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68화-철귀 (4)
등잔불만이 희미하게 비추는 복도.
미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어둠 속을 유예린은 담담하게 걸어갔다.
조급함에 빨라지려는 다리를 억누른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잊지 마라.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유 매.”
“……예?”
작게 이를 악물던 유예린은 조금 뒤늦은 대답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얼마 만이지? 설 공자의 부름에 늦게 대답한 게.
“달리고 싶으면 달려도 돼.”
“……하지만.”
달리지 않은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알지 못하는 함정과 매복.
아직 도망치지 못한 적이 혹시라도 소리를 듣고 도망칠지도 모르는 가능성.
이 앞에 길이 갈리기라도 하면 달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그러니 달리지 않던 건데…….
가슴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유예린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대충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설천위라고 생각이 없어서 달려도 된다고 한 게 아니다.
“도망칠 놈이라면 이미 도망쳤겠지? 입구에서 매복하고 있던 놈들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그럼 함정이나 매복 같은 거? 에이, 그런 거 걱정하면 천마 할배가 슬퍼하지.”
[흠흠.]
천마가 맞다는 듯 헛기침을 했지만, 유예린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설천위의 표정에서 그 대답을 읽은 유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지.
“그리고 내가 뒤처지는 거?”
이런 사람이기에.
“걱정 마. 죽어라 뛰어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뛰어.”
내 사랑.
한층 더 깊어진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본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앞서갈게요.”
“오냐.”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를 뒤로한 채 유예린의 몸이 단숨에 복도를 관통한다.
KTX 뺨을 갈겨 버릴 것 같은 엄청난 속도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조졌네.’
괜히 허세를 부렸다.
왜 이 몸뚱이는 유예린 앞에만 서면 뭔가 하려고 하지.
작게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패융을 불러냈다.
그냥 달리면 못 따라갈 테니 어쩔 수 없지.
[크르르르르.]
“뛰자.”
* * *
“쓸모없는 것들!”
입구 쪽에 설치해 놨던 실에 반응이 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단숨에 돌파되었다는 소리겠지.
천으로 감싼 서하영을 어깨에 걸친 철귀는 미친 듯이 달렸다.
조직에서 만든 이 지하는 참 넓고 깊다.
도주로로 쓰기엔 딱이다.
몇 번 더 갈림길에서 교차하면 저놈들이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다음에는 지상으로 나가 천천히 도망치면 문제없다.
뿌려 놓은 실들을 회수하고, 잠적하면 문제없이…….
“……도 …… 못…….”
“응?”
설마?
어깨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철귀는 볼 수 있었다.
축 늘어진 상태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서하영을.
그 안에 담긴 깊고 확고한 분노와 살기를.
“크흐흐흐, 좋은 눈이다! 역시 그릇이 되기에 충분한 몸뚱이로다.”
허나 그 눈동자에 철귀는 오히려 기뻐했다.
어설프게나마 자신의 점혈을 푼 건 위험한 일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점혈을 풀 정도의 육체적 능력이 있다는 소리다.
아무리 시간이 조금 지나 내공이 돌고 있다고 해도 그 재능이 뛰어남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기뻤다.
“너는 최고의 존재가 될 것이다.”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한 서하영은 오히려 더욱더 눈을 부릅떴다.
지지 않는다.
설령 이 끝에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죽으면 죽었지 이 녀석의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그게 아버지의 반대조차 무릅쓰고 밖으로 나온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니까.
“좋은 눈동자다. 걱정 마라. 네가 생각하는 치욕적인 일은 없을 테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일에 집착하겠느냐?”
그런 서하영의 눈빛을 읽은 철귀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웃었다.
“단지 네 몸뚱이는 내가 만드는 최고의 작품이 될 뿐이다. 기뻐하거라. 역사에 남을 그런 명작이…….”
환희가 담긴 철귀의 목소리가 끊긴다.
당연히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다.
“이년이…….”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에 철귀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조차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암경(暗勁).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다.
“은검(隱劍)……!”
처음 목표로 잡았지만, 조사 끝에 포기한 괴물.
남궁세가의 그 괴물 년보단 부족하긴 하지만, 이쪽도 충분히 말이 안 되는 괴물이다.
거기에 정확하게 다리를 노린 이 일격.
기척이 희미하여 잘 느껴지진 않지만,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이리도 정확한 공격이라니.
이를 악문 철괴는 결국 자리에 멈춰 섰다.
이 다리로는 어차피 도망치지 못한다.
그러니 싸울 수밖에.
고작해야 어린 계집.
“크흐흐흐흐.”
상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조금 이르지만…….”
저년을 붙잡을 수 있다면, 굳이 이년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되지.
입꼬리를 올린 철괴의 손이 서하영의 머리에 닿았다.
* * *
“아오!”
좀 꺼져라, 새끼들아!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두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몸을 비틀었다.
‘상성 더럽네!’
강철로 된 갑주를 입은 병사들.
대체 어떻게 조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은 아니다.
한 번 관절기로 팔을 꺾었는데도 멀쩡히 움직이며 공격하고 있으니까.
즉, 어디서 누가 조종하고 있다는 소리다.
[어쩌겠느냐?]
현태중의 질문에 설천위는 가만히 병사들을 바라봤다.
자신의 검 실력으로 강철을 벨 수 있나?
아니다.
못 벤다.
검은 이제 겨우 발을 뗀 아기 수준이니까.
자신의 주먹으로 내부를 완전히 진탕으로 만들 수 있나?
아니다.
못 한다.
자신의 주먹은 쾌속하긴 하지만 위력이 부족하니까.
방법이 썩 없다.
[도(刀)를 뽑거라.]
그러니, 말을 따르자.
가만히 바라보던 소백진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결국 도를 뽑았다.
죽지 않고 도망칠 자신은 있었다.
그러니 유예린을 먼저 보낸 거지.
유예린도 그리 생각해서 먼저 간 것일 거다.
그런데 그렇다고 도망친다?
그럴 수 없지.
자존심으로 먹고살 생각은 없지만, 약혼녀한테 한 약속도 못 지키는 남자가 되고 싶진 않거든.
이곳을 맡기라고, 금방 따라간다고 약속했지 않은가?
힘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쪽팔리게 살 순 없다.
무엇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도를 꺼내 든 설천위는 도를 쥔 채 중단세를 취했다.
[우리의 도술(刀術)에 찌르기는 없다.]
소백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설천위는 여태까지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처형인, 우리의 칼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검으로 베었다.
단숨에 베어 내기가 힘들어 몇 번이고 목을 내리쳤다.
검의 날이 무뎌지는 것은 물론, 목만 남은 얼굴은 언제나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기에 베는 데 적합한 무기를 찾았다.
무게를 늘리고 한쪽에만 날을 날카롭게 세운 도(刀)를 쓰기 시작했다.
무게를 담아 내리쳐도 몇 번이나 내리쳐 목을 베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리치는 횟수만 줄었을 뿐이다.
목이 뭉개지고 즉사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처참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무기가 아닌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단단한 인간의 목뼈를, 칼을 붙잡고 달라붙는 피부와 근육을 단숨에 자르는 기술.
그것을 연마했다.
연마하고, 또 연마하다 보니 무게는 오히려 방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무게를 줄이고 날이 날카롭게 선 얇은 도(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인지조차 못 하는 속도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베어 낸다.
그 방법을 쓰기 시작하자, 드디어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경우가 사라졌다.
공포나 후회 등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 기술을 나라에서 인정했고, 수많은 목을 자르는 하나의 직책을 얻어 번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왕조가 바뀌고 수많은 목을 자른 처형인은 죄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도망쳤지만, 그럼에도 처형인들은 자신들의 기예를 계속 연마했다.
자신의 후손에게 선대가 이어 온 긍지를 전했다.
[우리의 시작은 자비다.]
목을 베면서 무슨 자비?
그런 의문이 절로 들었지만, 설천위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젠 알고 있으니까.
사람을 죽이는 수많은 방법 중에 목을 단숨에 자르는 것이 가장 자비로운 방법이라는 것을.
[집중하여라. 네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 베어 내는 것이다.]
어느새 호흡이 낮게 가라앉는다.
근육을 느슨하게 풀고, 검을 쥔 손에 긴장을 덜어 낸다.
딱딱한 검은 힘을 줄 순 있어도 부드러움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칼은 힘으로 썰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찰로 썰어 내는 것이다.
설천위의 집중이 극에 달한 순간.
철컥.
철병(鐵兵)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와 동시에, 도(刀)가 움직인다.
엄청난 속도는 아니다.
보통 사람이 전력으로 휘두르면 나오는 정도의 속도.
조금 빠르다고 할 순 있지만, 무인의 입장에선 느려 터진 속도나 다름없다.
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칼끝도, 손목도, 자세도.
그 무엇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완성되는, 완벽한 일격.
오로지 베어 내는 것 하나에 집중한 일격은 설천위가 할 수 없던 걸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서걱.
다가오던 철병의 목이 시원하게 잘린다.
뒤이어 한 번 더 도를 휘두르는 설천위의 공격에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다.
단면이 드러난 곳에서 시체 썩은 냄새가 났지만, 설천위는 무시한 채 다시 도를 들었다.
[참으로 대단하단 말이지.]
그 모습에 감탄한 현태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 없이 철을 벤다는 건 웬만한 재능으로도 십 년은 연마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설천위는 무기에 제대로 된 기를 담지 못하니 내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철을 자르고 있다.
거기에다 그 안에 있을 인간의 근육과 뼈까지.
벤다.
오로지 이 한 가지에만 집착한 무학이 얼마나 무서운 날붙이가 되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설천위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재능으로도 저리될 수 있다는 소리니까.
물론.
‘실제 무인 상대로 쓰려면 한참 멀었지만.’
어떤 머저리 같은 무인이 저런 느린 공격에 처맞아 준단 말인가?
저 굼뜨면서도 쓸데없이 단단한 허수아비가 아니라면 써먹지 못할 수단이다.
한참은 더 연습해야겠지.
[감을 잡았으면 빨리 정리하거라. 그 여아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
“옙.”
소백진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쉬우니 금방 정리하고 갈 수 있겠지.
그런데.
‘이상하네.’
내가 못 본 건가?
[이상하구나. 이 녀석들 철실이 연결되어 있지 않구나.]
아니 잠깐, 이런 대사 게임 속에서도……?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진 설천위는 팔다리를 잃고 쓰러진 철병을 바라봤다.
설마, 이거…….
‘게임에서 그 누구도 발견 못 한 히든 피스?’
그렇다면.
까득.
이를 악문 설천위가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위험하다.
무슨 능력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이건 위험하다.
설천위의 도(刀)가 한층 더 빠르게 적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유예린이 위험하다.
* * *
“크흐흐흐흐, 쉽구나, 쉬워!”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리며 철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아니겠는가?
한때나마 걱정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크흐흐, 말이 없구나, 은검(隱劍).”
완전히 여유를 찾은 철귀는 입꼬리를 비틀며 유예린을 바라봤다.
어느새 상처투성이가 된 유예린은 팔에서 흐르는 피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유예린의 앞, 창을 뽑아 든 서하영이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