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67화-철귀 (3)
“그, 잘 안 보이는데?”
“왜요?”
너무 붙어 있으니까.
아주 허리를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붙어 있는데, 머리에 있는 나비 모양 장식이 눈에 들어오겠냐.
차마 본심을 말하지 못한 설천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설천위도 여자에 내성이 없고.
천희도 내성이 없다.
나이가 스물을 넘겼지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 보지 않았던가.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인생이 대부분 그렇다곤 하지만…….
‘여자에 관심이 없던 게 아니라 게임보다 관심이 없던 거였지.’
후배처럼 대하거나,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거나, 선을 긋는 건 잘할 수 있지만 이렇게 달라붙는 건 영…….
스킨십이 자연스럽지 못하니 여러모로 손을 쓰기가 힘들다.
새삼 자신이 여자에게 얼마나 숙맥인지 깨달은 설천위가 통렬한 자기반성과 함께 과감하게 유예린을 붙잡고 떼어 내려는 순간.
[천위!!]
천마의 외침과 함께 설천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눈빛이 변한 유예린이 자세를 고치는 순간.
“서 매!!”
조금 멀리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단숨에 땅을 박찼다.
물론 천하일절의 신법을 익힌 설천위보다도 유예린이 훨씬 빠르게 앞서 나갔다.
애초에 경지도 다르고 유예린이 익힌 신법도 그 격이 부족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단숨에 멀어지는 유예린의 등에 설천위는 이를 악물 새도 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설천위가 겨우 유예린의 등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길 수 초.
설천위의 눈에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는 철백이 들어왔다.
다급한 표정.
하지만 그와 달리 눈동자는 오로지 한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정확하게 한 지점만을 응시하며 달린다.
그 순간, 깨달았다.
저기구나.
저기에 서하영이 있구나.
설천위도 눈치챈 것을 유예린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자처럼 단숨에 그 뒤를 쫓았다.
허나.
[크흐흐흐흐.]
기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유예린의 몸이 멈췄다.
끼릭 끼리릭.
쇠가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사람만 한 크기의 인형이 앞을 가로막는다.
사람을 본뜬 듯 아닌 듯한 기괴한 외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간을 찡그리게 만드는 혐오스러움이 있었다.
[참으로 어여쁜 아해로구나.]
“……꺼져라.”
[크흐, 안 되지. 이번만큼은 나도 물러설 수 없구나.]
웃음소리.
기쁨이 담겨 있는 그 목소리에 철백이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다.
별다른 말도 없다.
상대방이 거부한다면 대화 따위 없이 몸으로 돌파해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렇기에 철백은 단숨에 땅을 박차서 인형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아니, 꽂아 넣으려고 했다.
끼릭 끼리리릭.
[호오?]
얇은 철선(鐵線)이 다른 물건을 파고들며 생기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허나, 그럼에도 철백의 몸은 피부는 베일지언정 근육은 베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 철선들을 강제로 끌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괴물이로구나.]
그 모습에 감탄한 인형이 입을 달싹이며 웃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몸뚱이다만…… 아쉽게도 당장 내가 쓰기에는 부족하구나.]
정말로 아쉽다는 듯, 입을 달싹이는 인형을 보며 철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서 매를…… 내놔라!”
[크흐흐, 아쉽지만 그것도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다.]
대답과 함께 인형의 움직임이 한순간 일그러진다.
설천위가 그리 느낄 정도로 초고속의 움직임.
카가가각.
허공에서 무언가가 갈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유예린이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뽑아 든 검이 은은하게 빛난다.
은검(隱劍).
보이지 않는, 은신의 극의를 담은 검이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이런.]
그리고 그 검에 팔 한쪽을 내준 인형은 아쉽다는 듯 입을 달싹이며 유예린을 바라봤다.
[역시 네년을 노리지 않길 잘한 것 같구나.]
이건 괴물이다.
한철을 섞어 만든 인형의 팔을 단숨에 베어 내다니.
[허나, 이미 늦었다.]
그렇기에 웃음이 났다.
저 괴물조차 자신의 길을 막지 못했으니까!
저 하늘에 닿는 것은 역시 자신이다!
[이 인형은 선물로 주마.]
조롱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인형의 몸이 허물어진다.
그 몸을 조종하고 있던 실이 끊긴 것이다.
“이, 이……!”
그 모습에 철백은 자신의 몸을 속박하지 못하는 철선들을 떼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떨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서 매는 무사할까?
저놈의 목표가 뭐지?
늦지 않게 구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가득 찬 혼란이 사고를 정지시킨다.
그 모습에 유예린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 순간.
“뭐 해?”
설천위의 목소리가 그들을 깨웠다.
[이러다 놓친다. 빨리 일어나라.]
그 순간, 여태까지 듣지 못하던 목소리가 철백을 일으켰다.
또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유예린도 상황을 파악하고 설천위의 곁으로 붙었다.
“추적하고 있나요?”
철귀가 설가의 영역에서 활동했음에도 아직도 붙잡히지 않은 이유.
바로 신출귀몰함 때문이다.
위험 지역에서는 무조건 인형만으로 활동하며,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인형에게서 떨어진 실들조차 바닥 한 번 긁지 않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나마 흔적이 남았을 때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남아서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그런데, 그런 철귀의 흔적을 아직도 안 놓치고 있다고?
[어딜 어린놈이 실로 장난질인지, 쯧쯧.]
[조잡한 수법이구나.]
유예린은 자신감이 넘치는 암영의적과 천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철백은 들었다.
“가자.”
어느새 자리에서 선 철백이 평소의 굳건함을 되찾고 설천위의 옆에 섰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이미 중심을 찾아 안정된 상태다.
그의 눈이 허공에 떠 있는 암영의적에게 향했다.
“부탁드립니다. 길을 알려 주십시오.”
[물론이다. 따라오너라. 천 형, 나머지 둘을 부탁합니다.]
[알겠다.]
천 형?
언제 호칭 정리가 됐데.
아니, 그리고 천마쯤 되면 그냥 대선배 아닌가?
헛웃음을 흘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유예린을 바라봤다.
“가자.”
“네.”
빌어먹을 놈이 어디 우리 패밀리를 건드려.
* * *
“흐음.”
지하.
어둠을 밝히는 것이라곤 몇 개의 등잔불밖에 없는 그곳에서 철귀는 턱을 쓸었다.
힘을 잃은 하얀 수염들이 손에 잡힌다.
부드럽게 그 수염을 쓸며 철귀는 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훌륭한 몸이구나.”
팔다리는 물론이고 배와 허리, 등의 근육들 중 부족하다 싶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철저한 단련을 거친, 그야말로 훌륭한 육체.
서하영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고 찔러 보던 철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천으로 그녀의 몸을 덮었다.
이제 데리고 가서 시술만 하면…….
“노사.”
“……뭐냐?”
예상치 못했던 방해에 철귀는 미간을 찡그렸다.
실험 재료를 확인하는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그리 누누이 말했거늘……!
솟구치는 분노를 억지로 삼킨 철괴는 철문을 열고 나타난 부하를 바라봤다.
분노는 분노, 그렇다고 이성까지 먹어 치울 순 없다.
그리도 많이 경고했는데도 이리 나타난 것은 그만큼 다급한 사안이라는 뜻일 테니까.
“학관의 어린놈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뭐라?”
그럴 리가.
부하의 행동으로 인한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철괴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악귀라 불리는 설가의 정예 놈들조차 자신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그런데 뭐?
무림학관의 어린놈들이 자신의 흔적을 찾아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우연이다.
그럴 리가 없다.
철선은 수많은 곳으로 퍼져 흔적을 남기고 힘을 잃는다.
한곳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 어떻게?
도저히 이해 못 할 상황에 이를 악문 철괴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 처한 현실을 부정하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다.
해야 할 건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
그렇지 않다면 이 목이 땅에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실을 다루는 데에만 모든 것을 건 자신이 은검(隱劍)과 마주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 해야 하는 건…….
“철병(鐵兵)을 꺼낸다.”
“……예!”
조금 굼뜬 부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철괴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저 부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이해가 갔으니까.
자신이 만든 존재이긴 하지만, 철병은 확실히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괴물들이다.
그 은검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시간이라도 끌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충분하다.
고개를 끄덕인 철괴는 서하영을 어깨에 걸친 채 부하가 나간 반대 방향에 있는 문을 열었다.
무림학관의 어린놈들.
너희들 따위가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 * *
“여기 맞아요?”
[음, 확실하다.]
“철백이는요?”
[그쪽도 확실한 길로 갔으니 문제없다.]
아니, 뭔 자신감이야.
천마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설천위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뭐가 됐든, 이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알고 있는 거겠지.
대체 무슨 방법으로 추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의 잔향이다.]
“예?”
[너한테 하는 말 아니니, 옆에 있는 아이한테나 전해 주거라.]
넌 어차피 말해 줘도 못 하니까.
그 뜻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천마의 말에 작게 입술을 삐쭉인 설천위는 결국 입을 열었다.
“기(氣)의 잔향(殘香)이래.”
“예?”
“천마 할배가 너한테 전해 주래. 너는 알 거라고.”
설천위의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미간을 찡그리던 유예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 소저의 기(氣)를 추적하는 거군요?”
[정답이다.]
“정답이래.”
아니, 이걸 바로 맞추네.
[사람은 모두가 기를 품고 있고, 그 기의 성질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천마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읊으며 설천위는 유예린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예린.
대체 뭐가 알 것 같은 걸까.
[그 기를 숨기는 것이 은신의 기본이다.]
“허나, 저는 아직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착각이다.]
“허면?”
[은신을 위해 무위를 이뤄야 한다는 것은 도(道)를 닦는 놈들의 이론에 불과하다.]
거, 도사들이 들으면 섭섭해할 말을.
[사람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어찌 인위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네가 닮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천마는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천마의 말에 유예린은 그저 입을 다문 채 앞으로 달렸다.
그렇게 몇 분을 달렸을까.
[여기다.]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걸음을 멈췄다.
설천위가 멈추자 함께 걸음을 멈춘 유예린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일까.
어디에…….
기감을 펼쳐 주위를 파악해 나가던 유예린은 단숨에 검을 뽑았다.
“……아래구나.”
“컥!”
그리고 어느새 땅을 꿰뚫은 검 끝에서 누군가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흙에서 빠져나오는 유예린의 검 끝이 미묘하게 붉은색으로 더럽혀진 순간.
“쳐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땅이 들썩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 솟구쳤다.
그 숫자가 대략 스물.
이리도 많은 이들이 철괴를 따른다고?
그런 의문이 유예린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유예린은 담담하게 검을 쥐었다.
뭐가 됐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유가(妞家)는 검을 쥔 채 살기를 드러내는 이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살업(殺業)을 쌓아 무림의 평화를 지킨 가문.
그 가문이 품은 검이 무엇인지 이들은 모른다.
어느새 검을 뽑은 유예린이 주위를 둘러싼 이들을 바라봤다.
그런 유예린의 모습에 잔뜩 긴장한 이들이 무기를 꼬나쥔 손에 힘을 더하는 순간.
[훌륭하구나.]
천마의 감탄과 함께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우어어어!”
목을 지나는 경동맥에서 솟구치는 피에 적들은 하나같이 목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흥건한 피가 바닥을 질척이게 만들었지만, 유예린은 담담하게 걸었다.
적들의 등장과 함께 드러난 문을 열어 그 안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뒤를 설천위가 담담하게 따라갔다.
철귀, 넌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