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70화-철귀 (6)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는다.
철귀의 앞에 선 설천위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봤다.
“그냥 해제하면 후회 안 하고 성불할 수 있을 텐데, 어때?”
“흥, 후회하지 않는 인생 따위 인생이 아니다.”
“뭐래.”
뭘 멋있는 척 지껄이는 거야.
턱을 치켜드는 철귀를 보며 설천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혈해 줘.”
“네.”
철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품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철귀에게 다가갔다.
그 행동에 설천위는 물론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철백까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치이이이익.
“끄으으윽!”
철판 위에서 살이 익어 가는 소리와 함께 철귀가 신음을 참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설천위와 철백도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미친, 점혈도 있는데 왜 상처를 지지는 거야?’
당연히 점혈로 상처를 지혈할 거라고 생각했던 설천위와 철백 모두 아연한 표정으로 유예린을 바라봤지만, 유예린은 그저 담담하게 철귀의 상처를 지혈했다.
내공으로 달군 비수가 상처를 하나하나 지지며 출혈을 막는다.
뜨거운 열에 피부와 근육이 오므라들고, 혈관이 서로 달라붙어 출혈을 막는다.
그 끔찍하면서도 효과적인 지혈법에 설천위는 다시금 떠올렸다.
‘얘, 유예린 맞구나.’
게임 속에서 봤던, 한없이 냉정하고 때에 따라 잔혹하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던 그 유예린이 맞는 것 같다.
평상시 같이 지낼 땐 도저히 그런 모습이 떠오르지 않다 보니 까먹고 있었네.
하물며, 고작 한 시간 전쯤에 있었던 나들이에서도 그리 화사하게 웃고 있지 않았던가?
사람이라는 건 참 알 듯 말 듯 한 생물이네.
여러모로 불가사의해.
설천위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지혈을 끝낸 유예린이 빙긋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공자, 끝났어요.”
“……응.”
……나중에 결혼하면 내가 반항이라도 할 수 있을까?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미래를 걱정하며 설천위는 앞으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며 설천위는 스킬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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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원패공(魂元覇功)(最上)(三成)
-숙련도 61/100
모든 혼백(魂魄)을 지배하고 그들의 으뜸이 되는 공부.
운기를 할 때 내공의 최대치가 소폭씩 영구적으로 증가한다.
운기를 할 때 내공의 회복 속도가 소폭 증가한다.
내공의 효율이 소폭 증가한다.
지배한 혼백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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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의 상승은 아직도 소폭인가.
효율이 소폭 증가한다는 문구가 새로 생기긴 했는데, 그리 효과가 크진 않겠지.
역시, 내공심법으로서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건 아닌가 보네.
그걸 바라고 익히고 있는 건 아니니 상관없나.
그나저나 숙련도가 전 단계에 있던 그대로 올라왔네.
이건 게임 그대로인가?
내공을 움직인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효율이 소폭 증가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쉽게 움직이네.
그래 봤자 적응만 되면 체감도 못 할 정도로 미묘한 차이지만.
하긴, 1초가 아까운 전장에서 이게 어디냐.
나름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철귀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있던 고통으로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눈동자.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모습엔 살기가 가득했다.
‘……그나저나 가능한 거 맞나.’
진짜 될까?
그런 의문이 담긴 설천위의 눈빛에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 충분히. 혈패황, 그 괴물은 수백을 한 번에 죽여도 수백의 혼을 전부 강탈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고작해야 하나 정도 얼마든지 묶을 수 있다.
아니, 묶을 수 있어야지.
담담하기 그지없는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한숨을 삼켰다.
‘수백을 동시에 죽이는 시점에서 이미 괴물이잖아.’
그랑은 종이 다르잖아. 종이.
에이 씨, 그래 뭐 어쩌냐.
어차피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확실하죠?”
[반 시진, 아니 반의반 시진 안에 해결해 주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암암, 충분하고말고.]
……내가 영감님들이라 믿는 겁니다.
작게 호흡을 들이쉰 설천위는 축 늘어져 있는 철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
“……흥.”
설득이라도 하려는 건가?
헛수고를.
어떻게 코웃음 한 번으로 이런 의도를 그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것도 능력이네.
코웃음 한 방에 철귀의 속내를 읽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다.”
침은 안 뱉는구나.
교양 있네.
철귀가 침을 뱉으면 잽싸게 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곤 두 눈에 힘을 줬다.
노려보려고?
아니다.
[패령안(覇靈眼)]
혼을 볼 수 있는 것만이 이 눈의 힘이 아니다.
시선에 패기를 담는 것.
이젠 中上에 오른, 상급 바로 아래의 패기를 이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소리다.
까득.
철귀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린다.
버티는 것이다.
철사(鐵絲)를 다루는 독특한 무공으로 초절정에 이른 집념과 독기.
그것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의 기둥이 된다.
그렇기에 꺾을 필요가 있다.
설천위의 손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망설임?
없을 리가.
살아남기 위해 전장에서 적을 베는 것과 이미 싸울 능력을 잃은 자를 베는 건 그 궤가 다르다.
심리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짐이 다르다.
첫째는 생존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이익을 위한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유예린이 한다.’
익숙하겠지.
그런 교육을 받았을 테니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왜 사파가 아니냐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던 섬서유가의 유망주니까.
맡기면 훨씬 더 잘해 줄 거다.
‘……맡길 수 있겠냐고.’
원래의 설천위가 좋아했던 감정이 자신을 장악한 거라고 해도 좋다.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는 증거라고 해도 좋다.
설천위의 몸이 천희를 지우고 있는 증거라고 해도 좋다.
다 좋다.
그러니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살육을 반복하는 유예린을 보는 건 싫다.
게임 속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서 웃던 유예린이 그러는 게 싫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내가 할 거다.
나는.
‘설천위니까.’
검이 살을 가르고 뼈를 긁어낸다.
오래 살려 고통을 길게 주기 위한 고문이 아니다.
죽음으로 나아가는, 그저 고통스러운 죽음만을 위한 고문.
“너는 죽을 것이다.”
나지막이 속삭인다.
“허나 뼈와 살을 가르는 이 고통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거다.”
설천위의 검이 철귀의 몸을 헤집자, 철귀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 가기 시작했다.
“나는 혼을 다루는 무인(武人).”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면서 철귀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두 눈동자뿐이었다.
“너는 죽음 후에도 나에게 사로잡혀 나를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다.”
순간, 의식이 한 번 끊겼던 철귀가 고통에 두 눈을 부릅뜬다.
죽음이 다가왔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저 오만한 이들이 자신의 동료를 버린 채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
하!
비웃어 주마. 죽음의 순간, 두 눈을 번뜩인 철귀가 설천위를 향해 입을 열려는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였다.
여태껏 이 자리에 없었던 이들.
흉신악살(凶神惡煞)과도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이들.
순간, 설천위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영원히 고통 받는다.
그 말이 철귀의 마음을 흔들어 한 줌의 공포를 남긴다.
그렇게 꺼져 가는 의식 속, 그의 눈에 입꼬리를 올린 이가 보였다.
[환영한다. 나는 천마라고 한다.]
네게 혼이 찢어지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려 줄 사람이지.
* * *
“……괜찮은 건가요?”
철귀가 숨을 거두고 약 한 식경.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설천위를 지켜보던 유예린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응, 멀쩡해.”
“……그러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대충 이야기의 흐름상 혼이 된 상태를 이용하겠다는 것 같긴 한데…….
아니, 믿자.
의심해서 뭐 하나.
이미 일은 되돌릴 수가 없는데.
고개를 돌린 유예린의 시선에 아직도 철백에게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서하영이 들어왔다.
아무리 서하영이 단련을 거듭했다고 해도 철백에게 저렇게 붙잡힌 이상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스스로도 모를 리가 없고.
그런데도 끊임없이 반항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역시 이성이 마비됐다는 소리겠지.
이성이 마비됐으니 이쪽을 공격한 거겠지만.
이상한 점은 철백의 표정이 미묘하게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다는 거다.
마치 뭔가 위험한 걸 본 것처럼…….
“됐다!”
“예?”
“아, 준비 끝났다고. 이야, 진짜 삼십 분 안에 끝내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예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철백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도 붙잡혀 으르렁거리고 있는 서하영.
자신을 바라보는 철백을 보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얘기는 다 들었지?”
“물론. 한동안 확실하게 붙어서 돌볼 테니 걱정 마라.”
“오케이.”
그럼 시작하자.
[빙의(憑依)]
설천위의 의지에 따라 그 몸에 들어온 철귀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이대로 몸을 뺏으면……?
그런 생각이 절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호오? 생각이 길구나?]
[아직 덜 맞았나 보지?]
“아, 아닙니다요!”
[아, 아닙니다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철귀는 재빨리 으르렁거리는 서하영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십 분, 이십 분.
시간이 지나 삼십 분 정도를 가만히 서하영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던 철귀는 이내 거칠어진 숨과 함께 손을 뗐다.
“됐습니다.”
[됐습니다.]
철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바로 철귀를 내보내고 몸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자세히 말해 봐.”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해제하긴 했지만, 제대로 회복하기 전까지 한동안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작용의 종류는?”
[분노,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의 제어 불가입니다.]
“알았어. 들었지?”
“음, 확실하게 들었다.”
서하영을 끌어안은 채 그 몸을 감싼 천을 한층 더 꼼꼼하게 정리한 철백은 그녀를 들어 안았다.
“바로 약제당으로 가겠다.”
“어, 나는 뒤처리 좀 하고 갈게.”
“부탁하지.”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철백을 보며 설천위는 암영의적에게 신호했다.
[쯧, 사람 부리는 것이 독하구나.]
“뭐래요. 이미 죽은 인간이.”
사자(死者)랑 산 사람이랑 같나?
그렇게 암영의적을 철백에게 붙여 준 설천위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유예린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가지고 싶네요.”
“뭐, 뭐가?”
어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났던 설천위는 이어지는 유예린의 말에 가슴을 쓸었다.
“영안, 저도 가지고 싶어요. 혼령분들의 말을 못 들으니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에요.”
“아, 그거?”
난 또.
[어린놈이 아주 발랑 까졌구나!]
뭐래, 늙은이야.
부끄러움을 들쑤시려는 천마를 무시한 설천위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철귀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가자.”
“네, 바로 학장실로 가서 보고를…….”
“아니, 약제당 가자고.”
철귀의 시체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남은 손으로 유예린의 손을 잡아끈 설천위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 어딜 가려고? 안 돼.”
“이건 생채기 수준…….”
“어떤 생채기가 피로 옷을 그렇게 적시냐? 헛소리 말고 따라와.”
쉬는 동안 열심히 회복을 사용해 평범하게 걸을 수 있는 수준이 된 설천위는 유예린을 이끌었다.
“가서 치료부터 받아. 보고는 내가 하러 갈 테니까.”
나는 이제 진짜 생채기 수준이거든.
* * *
“……철귀가 죽어?”
“예.”
“그렇다면 지금쯤 무림학관 놈들이 지하를 털고 있겠군.”
“죄송합니다.”
“됐다. 너희의 잘못이 아니니.”
광적인 집착.
철귀는 그것 하나로 위로 기어 올라왔지만, 그런 집착은 결국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이유로 계획이 일그러진 거겠지.
하지만, 그것조차 예상 범위 안이다.
“흔적은?”
“한 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됐다. 얻은 자료를 정리해 보내 두도록.”
“예!”
물러나는 부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았다.
대계(大計)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