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74화-인생불이(人生不易) (4)
“맹에서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지원?”
부학관장의 보고에 팽후는 미간을 찡그렸다.
무림맹의 산하기관인 이 무림학관은 당연히 무림맹의 지시를 따른다.
하지만, 구단(九團)이라 불리는 아홉 개의 최상위 무력 조직의 수장과 같은 경지에 오른 팽후다.
그가 이곳의 학관장으로 있는 한, 무림학관은 단순한 학관 이상의 격을 지닌다.
물론, 그건 사파의 흑룡학관도 마찬가지이지만.
여하튼 미래를 양성한다는 가치는 생각보다 크다.
그러니 무림맹이 직접 무림학관에 손을 벌리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어딘데?”
“혈교입니다.”
“미친놈들 중 하나군.”
긴 역사를 지닌 무림.
당연히 그 속에서 반짝이다 사라진 세력은 수도 없이 많다.
온 천하를 뒤덮을 것처럼 무섭게 일어났다가 결국 기세가 사그라진 이들.
아무도 모르게 태어나 한 번 반짝여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이들.
수많은 이들이 무림이라는 이름 아래 태어났다가 사라졌다.
혈교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역사에 제 이름을 뚜렷이 남긴 놈들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토대로 아직도 사그라들고 있는 숨을 애써 붙들고 있는 놈들이기도 하고.
“잔당인가?”
“납치입니다.”
눈치 빠른 부학관장의 대답에 팽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서 무림학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거름으로 줄 수 있는 잡것들이 목표일 때.
혹은 그런 거랑 상관없이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아주 급박한 상황일 때.
그 외에도 뭐 자잘한 이유로 도움을 요청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바로 이거다.
학생들이 방학 중에 흔히 하는 산적 토벌도 첫 번째 경우이고.
“상황은?”
“현재 확인된 인원만 셋입니다.”
“대상은?”
“전원 어린아이들입니다.”
“제물이군.”
젊다 못해 어린 피는 악령들이 좋아하는 제물이다.
혈교는 그들이 천신(天神)이라고 숭배하는 신을 믿는 이들이다.
물론 외부 사람들은 모두 혈신(血神)이라고 부르지만.
여하튼, 혈교처럼 종교로 묶인 집단을 상대하는 것이 제일 껄끄럽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목적인 돌진.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거침없는 공격.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무서운 집착.
믿는 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하는 무시무시한 광기.
이런 요소들은 광신자(狂信者)라는 존재를 한없이 껄끄럽게 만든다.
그런데도 무림맹에서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지금 당장 공문을 붙이게.”
“예.”
이리도 급하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는 게 맞겠지.
게다가.
‘그 녀석은 갈 것 같군.’
이렇게 좋은 기회도 없을 테니.
나가는 부학관장을 바라보는 팽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최근 들어 사건이 점점 많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래도.
‘쌓인 힘이 슬슬 터질 때가 된 건가.’
시대가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 * *
“갈 건가?”
“어. 가야지.”
늦은 저녁, 훈련장.
철백의 물음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라…….”
무림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
설령 그것이 악명이라고 한들 그 떨친 바가 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수업도 채워 준다고 하니 안 갈 이유가 없지.”
최소한의 학점을 채우기 위해 수업을 듣고 있긴 하지만, 설천위는 상당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수업 진도를 제대로 못 따라가는 건 물론이고, 한 수업에서 배우는 무공 하나를 1성이라도 익히기 위해 쓰는 시간이 상상 초월이다.
남들은 일주일도 안 돼 1성을 익히는데, 설천위는 무려 2주를 써야 했다.
그것도 심상 세계에서 천마에게 직접 지도를 받아야 나오는 속도다.
솔직히 말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이걸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데…….
조만간에 무슨 수를 내든가 해야지.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수업을 들은 거로 쳐주는 이런 임무는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안 그래도 갔겠지만.’
이 게임에서는 진짜 또라이들이 몇 명 있다.
혈사련도 그렇지만, 혈교, 진의단, 천명회, 사혈천 등등.
온갖 조직이 있고, 그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또라이들이 있다.
진의단(眞義團)은 입관 시험 때 학관을 습격했던 놈들이다.
위선자들을 배제하고 진짜 정의로운 자신들이 위에 서서 이 무림을 이끌어야 한다는 반(反)구파일방 성향의 조직이다.
그렇다고 힘이 그렇게 센 건 아니다.
무력적으로 정말 경계해야 할 조직은 한 손에 뽑는다.
그럼에도 이들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대로 두면 인명 피해가 더 커질 텐데, 가야지.”
이놈들은 신념이란 이름 아래, 혹은 종교란 이름 아래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놈들이다.
그 무서움이야 현대에서도 역사로 증명되지 않았던가.
제국주의, 파시즘 등등.
인류가 잘못을 저지른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언제나 힘없는 양민들이 입었지.
물론 전부 막을 순 없다.
게임에서 본 지식은 한정적이니까.
하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라면 최선의 선택을 할 순 있을 거다.
그게 지식의 힘이니까.
“내일 출발하자.”
“알았다.”
“옙!”
고개를 끄덕이는 철백과 서하영이 훈련장을 떠나고, 설천위는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쉬는 시간?
없다.
그러다 죽으면 누가 책임진다고.
무엇보다.
‘오늘은 닿겠지.’
이제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하니까.
* * *
“과연. 그래서 자네들도 가는 건가?”
“어. 그런데 연 소저는 왜?”
“음. 연 소저는 일단 내 사용인으로 들어온 터라 동행할 수밖에 없네.”
무림학관 정문에서 만난 남궁천은 연수화와 함께하고 있었다.
“사용인?”
“음, 아무리 그래도 사파의 흑룡학관을 졸업한 졸업생이다 보니 무림학관에 입학하는 건…….”
아!
그러고 보니 연 소저가 몇 살 연상이지.
22살쯤 됐나?
23살이었나?
여하튼, 남궁천 녀석.
누님을 그렇게 존경하더니 연상이 취향이었나?
“어머, 소협들?”
“유 소저.”
서하영의 묘한 눈빛에 부끄러워하는 연수화의 뒤로 유예린이 웃으며 나타났다.
대동하는 인원은…….
없나? 아니면 은신한 호위들이 있나?
살짝 고민하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나.
“홍유, 아니 홍 소저는 안 데려가?”
“네. 그 아이는 아직 수련에 힘쓸 때거든요.”
흠, 그러고 보니 나랑 같은 무(戊)였지?
승급에는 그리 큰 욕심이 없나 보네.
“잘됐네요. 저는 그럼 설 공자랑 함께 가야겠네요.”
“좋아요!”
왜 네가 그렇게 좋아하냐. 서하영.
아주 눈빛이 초롱초롱하구나.
“그럼 이만 출발해야겠군. 우리는 안루로 갈 걸세.”
“우리는 대오니 가는 길은 금방 갈리겠군.”
둘 다 무한의 위쪽에 있는 곳으로, 납치 사건이 일어난 곳들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어린아이 납치.
수색에 많은 인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럼 시간 그만 끌고 어서 가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 *
강행군.
얼마 가지 않아 남궁천과 헤어진 설천위는 일행과 함께 강행군을 이어 갔다.
걷지 않고 뛰었고, 최소한의 휴식만을 한 채 내내 달렸다.
수색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강행군은 독이 된다.
하지만 철백도, 서하영도 심지어 유예린도 그저 말없이 설천위를 뒤따랐다.
이유는 두 가지.
상황이 진짜로 급해서.
아이들이 납치당한 상황이다.
한시라도 더 빨리 찾아내 구출해 낼 필요가 있다.
생존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면, 이런 강행군 정돈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확실한 건가요?”
“어. 도착만 하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어.”
자신감.
도착만 하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찾아낼 수 있다고 설천위가 장담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면 수색이 길어지는 것을 대비해 피로를 줄일 필요가 없다.
차라리 빠르게 몰아쳐 일을 어서 끝내고 쉬는 게 낫지.
그렇기에 세 사람은 묵묵히 설천위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도착했네요.”
사건이 일어난 장원에 도착했다.
나름대로 부를 쌓았던 상인의 장원.
다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에서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도착한 순간, 설천위는 곧바로 장원 곳곳을 살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났다.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설천위가 너무 확신에 차서 대답했기에 믿었지만, ‘대체 어떻게?’라는 의문이 계속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를 믿는 것과 그 방법에 의문이 드는 건 다르니까.
대체 무슨 방법을 쓰려고?
[왕!]
“……청랑?”
설천위의 품에서 튀어나온, 조그마한 개의 모습에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오는 길엔 본 적이 없었는데?
저 아이가 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찾았어?”
[왕!]
“그럼 가자.”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청랑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린 강아지 특유의 둥글둥글한 외양은 사라지고, 날카롭다는 생각이 드는 주둥이와 눈빛으로 변화한다.
순식간에 웬만한 성인도 우습게 볼 정도로 덩치가 커져서 어린아이가 보면 단박에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크르르.]
낮고 섬뜩한 짐승의 울음소리.
그 귀엽던 청랑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위압감 가득한 모습에 서하영의 눈동자가 빛났다.
“멋있어!”
“서 매는 동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귀엽잖아요!”
어디가?
작을 때는 귀엽다는 말이 맞지만 저 모습은 귀엽다기보다는 무섭다, 혹은 위압감이 느껴진다가 맞는 것 같은데?
눈빛을 빛내는 서하영의 모습에 피식 웃은 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천위, 따라가기만 하면 되나?”
“어. 따라와.”
거침없이 장원을 나선 설천위는 상당한 속도로 걷는 청랑의 뒤를 따랐다.
며칠이나 지난 상황.
다행히 비가 온 적은 없었기에 냄새를 따라갈 순 있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물론.
‘근처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거다.’
당연히 게임에서 정확한 위치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풍경은 묘사됐었다.
암영의적을 찾았을 때처럼, 아마 근처에 가면 게임과 비슷한 모습을 알아챌 수 있을 거다.
‘게임상으론…….’
남은 시간은 하루인가.
빡빡하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모르는데 하루 만에 찾는 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한다.
구해야 하고, 막아야 하니까.
그렇게 청랑의 코를 믿고 추적을 시작하길 몇 시간.
일행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당연하다는 듯이 산을 관통해 지나간 거다.
아무리 무인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웬만하면 대로로 다니거늘…….
“누구냐!”
순간, 누군가의 호통에 설천위의 몸이 돌아갔다.
검을 뽑은 중년인.
푸른 무복을 입고 있는데, 그 소매에 적힌 글귀가 인상적이다.
태극(太極).
“무당파의 속가분이시군요. 저희는 무림학관에서 수색을 돕기 위해 온 이들입니다.”
빠르게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해 낸 유예린은 앞으로 나서서 포권과 함께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경계심을 잔뜩 품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는 대무당파의 속가, 마운배라고 하네.”
“저는 섬서유가의 유예린이라고 합니다.”
“은검?”
오, 유명하네.
하긴 무려 10대에 초절정에 오른, 몇 안 되는 정파 무림의 신성인데 유명하지 않을 리가 있나.
몇 년 전에 있었던 괴물, 남궁선 때문에 그 이름이 살짝 바랜 느낌이 들지만 초절정이면 대문파의 장로급이다.
그런 경지를 10대에 올랐다면 무림에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음, 무려 은검이나 되는 이가 수색에 나서 주다니 이 마 모 감사를 표하오.”
“아닙니다. 무림의 동도로서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지요.”
오, 말 좀 하는데?
“한데 선배님은…….”
“음, 흉수를 발견한 사람이외다.”
“홀로 수색을 하고 계셨습니까?”
“내 눈앞에서 아이가 납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있겠소.”
두 눈에 어린 분노를 읽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희와 함께…….”
순간, 말을 하다가 멈추는 설천위의 모습에 마운배가 당황했지만 일행은 당연하다는 듯 움직였다.
검을 뽑고, 창을 들며, 주먹을 쥔다.
그리고 뒤이어 기척을 읽은 유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치고는 너무 대놓고 오는군요.”
날아드는 비수를 쳐 내며 유예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을 든 설천위가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찾아갈 수고를 덜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