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76화-혈사자(血師資) (2)
“……전멸?”
부하가 가져온 소식에 암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력이 출중하다고 할 만한 이들은 아니어도 간단히 전멸할 정도로 나약한 이들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서 정보를 전달할 생각부터 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시도조차 성공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무림학관의 애송이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허나 은검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쯧, 거슬리는 년이야.”
은검(隱劍).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유가의 핏줄인 것은 물론이고, 그 안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괴물.
이대로 놔두면 아마 수년 내로 초인의 경지에 오르겠지.
그리고 유가가 뿌리는 압박은 더욱더 거세질 거고.
시간이 더 지나면 진짜 괴물이 되어 그 칼끝이 자신들에게로 향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천신께서 강림하시겠지만.
하지만 이대로 방해를 받으면 천신의 강림이 늦어지는 것도 사실.
배제할 필요가 있다.
“같이 온 이들은?”
“절정급으로 예상되는 무인 셋입니다.”
“예상된다?”
“그것이…… 한 사람은 절정급이 확실한데, 나머지 둘의 무공이 워낙 기이해 확실하지 않습니다.”
교의 정보로도 완전히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라…….
부하의 말뜻을 이해한 암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초절정의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겠군?”
“예. 아무래도 그건 확실해 보입니다.”
설천위가 남궁천을 비무에서 이겼다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비무였기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조금만 더 싸웠더라면, 승리는 남궁천의 것이 됐을 거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무인들 중 그 사실을 아는 무인의 수가 상당하니 퍼지지 않을 수가 없는 정보다.
애초에 학관에서도 남궁천을 이긴 설천위가 무(戊)를 받은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풀어야 할 정보이기도 했고.
부하의 보고에 적들의 전력을 대충 가늠한 암평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교인들을 움직여라.”
“움직이라 하심은?”
“이 기회에 은검의 숨통을 끊는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물러나는 부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암평은 이내 다시 자신이 하던 작업에 몰두했다.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연못.
특수한 약품 처리로 굳지 않게 만든 피에서 나오는 피비린내가 암평의 코를 파고든다.
허나 그 냄새조차 향기롭다고 느끼며, 암평은 의식에 집중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연못으로 들어간다.
물보다 진한 피의 감촉을 느끼며 암평의 내공이 손을 타고 연못으로 흘러들어 갔다.
“…….”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 퍼진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은 한어가 아닌 기괴한 말이었지만, 암평은 익숙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주문(呪文).
뜻을 품은 언어가 그의 영혼과 공명해 내공에 또 다른 힘을 더한다.
연못의 색깔이 점차 진해져 간다.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진해져 가는 연못을 바라보다 암평은 두 눈을 감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천신 강림을 위한 위대한 첫걸음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 * *
“흠, 그래서 습격하자고요?”
“어.”
대충 만든 야영지.
설천위의 주장에 철백은 가만히 턱을 쓸었다.
“이 인원수로 선공은 너무 섣부른 거 아닌가요?”
서하영의 지적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부담이 있는 선택이긴 하지.”
“분명 피해자를 구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전부 죽는 건 본말전도예요.”
담담한 서하영의 대답에 마운배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숭고하지만 그것이 계획된 일이라면 그 구하는 사람의 목숨도 그 가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선의로 행하는 일에 비극이 따라서는 안 된다.
구하고 죽은 사람은 영웅이 될지라도 그 주변 인물들은 그 죽음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법.
자신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물론 무작정 돌입하자는 얘기는 아니야.”
다 나름의 근거가 있어서 하는 얘기다.
“먼저 적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근거지를 알아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을 거야.”
고문?
그런 게 통했다면 한번 세가 기운 혈교 따윈 진즉에 망했을 거다.
공을 원하는 정파 무림인은 얼마든지 있고, 그들의 힘은 이 중원의 반절 이상을 덮을 정도로 굳건하다.
아무리 이 넓은 땅의 음지에서 암약하는 조직이라곤 하지만 혈교급 네임드는 최우선 척살 대상이다.
그러므로 혈교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 기밀 보장은 기본 중 기본이란 소리다.
아마 여태까지 이런 짓을 하면서 수많은 교인이 죽었어도 단 한 번도 단숨에 은신처를 들킨 적은 없었을 거다.
기나긴 수색 끝에 걸렸겠지.
단물 다 빠진 은신처를.
그렇지 않으면 혈교라는 미친 조직이 여태껏 유지되고 있었을 리가 없다.
“방비가 허술할 거란 이야긴가?”
“어.”
“음, 나름 일리가 있는 얘기네요.”
유예린까지 동의하자, 서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혹시나 해서 얘기해 봤던 거다.
이렇게까지 의견이 나오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강자는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을 거다.”
“그렇겠지.”
정보상으로 현재 이 인근에 와 있는 이들 중 가장 강한 이는 초절정으로 추측되는 주교(主敎)다.
이 인근을 관할하는 인간이니 그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유 매라면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예상치 못한 변수야.”
교인을 협박해서 알아낸 정보로는 한 명의 주교만 있다고 했지만, 그걸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말단 교인.
모든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아마 교주를 호위하는 이가 최소 한둘, 잘못하면 일개 소대급으로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은밀하게 교주를 호위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자들을 우리가 상대해야 돼.”
“과연.”
초절정의 고수다.
호위로 붙어 있는 이들도 최소한 그의 무력에 맞춰 줄 수 있는 수준은 될 터.
절정 이상의 적이 몇이나 포진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에 서하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면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 그 반대야.”
들어가야 한다.
“적들이 우리를 찾으러 나올 테니 그 빈틈을 노리자는 거군요?”
“어, 까딱하다간 전체랑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까.”
조금 전에 습격했던 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했다.
유예린의 실력과 혼들의 수색 덕에 도망친 이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혈교인이라고 해도 사람이고, 당연히 교대 정도는 할 터.
교대해야 할 인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황이 알려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때, 주교가 취할 행동은?
공격이다.
어차피 제물을 다 모은 상황.
방해하는 이들만 없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은신처를 들킬 염려가 없으니 내부에서 대기하던 이들을 차출해 이쪽을 공격할 것이다.
혈교인에게 들은 정보로는 머릿수가 꽤 된다.
아마 장기전이 될 터.
그사이에 인질이 죽고 주교가 원하는 것을 이루면 적을 전멸시킨다고 해도 이쪽의 패배다.
설천위의 설명에 상황을 이해한 철백과 서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운배는 넋 놓고 입을 벌리고 있었고.
‘……얘들 뭐지?’
이게 무림학관의 수준인가?
아니, 아니지.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저 설천위라는 녀석 때문이다.
혼을 협박해 정보를 얻어 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여하튼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이 모든 일이 실행 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혈교가 왜 무림의 골칫덩어리였던가?
공적으로 지목받은 주제에 음지에서 끊임없이 삐쭉삐쭉 솟아오르는 그 신출귀몰함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혈교가 어디에서 솟아오를지 단박에 알아채고 미리 뿌리를 꺾어 버리겠다?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감히 실현해 내지 못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무림의 골칫덩어리였던 것이고.
그걸 이렇게 쉽게…….
‘동료들이 믿는 걸로 봐선 진짜일 확률이 높다.’
많은 이들이 괴이(怪異)를 믿지 않는다.
괴력난신을 멀리하는 학자들이 그러하고, 스스로의 검을 믿는 무인이 그러하다.
허나, 무당은 믿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본직이 도사 아닌가?
도를 닦고 우화등선하겠다는,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 집단이다.
심지어 제를 지내는 것은 물론이오, 악령을 쫓는 부적까지 파는 곳이 무당이다.
그런데 무당의 속가인 마운배가 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기사멸조랑 다를 게 없다.
그렇기에 마운배는 믿기 힘든 마음을 감추며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운배까지 동의하자 자연스럽게 일행의 의견은 그쪽으로 모아졌다.
“언제 시작할까?”
“아무래도 빠르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혈교가 굼뜨게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
유예린의 의견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혈교 놈이 이렇게 빨리 입을 열지 몰라서 야영지를 찾으라고 했던 건데.
최소 하루는 더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다.
적의 습격도 한 번 정도는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물론 구출을 위한 일이니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넉넉하게 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기회가 찾아왔다.
여유 있게 움직이는 것과 느리게 움직이는 건 다르다.
지금은 느리지 않게 움직여야 할 때다.
“그럼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한 사람?”
설천위의 말에 잠시 갈등하던 마운배는 결국 손을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휴식이 더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마운배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하자.”
* * *
“…….”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암평이 침묵 아닌 침묵을 만들어 낸다.
두 눈을 감은 채 조심스레 중얼거린다.
한 치의 움직임도 없는 몸이 그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려 줬다.
하지만.
“주, 주교님!”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에 그 집중이 깨졌다.
순간, 미간을 찡그린 암평이 고개를 든 순간.
“커헉!”
목이 꿰뚫린 교도가 쓰러졌다.
“참으로 역겨운 곳이군요.”
목을 관통했던 검을 뽑아 가볍게 휘두르는 동작으로 모든 피를 털어 내는 신기를 보인 여인, 유예린이 주교를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이 역겨운 곳을 만든 범인인가요?”
“감히 이교도 따위가…….”
분노가 깊게 서린 음성.
그 목소리가 크지 않음에도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쉽지만, 저는 무교랍니다.”
이교도라는 암평의 말에 반박하며 유예린은 천천히 걸었다.
“밖에 있던 이들은 어찌했지?”
“제 동료들이 상대해 주고 있지요.”
“그렇다면 네가 은검(隱劍)인가.”
“예. 과분하게도 무림의 동도들에게 그리 불리고 있지요.”
암평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유예린의 눈은 동굴 내부를 훑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
동굴 구석에 대충 던져져 있는 소년 소녀의 모습.
죽었나?
순간 치솟던 화가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들의 가슴을 보고 가라앉는다.
치솟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마음속 깊숙이.
“참으로 역겹군요.”
검을 검집에 넣으며 유예린은 암평을 바라봤다.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쳐 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대체 무엇인가요?”
살기로 그득한 그 눈빛에 암평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천신의 강림! 이 모든 것은 그분이 이 세계에 내려와 진정한 세계를 열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쌓는…….”
“그만.”
암평의 말을 끊은 유예린은 양팔을 늘어트린 채 암평을 바라봤다.
살기로 가득했던 그 눈동자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싹하다.
저 나이에 분노는 물론 살심마저도 완전히 제어해 내는 것인가.
그 말도 안 되는 부동심에 감탄하면서도 암평은 웃었다.
“혼자 온 것이 네 실책이다.”
그가 유예린의 오만함을 지적한 순간, 숨어 있던 이들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그 수가 다섯.
아무리 유예린이라고 할지라도 단숨에 처리할 수 없는 숫자다.
자신까지 합세하면, 필승이다.
그리 생각한 암평이 한 박자 늦게 뛰려는 그 순간.
[소적검(消跡劍)]
무형의 궤적이 단숨에 두 사람의 목을 자른다.
뿌득 뿌득.
팽창한 근육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사람이 전장에 합류했다.
“미안한데 너희 다섯, 아니 셋은 이쪽이다.”
검을 쥔 설천위의 입가가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