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73화-인생불이(人生不易) (3)
“언니, 진짜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뭐가?”
“그 양반이 정(丁)으로 승급하는 거요.”
“그 양반이라니, 얘도 참.”
홍유화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챈 유예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그이에게 참으로 공격적이네.
오히려 계(癸)일 때는 별 신경도 안 쓰더니.
무공이 성장하고 단련을 거듭하면서 최근 상당히 듬직해졌는데…….
그러고 보니 이 아이 취향이…….
“……설마 설 공자에게 마음 생긴 건 아니지?”
“언니, 저 섭섭해요.”
“미안.”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홍유화의 눈빛에 재빨리 사과한 유예린은 작은 헛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
“정(丁)에 오를 수 있을 거 같으냐고 물었지?”
“네.”
“물론. 믿고 있어.”
“……하지만 여태까지 그 말을 안 꺼냈던 건 믿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요?”
그러니 스스로가 갑(甲)에 오르고자 했던 것 아닌가요?
뒷말은 삼켰지만 홍유화의 눈빛에서 그 속내를 읽은 유예린은 작게 웃었다.
“응. 최소 학관을 다니는 중에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설천위의 재능은 바닥을 기었고, 학관을 다니는 몇 년은 그가 유년 시절에 겪었던 절망을 극복하기에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그녀가 간섭할 수도 없었다.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에게 도움만을 받는 생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설천위의 성격이라면 큰 자괴감에 빠졌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내내 지켜보면서도 결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믿었으니까.
그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내가 그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내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으니 나도 기대치를 높여야지.”
“언니와 같은 병(丙)에 그 공자가 도달한다고요?”
병(丙).
여러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지만, 가장 큰 조건이자 기본 조건은 역시 무위다.
기의 수발이 자유롭고,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손에 넣은 경지.
초절정.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를 반쯤 뛰어넘은, 진정한 초인이라 불리는 화경의 바로 전 단계에 위치한 경지다.
물론 무(武)의 경지라는 것은 사람이 임의로 정하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강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초절정이라도 절정에게 질 수 있고, 절정이라도 일류에게 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
열 번 싸워 아홉 번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평소의 무학으로 증명해 낸 것이다.
가진 게 많은 이가 싸움에 유리하다는 건 자명한 이치니까.
그렇기에 경지가 높으면 강자로 대우받는 것이다.
그들은 낮은 경지에 있는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자들이니까.
물론 경지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로지 실력만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무림학관의 계급 체계도 그런 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물론 시간이 흘러 그 계급 체계의 안정화를 위해 경지를 가늠하는 방식을 도입했지만…….
그건 오히려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여하튼 경지란 것은 맹목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신뢰성을 지닌 구분 방법이다.
그렇기에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병(丙) 등급을 위해 올라야 하는 초절정이란 경지는, 무림에서도 강자로 인정받는 경지다.
그런 경지를 작년까지 계(癸)에서 발버둥치던 이가 올라선다?
졸업 전까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아무리 공을 세우고 실적을 쌓아도 초절정 이상의 무위가 없다면 병(丙)으로의 승급은 불가하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할 수 없다.
홍유화의 불신 가득한 시선에 유예린은 빙긋 웃었다.
“그 사람은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거든.”
하물며 그 약속이 자신과 한 것이라면.
“아버님께 집을 나간다고 말씀드릴 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
“……예?”
“응?”
“……결혼 허가를 받으려면 그 조건이 필요하다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결혼은 당연히 해야지, 가문끼리 정한 일인데. 설 공자가 데릴사위로 들어오느냐, 아니면 내가 설 공자랑 나가서 사느냐의 문제란다.”
뭐지? 또라이인가?
순간, 언니에게 불경한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깨달은 홍유화는 헛기침과 함께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 그러면 그냥 결혼해서 살면 되지 않나요? 굳이 악을 쓰면서 그걸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가문도 빵빵하겠다.
그냥 집에서 잘 살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당연한 의문에 유예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아이는 절대로 유가에서 키우지 않을 거야.”
가문의 방식이 잘못됐다는 소리는 아니다.
가문은 냉정하고 냉혹하지만, 그래도 정도를 아는 집단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유년기가 행복했느냐?
절대로 아니다.
“내 자식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벌써 자식 생각을 해요?”
언니 나이가……. 아, 민가라면 이미 애가 있을 만한 나이긴 하네.
“애효, 그러니까 할 수 있다는 거죠?”
“응, 물론.”
“그럼, 언니 내기할래요?”
“내기?”
“일단 시작점! 흑룡학관과의 비무가 있기 전에 설 공자가 정(丁)에 오른다! 물론 저는 아니다에 걸게요!”
“그래? 그럼 내기에 뭘 걸 거니?”
“음……. 그건 조금 고민해 볼게요!”
고민하는 홍유화를 보며 유예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렴.”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
* * *
“천위, 요즘 죽어 가는구먼.”
“응, 뒈질 것 같아.”
“솔직하네.”
학기가 시작되고 벌써 한 달.
설천위의 표정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볼은 깊게 파였다.
눈은 퀭하니 마치 죽은 생선의 눈깔 같고, 입술은 말라서 쩍쩍 갈라졌다.
폐인의 몰골.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철백은 웃을 수 없었다.
‘달라지는군.’
하루하루.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성장의 극치다.
대련은 해 보지 않았지만, 그 기세가 점차 날카로워지고 있는 것이 옆에서도 느껴졌다.
물론 심정은 이해가 간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미친 듯이 수련에 힘쓰고 있으니까.
설천위와 함께 훈련장에 도착한 철백은 이미 그곳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을 포함해 총 다섯.
계(癸) 세 명이 아득바득 발악하여 얻어 낸 훈련장이 꽤나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형님! 대련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손을 흔들며 반기는 주현운의 모습에 철백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루 종일 명상에만 빠져 있는 설천위를 대신해 다른 이들이 철백과 비무를 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네 사람 모두 무기가 다르고 특히 주현운의 경우는 수많은 무기를 사용하기에 경험이 한쪽으로 치우칠 우려도 없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협력 성장.
이 모임 덕에 철백은 급속도로 단단하고 강해지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써야 할지 조금씩 감을 잡아 가고 있었다.
거기에.
“흡!”
수십 개의 창영을 단숨에 뿌려 대는 서하영.
그리고 그런 창들을 단숨에 베어 내는 소윤혜.
절정이라 불리는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의 대련이 화려하게 훈련장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럼 저희도 시작할까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철백은 주현운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래, 지금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 집중해야지.
철백은 주현운과의 비무가 가장 좋았다.
자신에겐 없는 천재적인 몸놀림과 번뜩이는 임기응변.
그것을 주력으로 삼는 주현운은 닿을 수 없는 상대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주현운도 철백과의 비무가 가장 기꺼웠다.
자신이 여태 본 적 없는 길로 가는 진짜배기 중 하나.
어떤 공격도, 어떤 변수도 그 단단한 육체 하나로 밀어붙인다.
그 어리석기까지 한 우직함은 상대하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주었다.
그렇기에 좋았다.
저런 자를 어찌 상대해야 할지 그 길이 보였으니까.
철백과 주현운이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사이, 설천위는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은 명상에 빠졌다.
정확히 말하면 내면으로 들어갔다.
기초 체력 단련?
하루도 빼먹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
[회복]을 이용해 극한의 극한까지 쥐어짠다.
그리고 중간에 수업을 듣고, 끝나면 잠깐 복습.
수면 시간은 최소한으로.
그 외의 시간은 전부 명상에 투자했다.
그렇게 수도 없이 도전했다.
후웅.
메마른 바람이 설천위의 뺨을 때린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내면세계에서 설천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철귀를 바라봤다.
“여.”
“크흐흐, 독종이로구나.”
오늘도 어김없이 인사를 하는 설천위를 바라보며 철귀는 웃음을 흘렸다.
독종.
그래, 독종이다.
“천 번은 이미 진즉에 넘었다.”
저 목을 베어 낸 횟수가 천을 넘은 지 한참 됐다.
그럼에도 저 녀석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도전해 왔다.
결코 멈추지 않고.
끔찍한 죽음을 겪으며 끊임없이 달려드는 것은 근성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네 녀석은 강해질 것이다.”
“물론.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러냐.”
웃으며 철귀의 앞에 선 설천위는 자세를 잡았다.
권(拳)?
아니다.
검(劍)?
아니다.
도(刀)다.
권도, 검도 이미 닿았다.
아직 닿지 못한 것은 오로지 도(刀)뿐.
오늘도 어김없이 도를 꺼내 드는 설천위를 보며 철귀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독하다, 독해.
주먹은 이미 닿았고, 검 또한 이미 닿았다.
그런데도 만족을 모르고 이리 달려드는 모습이라니.
도(刀)를 들고 나서 하루에 죽는 횟수가 다시 초기로 돌아갔음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좋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은 아니었다.
강해질 것이란 인정?
아니다.
그건 이미 인정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내 목을 치는 순간, 내 철사(鐵絲)는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당연한 소리를.”
이죽거린 설천위는 도의 손잡이를 쥔 채 몸을 낮췄다.
뭐가 됐든.
일단 베고 시작하자.
* * *
“이, 이러지 마시오!”
불타는 건물.
그 건물 속에서 사내는 울먹이며 빌었다.
“제발! 제발 처자식만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애원하는 사내를 보며 검을 든 이는 담담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찍는다.
“이, 이, 악……귀…….”
심장을 관통당해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멎은 사내에게서 흉수는 담담하게 검을 회수했다.
사내의 시체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흉수는 그대로 집 안 곳곳을 뒤졌다.
그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표했던 것을 찾은 흉수는 바닥을 뜯어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아, 아이만은!”
아이 하나를 끌어안은 채 떨고 있는 여인.
나름 능력 있는 상인에게 시집와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기에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떨 떨고 있었다.
허나 그런 공포 따위 흉수에겐 알 바 아니었다.
단숨에 여인의 목을 검으로 꿰뚫고 7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강제로 끄집어낸다.
공포와 혼란에 빠진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흉수는 망설임 없이 혈을 짚어 아이를 잠재웠다.
그리고 진기를 흘려 다시 한번 확인한 흉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이를 어깨에 둘러멘 뒤 일어섰다.
목표물은 회수했다.
이제 남은 건 돌아가는 일…….
“누구냐!”
순간 문을 박차고 들이닥친 이의 모습에 흉수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 이상 소란이 커지면 안 된다.
빠르게 정리하고…….
“노오옴!!”
고함을 내지르는 사내의 손에 어느새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순간, 상대가 자신보다 강자라는 것을 깨달은 흉수는 곧바로 계획을 변경했다.
서걱.
사내의 검을 팔로 받아 낸 흉수는 그대로 자신의 팔을 도마뱀의 꼬리처럼 버려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단숨에 뒤쫓으려던 사내는 떨어진 팔을 보곤 멈춰 섰다.
잘려 나간 옷이 흘러내려 드러난 맨살.
거기에 새겨진 붉은 십자.
“……혈교!”
무림 공적 중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