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72화-인생불이(人生不易) (2)
“뭐 하는 거냐?”
“……달리기.”
“죽어 가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다 깊은 사정이 있다.”
무림학관 내에서도 외진 숲길.
설천위를 찾으러 왔다가 쓰러져 있던 설천위를 발견한 철백은 혀를 내둘렀다.
몸이 병상을 털고 일어난 지 이제 이틀째인데, 무슨 수련 강도가…….
‘반성해야겠어.’
서 소저를 신경 쓴다고 정작 해야 할 본분을 소홀히 한 것 같군.
그런 건 핑계가 되지 않거늘.
자기반성과 함께 고개를 털어 잡념을 지워 낸 철백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 소저가 찾는다.”
“……응?”
그걸 왜 네가 말해?
“수련 중에 방해하기 싫으니 넌지시 말해 달라더군.”
“전혀 넌지시가 아닌데.”
“네가 훈련장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껏 거칠어진 숨을 되돌리며 설천위는 몸을 일으켰다.
웬일로 직접 안 찾아오고 부탁을 하나 했더니, 배려심 깊은 건지 아닌 건지.
그나저나 진짜 죽을 것 같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물론이고, 전신이 고통스럽다.
근육이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간을 달렸으니 다리 근육이 버티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문제는 이것조차 회복을 통해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회복된다는 점이다.
내공을 이용한 회복도 충분히 빠르지만, 역시 스킬은 못 따라오지.
숨을 고르며 설천위는 회복을 발동시킨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용건은?”
“나도 모른다. 그냥 찾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만 했으니까.”
“오케이. 간다고 전해 줘.”
“전해 주라고? 그럼 넌?”
“나?”
철백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덜 달렸어.”
회복에 사용할 내공까지 전부 고갈된, 진짜 텅 빈 상태를 위해선 아직도 더 달려야 한다.
수련을 시작했으니 유예린의 배려를 무시하지 않고 그 배려에 걸맞은 수련을 해야지.
“으아아아아!”
가즈아아아아아!!
[훌륭하구나!]
“훌륭하면 채찍을 멈추라고!!”
[그럼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말거라!!]
“끄아아아아!!”
[어허! 허리 다친다!]
“그 전에 죽겠지!!”
* * *
인간은 생각보다 근성으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많은 것을 해낼 수도 있고…….
“하악, 하악.”
“……좀 씻고 오지 그래요?”
나쁜 의미로도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먼지 속에서 열광의 춤이라도 춘 듯 온통 먼지와 땀투성이가 된 설천위를 보며 홍유화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대체 언니는 왜 이런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매력이라곤 1도 없……진 않네. 얼굴은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그것뿐인 것 같은데…….
아닌가? 나름 근성도 있나?
수련을 상당히 힘들게 하긴 한다던데.
하지만 그래도 이건 마음에 안 든다.
아니, 하나뿐인 약혼녀를 만나러 오면서 이런 꼴로 오는 건 좀 아니지.
구겨진 채 펴질 줄 모르는 홍유화의 미간에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설천위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씻으면 오늘 못 올 것 같아서.”
사실은 죽어라 달리다가 이 근처까지 와서 유예린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겨우 멈춘 거지만.
아직도 뒤에서 천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다.
그나저나 저 인간, 채찍을 왜 저리 잘 쓰는 거야.
예전부터 느꼈지만, 아주 손목 스냅이 장난이 아니네.
“흥, 됐어요. 언니가 들어오라고 했으니 들어오세요.”
“고마워.”
“흥.”
거, 자꾸 흥흥거리지 마라.
콧물 나온다.
홍유화의 뒤를 따라 걸으며 설천위는 건물 내부를 관찰했다.
그러고 보니 상위 단계, 갑을병(甲乙丙)에 들어가면 별채를 내준다고 하더니…….
여기가 그 별채구나.
와 본 적이 없었네.
게임에선 몇 번이나 봤지만, 실제로 와 보니 생각보다 더 잘 꾸며져 있네.
장식이 화려하지 않아 눈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허전하다는 느낌도 없다.
디자인엔 일자무식이라 잘 모르겠지만, 일단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란 건 알겠다.
누가 꾸민 거지?
“언니, 도착했어요.”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걸음을 멈춘 홍유화를 따라 설천위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
“들어오시라고 해.”
“그런데 엄청 더러운데요? 흙바닥에서 구른 것 같아요.”
“괜찮아.”
오, 홍유화한테는 반말하는구나.
맨날 존댓말만 해서 몰랐는데 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 홍유화는 문을 열며 몸을 비켜 줬다.
들어가라는 그 몸짓에 어색함을 참고 들어가니…….
“어서 와요. 공자.”
부드러운 미소.
여전히 아름다운 유예린이 그를 반겨 줬다.
“훈련하다 말고 오신 건가요?”
“어, 뭐 그렇지. 달리다가 근처를 지나서 생각난 김에 바로 왔어.”
“잘하셨어요. 빨리 알면 알수록 좋은 이야기니까요.”
빨리 알수록 좋은 이야기?
순간,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에피소드 중에서 그런 것이 있나 떠올리던 설천위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유예린이 답을 말했으니까.
“흑룡학관이 본격적으로 움직였어요.”
“……벌써?”
학관장은 몇 개월 안에 사건이 벌어질 거라고 했다.
그렇단 말은 반대로 며칠 이내로 일이 벌어질 확률을 낮다는 소리인데…….
흑룡관 쉑히들 빠르네.
“그리고 우리 학관도 내부 방침이 결정됐죠.”
“내부 방침?”
“흑룡학관과의 친선전에 나가는 건 최소 정(丁) 이상.”
……정 이상?
학관장은 그때 우리보고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아!
과연.
“올리라고?”
“네. 흑룡학관과의 친선전에 나가 승리하면 큰 업적이 됩니다.”
“졸업도 빨리할 수 있고, 맹에 들어가서도 나름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도움이 되고?”
“네.”
긍정의 대답.
그 대답에 설천위는 담담한 표정으로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 같은데?”
질문에 유예린은 작게 미소 지었다.
“가문에서 내건 조건이 있어요.”
“……조건?”
“제가 갑(甲)으로 졸업하거나.”
맑은 눈동자가 설천위를 향한다.
“공자가 병(丙)으로 졸업하거나.”
“……과연.”
몇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있을 법한 조건이다.
아무리 설가(雪家)의 핏줄이라도 쓸모없는 놈에게 딸을 내줄 순 없는 노릇이지.
신흥삼가의 하나인 섬서유가는 게임에서도 자세히 안 나오는 가문 중 하나니까.
그나마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현 가주는 무림맹의 구단(九團) 중 하나를 맡고 있는 거물이다.
게임에서는 유예린이 경지에 오르면, 그 자리를 바로 넘겨주지만.
여하튼, 그런 거물급 딸에게 장가가는 거니 조건이 까다로운 게 당연하겠지.
설가는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백 같은 가문이니까.
사파 구제에 모든 걸 걸고 있는 설가는 무림맹에 한발이 아니라 발톱만 걸치고 있는 수준이고.
“해 주실 수 있나요?”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유예린의 목소리에 그녀를 바라봤다.
평소와 같이,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하지만, 왜일까.
“왜 망설여?”
“……네?”
“내가 싫다고 거절할까 봐 겁먹은 것 같은데?”
“…….”
역시 섬서유가. 얼굴색이 하나도 안 변하는…….
아, 홍조.
섬서유가의 자식답게 안색을 거의 흐트러트리지 않는 유예린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만큼 부끄러운 거지!
왜 이리 귀여운 거냐!
“해야지.”
“……해 주실 건가요?”
“해 주는 게 아니야. 당연히 하는 거지.”
솔직히 말해 반항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 욕망은, 이 바람은 설천위의 것이니까.
천희가 아닌, 설천위의 바람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거절할 수가 없다.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진다.
그러니, 첫날에 했던 다짐을 떠올리자.
나는 설천위다.
그렇다면, 이 심장에 충실해지마.
이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전력으로 달려 주마.
“기한은?”
“흑룡학관과의 친선전은 빠르면 2학기, 늦어지면 내년입니다.”
“그럼 선출은 더 빠르겠네?”
“아마 1학기가 끝나기 전에 하지 않을까 싶어요.”
과연,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 이거지?
넉 달?
“충분해.”
나는 지금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에서 무(戊)에 있다.
한 단계.
한 단계만 올리면 된다.
필요한 건 업적.
그리고 그런 업적을 쌓을 만한 일?
충분히 알고 있다.
다만.
‘부족하네.’
부족하다.
그런 업적을 세울 만한 일을 해결하려면 최소 정(丁) 이상, 병(丙) 이하의 무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무(戊)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는 수준이란 말이지.
몇몇 조건부 스킬이 빠지면 확실하게 무(戊) 이하다.
“씁, 결국 답은 하난가.”
“예?”
조건부 스킬이 없어도 그 이상의 실력이 되도록 하는 것.
“아니, 별 뜻 아니야. 그럼 난 수련하러 가 볼게.”
딱히 유예린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바빠질 테니까 얼굴 보고 싶으면 훈련장으로 놀러 와.”
“……네.”
“그럼 또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유예린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을 나온 설천위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근육을 풀었다.
스트레칭.
운동의 시작.
[좋구나.]
“……씁, 의욕 꺾이니까 조용히 해요.”
[껄껄껄! 사랑을 위해 달리는 것은 젊음의 특권……!]
“에헤이.”
이 할배가 또 주책이네.
“그런 거창한 거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냐?]
“어차피 해야 할 거였으니까 조금 서둘러서 두 마리 새를 다 잡으려는 것뿐이죠.”
[그게 사랑을 위해 달리는 것 아니더냐?]
“……조금 다르거든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뉘앙스가 다르다 이 말이야. 뉘앙스가.
“……부질없지.”
입술을 삐죽이고 달리는 설천위를 보며 천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뛰고, 또 뛰어라.
체력을 기르고, 속도를 올려라.
그리고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내면을 바라봐라.
무신(武神)으로 가는 길이 거기에 있으니.
그자가 패도(覇道)를 걷지 않았더라면, 그는 무신(武神)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너는 패도를 걸을 순 없을지도 모르나, 무신(武神)의 길은 걸을 만할 것이다.
* * *
마른 대지.
쩍쩍 갈라지진 않았지만,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피어오를 그런 땅.
그 땅 위에서 설천위는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코를 간지럽히는 흙냄새에 천천히 눈을 뜬다.
“……드디어 성공했나 보네.”
“뭐, 훌륭한 성과다. 보통 이토록 선명하게 구현된 심상 세계에 들어오는 건 아무리 본인이라도 수년은 걸리니.”
그걸 고작 2주 만에 해낸 걸 보면, 확실히 이쪽으로는 재능이 넘친다.
“……천마 할배가 여기 왜 있어요?”
“잊었느냐? 너랑 나랑은 이어져 있다는 걸. 놀러 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느니라.”
“설득력이…… 있어!”
“헛소리 그만하고, 준비하거라.”
응? 뭘?
“저쪽은 이미 준비 만전의 상태니.”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혼 하나를 발견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손끝에서 반짝이는 철사(鐵絲).
철귀.
“몇 번이고 도전하거라. 그리고 꺾어 내라.”
천마의 목소리와 함께 철귀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서 죽으면요?”
“안 죽는다. 네 심상 세계이니 네가 정말로 죽음을 바라지 않는 한,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 참 슬픈, 아니 좋은 소식이네.
한숨과 함께 설천위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검은 뽑지 않는다.
그의 시작은 주먹이었으니, 이곳에서의 시작도 주먹으로 할 생각이다.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대지를 박찬다.
이젠 이류 끝자락이라 불러 줘도 부족함이 없는 육체가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라는 사기적인 보법을 펼쳐 단숨에 거리를 좁혀 낸다.
그렇게 단숨에 철귀의 코앞에 도달한 순간, 섬벽이라 불리는 주먹이 단숨에 공간을 가로지른다.
철귀의 안면을 부수기 위해.
하지만.
“늦구나.”
철귀의 비웃음과 함께 설천위는 오른쪽 팔이 이미 잘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리 길진 않았다.
서걱.
목이 잘리는 느낌.
순간, 의식이 사라지고…….
“으헉!”
다시 깨어난다.
여전히 심상 세계의 안.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혼들을 보고 설천위는 입가를 비틀었다.
‘……삿됐네.’
저것들을 언제 다 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