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60화-입관 시험 (1)
‘……이상하네.’
대체 왜 그랬지?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예린을 향한 몸의 이상 반응은 몇 번이나 있었고, 이제 슬슬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몸이 굳었다는 정도의 반응이 아니었다.
사춘기 소년이 좋아하는 여자애를 만나 긴장해서 생긴,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
씁쓸함, 슬픔, 기쁨 등등.
온갖 종류의 감정이었다.
감정.
마음이 움직였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껍다.
유예린을 볼 수 있다는 감정에 행복감이 담겨 있다.
“알 수 없군.”
[알 수 없는 건 네 녀석이다. 무슨 고민을 그리 길게 하느냐.]
설천위의 혼잣말에 반응한 천마가 쯧쯧 혀를 차며, 그의 앞에 섰다.
[무림학관으로 돌아온 것은 무(武)의 길을 계속해서 걷겠다는 의미렷다?]
“뭐, 그렇죠.”
백화단에선 계속 조용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런데?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천마의 모습에 설천위는 서서히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놈이 이리 궁상을 떨고 있느냐?]
“수련하라고요?”
[당연한 소리를. 스스로 재능이 있는 길을 버리고 이리 온 것 아니더냐?]
씁.
그것도 맞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생각해 보면, 요즘 제대로 된 수련을 못 했다.
초식 수련은 틈이 날 때마다 계속했지만, 기초 체력 훈련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일하고 있는데 몸이 지쳐 쓰러질 정도로 기초 체력 훈련을 할 순 없으니까.
천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했다.
돌아온 기념으로 모두와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소화시킬 겸 천천히 시작하면 되겠지.
* * *
[나약하구나!]
달린다.
이제는 꽤나 달리는 폼이 익숙해진 설천위가 훈련장을 달린다.
돌아오고 일주일.
겨울 방학이 시작된 학관은 상당히 조용했다.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그 차가운 공기는 스산한 분위기를…….
“으아아아아!!”
“천위이이이이이이!!”
[달려라, 달려!! 네놈들의 발은 말보다 더 빨라져야 한다!!]
말보다 발이 빠르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인가?!
우사인 볼트도 시속 44km가 최고였어!
말은 시속 88km고!
내공을 안 쓰는 맨몸으로 그게 가능하면 전부 육상 선수를 하지!
이를 악문 설천위는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시간도 시간이니 간단하게 하고 말려고 했는데, 결국 먹었던 걸 전부 토해 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패융 없으면 여전히 쓰레기 몸이네…….’
하긴 이제야 겨우 下上이다.
이류 무인에 간신히 발을 걸칠 정도의 신체 능력.
내공이 없으면, 패기가 없으면, 영력이 없으면 삼류 도적과 다를 바 없는 육체.
심기체(心氣體)라.
자고로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울려야 무(武)는 본래의 힘을 낸다고 했다.
……천마가.
[턱없이 나약한 육체를 끌어올려라!]
천마의 채찍질과 함께 설천위가 달린다.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 철백.
하지만.
“우오오오오오!!”
철백은 멈추지 않았다.
철을 붙인 혁대를 몸 곳곳에 묶어 무게를 늘리기까지 한 상태인데도 멈추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철백의 오늘 목표치는 설천위를 백 번 추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기 살기로 달리는 설천위를 백 번.
설천위가 밖을 도는 사이에도 철저한 단련을 거듭했다고 자신한 철백이다.
하지만 천마와의 수련을 다시 시작하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한 건 제대로 된 수련이 아니었음을.
육체가 성장했는데, 그것에 맞춰 철저하게 강도를 올렸어야 했다.
자신의 육체는 그것을 감당할 잠재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반성이다아아아아!”
죽을 것같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포효와 같은 외침을 토해 내며 달린다.
폐가 찢어질 듯 아프고, 심장이 미친 듯 뛰며 다리의 근육은 살려 달라는 듯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왜?
부족하니까!
나는 더 높이! 더 빨리 강해질 수 있으니까!
희망과 갈망을 원동력 삼아 미친 듯이 달리는 철백의 뒷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뒈지겠다.’
체력도 좋네, 새끼.
* * *
“……살벌한 수련이네요.”
훈련장 구석,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던 소윤혜의 목소리에 천으로 땀을 닦던 서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마 저희도 같이하면 침 질질 흘리고 난리가 날 걸요?”
그 정도라고?
에이, 그 정도는…….
‘……맞네.’
철백은 물론이고, 설천위도 숨을 감당하지 못해 침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 같이 수련 안 하는 이유가……?”
“흠흠, 무인으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도무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서하영의 모습에 소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누가 그러고 싶겠어요. 그러고 보니 유 소저가 안 오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가 보죠?”
“아, 아닐 거예요. 그분은 혼자 수련하는 게 더 낫다고 들었거든요.”
천마 할아버지한테.
뒷말은 삼킨 서하영은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웃고는 다시 창을 들었다.
“그럼 전 다시 갈게요.”
“네. 힘내세요.”
“옙!”
밝은 웃음과 함께 뛰어가는 서하영.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윤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됐든, 자신이 할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조금 걸을까.
훈련장을 나와 무림학관을 벗어난 소윤혜는 신야(新野) 시내로 향했다.
옛날에는 작은 현이었다는 신야는 무림학관이 생긴 뒤에 상권이 발달해 거대해졌다고 했던가.
시내를 걸으며 소윤혜는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며 조부가 무림 곳곳을 데리고 다녔지만 정작 몸이 약해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은 없다.
“……할부지.”
듣자 하니,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설 소협에게 협력하기로 했다던가.
한번 맺은 계약은 쉽사리 풀 수 없어 앞으로도 그의 힘이 되어 줄 거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묘했다.
할아버지를 언제나 그리워했지만, 자신 때문에 성불도 못 하고 이승을 떠돌았다고 생각하면 그저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또 할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다 내가 나약해서 그래.’
반푼이.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는…….
쿵!
“어억!”
“꺅!”
어깨가 부딪혔다고 생각한 순간, 넘어진 소윤혜는 그제야 자신이 앞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애X끼가!”
부딪힌 상대가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친다.
목소리를 높이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커다란 목청으로 소윤혜를 다그쳤다.
“네년은 부모가 길을 걸을 때 옆으로 걸으라고 알려 주지도 않은 거냐?”
전형적인 왈패.
무림학관의 영향 아래, 제대로 된 흑도 조직은 이 신야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모든 빈틈을 다 메울 수 있었을까?
신야는 상당히 거대한 곳인데?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어둠.
그 어둠을 무림학관은 왈패 수준으로 억눌렀다.
왈패들이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굳이 움직이지 않는다.
돌을 박아 다진 길에도 곳곳에 잡초가 자란다.
하지만 그 잡초를 전부 제거하기에는 수고가 너무 많이 들기에 돌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큰 잡초가 아니라면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왈패가 이리 시내를 당당히 돌아다니는 것이다.
‘……도(刀)를 두고 왔네.’
자신이 시비가 걸린 이유를 깨달은 소윤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왈패를 바라봤다.
설천위가 아직 수련용 도(刀)를 구하지 못해 자신의 것을 빌려주고 나온 게 화근이었다.
“뭐냐? 벙어리냐? 아니면 네 부모가 그리…….”
부모까지 들먹이며 모욕하는 왈패의 모습에 소윤혜의 눈이 날카로워지는 순간.
“그만하게.”
나지막한 음성이 왈패의 말을 가로막았다.
검을 허리에 찬, 하늘색 무복을 입은 소년.
등에 짊어진 상당한 크기의 짐이 인상적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소윤혜와 왈패 사이에 선 소년은 웃으며 왈패를 바라봤다.
“고작해야 부딪힌 것뿐인데, 어찌 그리 모욕적인 언사를 한단 말인가?”
“하! 부딪히면서 저년이 칼이라도 휘둘렀으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이걸 그냥 넘어가라고?”
억지다.
하지만, 힘이 없다면 그 억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 무림이다.
거기에다.
“무인 양반, 설마 우리의 일에 끼어들 건가? 왜 나를 두드려 패기라도 하게?”
무림학관의 영향 아래서 왈패들이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림학관이라는, 온갖 무인이 모인 특징 때문에 신야의 지부대인은 무인들을 싫어한다.
때문에 처맞은 왈패가 관에 달려가서 하소연하면 대개 왈패의 편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왈패가 이리 당당한 것이다.
어차피 돈을 뜯어낼 명목으로 건 시비다.
몇 대 처맞고 관에 달려가 돈이나 뜯으면…….
“아니, 나는 끼어들지 않을 걸세.”
“응?”
담담하게 웃은 소년은 소윤혜를 바라봤다.
“소저, 손을 좀 보여 줄 수 있소?”
“예? 아, 예…….”
보여 주는 것뿐이라면 뭐.
고개를 끄덕인 소윤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유심히 관찰한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刀)면 되겠소?”
짐을 내려놓고 그 안을 뒤지기 시작한 소년은 이내 도 하나를 꺼내 소윤혜에게 내밀었다.
“제3자가 관여하는 것과 달리, 무인이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손을 쓰는 건 큰 책임을 묻지 않소.”
소년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것은 왈패였다.
아니, 잠깐 그럼…….
왈패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
소윤혜는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죽여도 되는 건가요?”
“응?”
“응?”
두 명의 의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순간, 소윤혜는 담담히 도를 잡았다.
“저는 익힌 무공이 목을 베는 것밖에 없어 손속을 조절하는 일에 능숙하지 못합니다.”
스르릉, 철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도가 뽑힌다.
어느새 몸을 돌린 소윤혜는 담담한 눈동자로 왈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왈패는 깨달았다.
‘조졌다.’
저건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는, 진짜배기의 눈동자다.
왈패의 첫 번째 원칙이 뭔가.
진짜 무림인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아닌가.
돈 몇 푼 받겠다고 목숨을 내놓을 순 없다.
고작해야 먼저 시비를 건 왈패가 죽은 일이다.
저 인간은 벌금 몇 푼 내고 풀려나겠지.
순간, 허리가 접히도록 고개를 숙인 왈패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죄송함다!!”
그리고 도주.
미친 듯이 달아나는 왈패의 뒷모습에 소윤혜는 담담히 도를 거뒀다.
그리고.
“하하하하하!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 모습을 보며 호탕하게 웃던 소년은 이내 잦아드는 웃음과 함께 소윤혜를 바라봤다.
“도움에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뭐 도운 게 있다고. 고개를 드시오. 소저.”
손을 저은 소년은 소윤혜가 내민 도를 받아 다시 짐 안에 챙겨 넣곤 빙긋 웃었다.
“소저는 무림학관의 학생이오?”
“아뇨. 다음 학기에 입관하러 온 사람이에요.”
“그럼 동지로군! 잘 부탁하오. 소저!”
“아, 아 예.”
자신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손이라도 붙잡을 기세네.
호쾌하게 웃는 소년을 바라보던 소윤혜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닌가.
“그럼 학관에서 보겠소!”
웃으며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윤혜는 이내 작게 웃곤 발걸음을 돌렸다.
이 재미있는 만남을 친구들에게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 *
“전원 모였습니다.”
“흔적은?”
“전원 확실하게 처리했습니다.”
“좋다. 각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정보 수집에 힘쓰도록.”
“예!”
대답과 함께 방을 나가는 부하의 모습에 남자는 찻잔을 쓰다듬었다.
“위선자 놈들……. 지옥을 보여 주마.”
찻잔에 비치는 남자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