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75화-혈사자(血師資) (1)
적들은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비수를 던지는 건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조차 미끼로 삼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 과격하기 그지없는 공격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서하영이었다.
무인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방어가 최우선 순위다.
상대에게 상처 하나 내겠다고 자기 팔을 내주면 손해이고, 상대의 팔 하나 가져가겠다고 자기 목을 내주면 실패다.
이쪽은 당하지 않고, 적을 베는 것.
설령 적에게 당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이는 것.
그게 전투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기본조차 무시하고 있었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다.
팔이 잘려도 적에게 상처 하나를 내고자 하고.
목이 잘려도 적의 팔 하나를 자르고자 한다.
서하영으로서는 처음 상대해 보는 형태의 적이다.
당연히 어색하고 버거울 수밖에 없다.
깡!
적의 검을 창대로 받아 내며 서하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적도 없지만, 마음의 평정을 위해 의식적으로 호흡에 집중했다.
천천히, 차분하게.
이기고자 한다면 3초 안에 이길 수 있는 상대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자.
결심이 선 순간, 서하영의 창이 비틀렸다.
적의 검을 튕겨 내고 단숨에 궤도를 바꾼다.
상대의 빈틈을 향해 서하영의 창이 파고든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 또한 망설임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그 창에 자신의 심장이 꿰뚫릴지언정 들어 올린 검을 내리치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에 서하영은 이를 악물었다.
각오를 굳힌다.
믿음에 미쳐 버린 이들을 상대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방법.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다.
적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던 서하영의 창이 단숨에 회전해 거대한 경력을 만들어 낸다.
막대한 경력을 담은 창이 상대의 심장을 때린다.
꿰뚫는 것이 아니다.
때리는 것이다.
순간, 충격에 의해 떠오른 상대의 검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허공을 가른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신을 맞추려고 팔을 향해 떨어지는 검을 가볍게 피해 낸 서하영은 몸을 돌리며 창을 회전시켰다.
창기(槍氣)를 담은 날이 상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실선이 생기고, 죽음에 이른 상대의 몸이 목과 떨어져 허물어진다.
그렇게 한 명을 제압해 낸 서하영은 주위를 돌아봤다.
적의 숫자가 꽤 많다.
자신에겐 한 명이 오긴 했지만, 다른 이들에겐 더 많은 수의 적이 갔을 터.
지금이라도 빨리 합류해서 도와야…….
“흐하하하!!”
집중하고 있을 땐 듣지 못했던 호쾌한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홀로 떨어져 완전히 적에게 포위당한 철백의 웃음소리였다.
대체 뭐가 좋아서 저리 웃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깡!
철백의 몸을 때린 검이 너무도 허무하게 튕겨 나온다.
검기를 두른 검인데도 인간의 몸을 베기는커녕 파고들지도 못한다.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
가능할 리가 없다.
공격 자체가 안 통하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호쾌하기 그지없는 손짓으로 적들을 날려 버리는 철백의 모습에 서하영은 작게 웃었다.
최근 대련에서 손맛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진짜였네.
철백을 향한 믿음이 한층 더 확고해진 서하영은 이번엔 유예린을 찾았다.
무려 유예린이다.
어떤 대처를 하고 있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봤지만, 서하영은 이내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가 안 되네.’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에 손이 베이고, 다리가 베인다.
완전한 절단은 아니다.
인간의 뼈를 자르는 건 아무리 무인이라 할지라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물론 유예린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렇기에 힘줄만을 정확하게 베어 내 적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저 검기(劍技)가 이토록 놀랍진 않았겠지.
섬세함이 장점인 무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뛰어날 줄이야.
그 격차를 새삼 체감한 서하영은 어깨를 으쓱이곤 마지막 사람을 쳐다봤다.
솔직히 가장 걱정했던 사람이다.
무위도 이 중에서 가장 낮고, 저 어르신들의 힘을 쓰는 데도 제한 시간이 있다.
벌써부터 그 시간을 낭비할 순 없으니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대체 왜 저렇게 된 거지?’
목숨을 걸고 덤비는 상대에게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덤비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내어주고 적의 팔을 취하려는 상대에게 자신의 목을 내어줄 각오로 파고든다.
그리고 정말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회피와 함께 적의 목을 취한다.
도박.
어떤 의미로 저 광기에 휩싸인 혈교 놈들보다 더 미친 전투 방식이다.
그런데 설천위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대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저 미친 방식은 어디에서 익힌 걸까.
말도 안 되는 전투 방식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서하영은 결국 창을 들고 설천위를 향해 걸어갔다.
불안해서 도저히 보기 힘들 정도니 이쪽부터 도와야겠어.
* * *
“……대단하구려.”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겨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 데 성공한 마운배는 감탄이 가득한 눈으로 설천위 일행을 바라봤다.
원래부터 이름 높은 은검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검은 은밀하고 무섭기로 무림에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대단한 것은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일행 모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점이었다.
적의 공격을 전부 튕겨 내는 외공의 고수.
소림의 승려는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육체다.
거기에다 자유자재로 창을 다루며 적을 농락하는 창수.
그 창 앞에 자신은 검 한 번이나 제대로 내지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허리에 검과 도를 찬 기이한 소년.
그 검은 신묘하기 그지없는 궤적을 그려 내며 적을 베어 낸다.
무당에서 검을 하사 받은 마운배다.
검을 보는 눈만큼은 나름 자신이 있는데, 그 자신감마저 씻은 듯이 사라질 정도로 검의 궤적을 제대로 따라갈 수조차 없었다.
그런 검을 쓰면서 저돌적이기 그지없는 전투 방식.
적의 목을 확실하게 베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전투 방식은 실로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한데, 그렇게 싸웠음에도 몸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렇게 몸을 내던지면서도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피해 냈다는 소리다.
대체 얼마나 전투 경험이 많아야 저런 확신에 가득 찬 전투 방식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단 말인가.
마운배가 그야말로 감탄과 존경이 섞인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설천위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성과가 있네.’
실전이니만큼 [패룡지체(覇龍之體)]를 쓰긴 했지만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철귀를 상대로 치렀던 그 싸움들이 전부 확실한 가치를 지녔음이 증명됐다.
거기에다.
“검술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사람을 달래기 위한 우쭈쭈 칭찬이 아닌, 진심이 담긴 칭찬.
기쁨과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죽어라 싸웠거든.”
“흐음? 어디서요?”
“내면에서.”
능청스럽게 웃은 설천위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근육을 풀었다.
“그래서 정보는?”
“없어요. 아쉽게도.”
“뭐 그렇겠지.”
입을 열면 혈교 놈들이 아니지.
“할배들은요?”
[이쪽도 마찬가지다.]
[몇 놈 정도 희망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구나.]
오? 뭐야, 희망이 있어?
하긴, 그렇긴 한가.
종교도 살아 있을 때나 믿는 거지 죽어서 혼이 된 상태로 처맞고 있으면 종교에 대한 믿음이 유지될 리가 있나.
애초에 종교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지금은 조금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믿는 신을 위해 몸을 내던지면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 이를 것이라는 강한 믿음.
그런 믿음이 바탕에 깔리지 않는 한, 목숨을 도외시한 광신도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믿음이 실시간으로 흔들리는 현장에서 버틸 재간이 있겠나.
죽고 나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더니 이상한 할배들에게 처맞고 있으면 확고했던 믿음도 꺾일 만하지.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곤 철백을 바라봤다.
혼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철백은 그 뜻을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야영지를 찾아보마.”
“부탁해.”
그렇게 철백이 서하영과 함께 야영하기 적합한 곳을 찾으러 떠나자, 설천위는 마운배를 바라봤다.
“적들이 습격해 왔다는 것은 저희가 적들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소리겠지요.”
“동의하오.”
“그러니 이제부턴 쉴 때도 번을 세울 겁니다. 선배님께 초번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초번.
불침번을 서 본 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초번과 말번이 가장 피로가 적어서 좋다.
그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설천위의 배려에 마운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전투에서 큰 도움이 못 되었는데, 그런 배려까지 받을 순 없소. 내가 중간 번을 서도록 하겠소.”
“아, 그러십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여기서는 그래도 초번을 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 그런 대화가 나와야 할 흐름 아닌가?
아니, 뭐 그렇다고 해도 초번을 서라는 말을 받아들이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리 쉽게 받아들이면 뭔가 묘하게 섭섭한데?
여기서는 조금 더 만류해도 되지 않나?
마운배가 묘한 섭섭함을 품고 고개를 끄덕일 때, 설천위는 이미 그를 머릿속 한구석에 밀쳐 두었다.
본인이 서 주겠다는데 뭐, 그저 감사할 일이지.
그 이상의 일은 아니니까.
주변 경계에 들어간 암영의적을 바라본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연신 처맞고 있는 영혼을 바라봤다.
[살, 살려 주세……!]
[어허! 이미 죽었는데 어찌 살아나느냐? 이놈!! 혈교에서 그런 역천의 가르침을 내리더냐!!]
[아, 아뇨! 세상을 피로 물들일 천신께선!]
[혈신이다, 이놈!!]
[악! 아니! 그, 그 천신께서 이 세상을 피로 물들여 혼탁함을 씻어 낼……!]
[피로 씻으면 더 더러워진다는 기본 상식조차 모르는 것이냐!]
오! 거칠어, 거칠어.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는 혼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대단하네.”
“예?”
“아니, 혼이 돼서도 믿음을 지키는 여력이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그야말로 영혼 깊숙이 뿌리박힌 믿음이라 할 수 있었다.
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익힌 것이 아닐 텐데, 이 정도의 세뇌라니.
참 대단하다.
‘그래서 혈사자(血師資)겠지.’
피의 가르침을 내리는 스승.
혈교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다.
무력적으론 최고라 할 수 없지만, 정서적으론 거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존재.
설천위가 기억하기론, 이 임무는 그 혈사자와 맞붙는 임무다.
혈사자의 무력을 생각하면 그리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깨끗해.”
예쁘네.
자연스럽게 나오려는 뒷말을 급히 삼킨 설천위는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유예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묘하게 불안하단 말이지.
입관 시험 때는 이상한 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철귀는 제대로 스토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붙잡았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고 그 덕분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이지만, 피해가 더 커진 건 사실이었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사자도 게임 속에서와 묘하게 다른 거 아닐까?
아니면 그 외의 전력이 더 있진 않을까?
그런 고민이 설천위를 괴롭히던 그 순간.
[마, 말하겠습니다! 전부 말하겠습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곧바로 영혼 주제에 땅 위에서 무릎을 꿇고 훌쩍이고 있던 혼에게로 다가갔다.
얼마나 처맞았는지 영혼인데도 얼굴이 부어올라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불쌍한가?
그럴 리가.
“말해라. 본진의 위치, 전투 인력의 숫자, 수준 전부.”
[그, 그……!]
[망설이느냐?]
[망설이지 않게 도와줄까?]
[아, 아닙니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머, 먼저 위치는……!]
천마와 소백진의 협박에 벌벌 떨면서 혼이 입을 열었다.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정보를 설천위는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몸뚱이는 별로여도 머리는 좋으니까.
이내 또 입을 여는 다른 혼들의 정보까지 전부 취합한 설천위는 야영지 마련할 곳을 찾은 후 돌아온 철백의 뒤를 따랐다.
조금 쉬면서 작전을 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