서 그 중요도는 두말할 것도 없으며, 당연히 지부장 위치인 주교보다 위 등급이다.
그들을 위한 호위의 수준도 당연히 지부장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철백이랑 서하영은 완전히 붙들렸겠군.’
초절정은 아무리 혈교라고 한들 흔한 전력이 아니다.
아마 절정급 고수를 몇이나 데리고 왔을 터.
그렇다면 일단 걱정해야 할 것은 철백과 서하영이 아니다.
“공자!”
이를 악문 유예린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웃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가 움직인다.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문 유예린은 냉정을 되찾았고, 자신의 앞에 선 암평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어졌네요.”
“흥! 네년에겐 어차피 죽음뿐이다!”
한껏 고양된 암평의 외침에도 유예린은 담담하게 손을 뻗었다.
뭐가 됐든, 최대한 빨리 이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 * *
“여유롭구나.”
처음부터 상대하던 절정급 고수들을 향해 달려들면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주시하는 설천위를 보며 혈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무림학관의 괴물들인가.
‘교의 대업에 방해가 되는 놈들뿐이군.’
오는 길에 만났던 놈들도 그랬다.
아직 자라나는 어린 나무나 다름없어야 할 놈들이 수십 년 산 노목의 뺨을 후려칠 기세로 솟아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놈은 오는 길에 만났던 놈들보다 더했다.
[크르르르르.]
귀를 간지럽히는, 짐승 특유의 낮은 울음소리.
어느새 그의 옆에 모습을 드러낸 푸른 털을 가진 늑대의 울음소리다.
대체 어디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알 수 없구나.”
조금 전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신경을 갉아먹는 기세가 있었다.
긴장하면, 마음속으로 침투할 것 같은 기묘한 힘.
마치 대사자(大師資)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그 느낌.
물론 대사자는 긴장을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항거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그 힘의 크기는 다르더라도 느낌이 비슷했다.
다만.
‘묘하게 다르군.’
사자(師資)들이 품는 것이 굴복을 위한 힘이라면, 이 힘은 뭐랄까 느낌이 좀 달랐다.
기묘하기 그지없는 힘을 느끼며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혈사자는 이내 천천히 움직였다.
관찰은 이 정도면 됐다.
이 이상 구경하다간 교의 소중한 인력이 낭비된다.
그리 생각한 혈사자의 몸은 단숨에 설천위를 향해 날아갔다.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는 신법(身法).
그 기묘한 움직임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상대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그 부드러운 대응에 혈사자는 과감하게 손을 뻗었다.
혈기(血氣)를 품은 장(掌)이 설천위의 심장을 부수기 위해 파고든다.
동시에 죽음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지부장의 호위들이 몸을 던졌다.
자신들이 죽더라도 설천위의 움직임을 막아 그를 죽음으로 이끌겠다는 독심(毒心).
허나, 그럴 수 없었다.
[크웡!]
순식간에 절정 고수 하나의 다리를 물어뜯으며 길을 만들어 낸 청랑 덕에 설천위는 그 틈으로 몸을 빼냈다.
기묘할 정도로 깔끔하기 그지없는 회피.
하지만 그 회피에도 혈사자는 담담하게 그를 쫓았다.
혈사자는 무력보다 신념을 우선시하는 직책이다.
교인들을 가르치고, 교리를 행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 애쓰는 자들.
그렇기에 약하지 않다.
아니, 약할 수가 없다.
혈교의 교리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수련이다.
사람의 생혈을 모으고, 의식을 통해 자신의 몸 안에 받아들인다.
그것이 혈교에서 행하는 제사이며, 기도이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한 사람이 혈사자다.
혈사자는 무력과 상관없이 믿음이 뛰어나기만 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교리를 많이 따르고도 지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혈사자가 되어 후학을 육성하는 데 힘쓰는 것이다.
기준점이 다르다.
우웅.
공기를 비트는 내력에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더 심하다.
압도적인 내공.
혈사자가 주력으로 쓰는 힘.
허공을 비틀 정도로 밀도 있는 내력이 설천위를 덮쳤지만, 설천위는 한층 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힘을 상쇄하고, 어떻게든 빈틈으로 몸을 욱여넣어 상처를 최소화한다.
생을 위한 몸부림.
철귀를 상대로 발악에 발악을 거듭한 보람이 있네.
적의 공격을 전부 받아 내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호흡을 고르며 상대를 바라봤다.
잠깐의 소강상태.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혈사자를 보며 설천위도 상대를 관찰했다.
초절정.
확실하다.
게임에서 보긴 했지만 아니길 바랐는데, 진짜 초절정이네.
아니, 혈교 이 새끼들은 음지에서만 활동하는 주제에 무슨 고수가 이렇게 많아?
상대의 수준에 대한 확신이 들자마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어떻게 해야 하지?
철귀를 잡고 얻은 스킬 포인트를 과감히 [영혼지체(靈魂之體)]에 투자했다.
마침 철귀랑 심상 세계에서 수련도 했으니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서.
그러니 남아 있는 스킬 포인트는 없다.
그렇다면 경험치는?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에 필요한 경험치는…….
‘씁, 될까?’
조금 부족하다.
조금.
잘하면, 잘하면 될 것 같은데…….
잠시 적들을 보며 가늠하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 먹어도 고다.
검을 빼어 든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드루와!”
다 발라 줄 테니까!
* * *
치열해지는 공방.
이를 악문 유예린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폭혈(爆血)은 결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수법이 아니다.
억지로 체내에 쌓은 혈기를 폭주시키는 방법이니 오래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눈앞의 사내는 그걸 이리도 길게 유지하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양쪽 귀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으며, 몇몇 주요 혈관이 마치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마 이 싸움이 끝나 살아남는다고 해도 최소 수년의 정양이 필요한 중상을 입거나 폐인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사내는 그런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을 유지하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이게 혈교.’
정보로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지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체감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이게 경험의 부재가 만들어 내는 빈틈이다.
어린 나이로 인해 생기는 부족함이다.
하지만, 그딴 이유로 어리광을 부려선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섰는가.
무엇 때문에 무(武)를 갈고닦았는가.
무엇 때문에……!
고급스러운 의상 속 몸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흉터가 욱신거린다.
무인(武人)에게는 영광의 상처지만, 사랑을 꿈꾸는 소녀에게는 그저 흉물스런 흉터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러나 그것조차도 감내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곁에 갈 수조차 없었으니까.
유예린의 두 눈에서 스산한 살기가 흘러나온다.
오만이다.
내가 언제부터 몸을 사리며 싸웠던가.
적을 죽이기 위해 이 몸에 칼이 박히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싸워 오지 않았던가.
은검(隱劍)이라는 허명을 얻어 오만해졌던 거다.
지금 내가 적을 짓밟지 않으면, 내 유일의 구원이 짓밟힌다.
이 몸을 사려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흉물스러운 흉터에 놀라 그가 떠나가더라도 그의 목숨을 구하는 것.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사랑이 아니던가?
그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해 본질을 잊고 있었다.
까득.
이와 이가 맞물려 부서질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유예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호흡.
적이 파고들기엔 충분한 빈틈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파고든다면, 사지 중 하나를 주더라도 목을 꺾어 주마.
파고들지 않는다면, 이 내장이 뒤틀리더라도 힘을 끌어올려 머리통을 부숴 주마.
유예린의 눈이 살심과 독기로 끓어오르는 그 순간.
“독하구나!”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마침 유예린이 한 호흡 끊으며 만들어 놓은 여유로 인해 생긴 틈.
허나 그 틈 속에서 유예린도, 암평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흐흐흐흐.”
전신에서 피가 흐른다.
부러진 것으로 보이는 오른팔이 덜렁거리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명백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주변을 나뒹구는 세 구의 시체.
설마 초절정인 혈사자와 싸우며 나머지 셋을 죽인 건가?
그런 의문이 암평의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설천위가 호흡을 들이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혈사자를 바라봤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비웃음.
“죽이지 못했구나.”
“놈…….”
호쾌하게 외치며 싸움을 시작한 설천위의 모습을 비웃던 것도 잠시였다.
그 독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스스로의 몸이 망가지는 와중에도 약한 이들의 목을 쳤다.
대체 왜?
차라리 수비적으로 싸우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저기서 지부장과 싸우고 있는 여아가 자신을 도와줄 거란 희망이라도 있었을 텐데.
오는 길에 자신을 막아섰던 이들이 도우러 와 줄 거란 희망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무리해 가면서 이들을 죽였지?
그런 의문이 저절로 떠올랐지만, 일단 구석으로 밀쳐놓았다.
왜냐고?
저 독한 놈이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독하게 싸우던 놈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기감을 펼치며 혈사자는 천천히 설천위를 관찰했다.
조급함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
확실하게 분석해서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첫 번째 원칙이다.
‘밖에 있는 놈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고, 지부장도 아직 싸우고 있다.’
즉, 지원 병력이 오고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자신보다 저 녀석이 그걸 더 빨리 알아챘을 리도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 병력의 여부까지 확인한 혈사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대체 뭐 하자는 것이냐?”
지원도 오지 않는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이길 승산도 없다.
대체 무엇을 원해 그리도 독하게 싸운 거지?
이유를 알 수가 없…….
“됐다.”
상쾌한 음성.
언뜻 희열까지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혈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이 미친놈은 무슨…….
“흡?!”
순간, 먹먹해지는 가슴을 큰 호흡으로 되돌린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
살기(殺氣)?
아니다.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건……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하던 그 힘이다.
마치 자신이 절대적으로 위에 있는 존재이니 어서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힘.
그 힘에 혈사자는 치솟는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걸음을 내디디려고 했다.
저 가증스러운 놈의 목을 잘라 버려야 이 불쾌함이 사라질 것 같아서.
그런데.
그런데…….
[크르르르르르르르르.]
낮게 울리는 짐승의 울음에 혈사자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
저 사내의 곁을 지키던 늑대의 울음소리와는 무언가 미묘하게 다르다.
저 사내가 넷이나 되는 고수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고작 팔 하나 부러지고 끝나는 기적을 만들어 낸 장본인 중 하나가 늑대.
그 늑대의 울음소리와 다른 이 울음소리는?
당황함을 겨우 숨긴 혈사자의 눈이 설천위를 훑는 그 순간.
천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둘러싼, 묵빛의 무언가.
마치 사냥감을 휘감은 거대한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무언가.
점점 더 선명하게, 점점 더 또렷하게 그 존재가 드러난다.
묵빛의 비늘과 대비되는 선명한 금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한다.
홍채가 위아래로 긴, 인간의 것이 아닌 짐승의 눈동자.
그 전체를 확인한 순간, 아무리 혈사자라도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요, 용?”
묵빛의 용이 설천위를 지키듯 그의 전신을 휘감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