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57화-백화단 (2)
격이 다르다.
그런 생각이 단숨에 뇌리를 장악할 정도로 압도적인 영력이 혼을 짓누른다.
허나.
“무슨 일이시죠?”
들끓는 패기가.
굳건한 정신이.
단단한 영력이.
자아를 지탱한다.
혼이 짓눌리는 것을 막아 낸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담담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봤다.
날개옷이라고도 부르는 나풀거리는 옷이 바람을 타고 흔들린다.
‘아니, 바람은 없으니…….’
저걸 흔들고 있는 건 영력인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물체에 간섭하는 압도적인 영력.
이런 영력을 가진 사람들 중 이곳에 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람은 하나.
“백화단 단주께서 이런 시간에 산을 타는 취미가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잠이 줄어드는 법이거든요.”
고작해야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로 그리 말하면 썩 설득력은 없지만…….
이십 대에 단주에 오르는 괴물은 남궁선 정도뿐이다.
백화단주의 나이는 그 이상으로 보는 게 맞겠지.
“어머, 지금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닌가 싶네요.”
“사람의 호기심이라는 게 참기 힘든지라.”
“후후, 그렇죠. 참기 힘들죠.”
설천위의 대답에 접선(摺扇)으로 입을 가리며 웃은 백화단주의 눈이 녹빛으로 빛난다.
“그러니 알려 주시겠어요?”
그녀의 시선 끝, 천마가 담담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고인(古人)은 어떤 분이신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아직은 설천위가 볼 수 없는 세상.
본질을 보는 눈을 가진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두 눈으로 담기엔 너무도 아득한 검은빛이.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감이 알려 주었다.
멀고 흐려서 보기 힘든 것이 아니라, 너무도 거대하고 짙어서 보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 * *
[허허, 그리 부담스럽게 쳐다볼 필요는 없네만.]
백화단주의 눈이 경계심으로 번뜩이는 긴장된 순간.
천마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흐트러트렸다.
담담하게 설천위의 옆에 서서 백화단주를 바라본다.
[그저 후학을 도와주는 늙은이의 잡념일 뿐일세.]
“잡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대하시다고 생각하는데요.”
[허허, 강대하다니? 내가 사람을 해칠 힘이 있어 보이는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천마의 모습에 백화단주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확실히, 악념(惡念)은 없다.
악령(惡靈)은 아니라는 소리다.
아마 생전의 경지가 너무도 지고해 혼의 상태로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 같긴 한데…….
“충분히 있어 보이네요. 조금만 틀어져도 인류의 재앙이 되실 것 같아요.”
그렇기에 더욱더 위험하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라도 악(惡)으로 떨어지면?
그 힘이 인세(人世)에 끼칠 영향력은 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대재앙이 벌어질 터.
악령(惡靈)이 아닌 악신(惡神)이 태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왔는데, 찾아오길 잘했군요.”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어느새 경계를 넘어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에 천마가 미간을 찡그리는 그 순간.
“그만, 뭐 하시는 겁니까.”
천마의 앞을 막은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린 채 백화단주를 바라봤다.
“제 스승과도 같은 분입니다.”
“……무에 재능이 없다던 소협이 최근 이름을 높이기 시작한 이유군요.”
단호한 설천위의 대답에 백화단주는 고개를 저었다.
“혼에게 무(武)를 배운다는 것의 위험성을 알고 계십니까?”
“속여서 몸을 망가트리거나, 몸을 갈취하는 것 말입니까?”
“그 대답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고개를 끄덕인 백화단주는 접선을 접으며 그를 바라봤다.
“위험합니다. 아주 위험해요. 사도로 빠지는 지름길이 바로 죽은 이에게 의지하는 겁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확신이 담겨 있는 목소리.
그 믿음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망가진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 끝은 오로지 죽음뿐이에요.”
단호하기 그지없는 그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천위의 몸을 지키던 패기가 서서히 몸을 타고 흘러나온다.
中上.
상급에 도달하기 직전의 단계.
그 수준은 인간의 한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저항할 수 있다.
대항할 수 있다.
“제가 위에 섭니다.”
그것은 오만한 확신이지만, 그것을 받쳐 주는 힘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자신의 영력을 짓누르고, 데리고 있던 혼들의 흔들림을 읽은 백화단주는 다시금 부채를 펼쳤다.
백련이 그려진 부채.
그 안에 표정을 숨긴 백화단주는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과연.’
재미있는 아이군요.
자신감, 그리고 그걸 증명하는 기묘한 힘까지.
산책을 하다가 느낀 그 감각은 착각이 아니었던 듯하다.
“좋아요.”
웃음과 함께 부채를 접은 백화단주는 설천위에게 제안했다.
“내일부터 저와 조금 어울려 주세요.”
* * *
“……설 공자가요?”
“예. 학관장의 허가를 받아 아침 일찍 출발했다고 합니다.”
부하가 들고 온 갑작스러운 소식에 유예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백화단.
무림맹 내부에서도 나름 상당한 입지를 확보한 조직이다.
그 독특한 특성은 무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해결할 수 있기에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물론 같은 일을 하는 단(團)이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전문 분야가 다르다.
백화단은 봉인, 안정화 등이 전문이라고 들었으니까.
‘언젠가 접촉해 올 거라는 건 알았지만…….’
혼을 다룬다고 들었을 때 언젠가 그쪽에서 접촉해 올 거란 건 알았지만, 너무 빠르다.
애초에 혼을 다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다.
무룡투쟁을 보러 왔던 단주들이 돌아가 바로 알려 줬다고 해도 빠른데, 그런 중요 정보를 그들이 그렇게 빨리 말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제가 모르는 것이 있군요.”
무림맹의 핵심 조직 중 하나의 비밀을 전부 캐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좀 거슬리네요.
어느새 눈빛이 가라앉은 유예린이 부하를 쳐다봤다.
“조사하세요. 저희가 모르고 있는 이유까지 전부.”
“예!”
일단, 해가 될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음양의 이치는 세상 곳곳에 있다.
정파에도 악은 있고, 사파에도 선은 있으니.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일 거다.
“……아직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분인데.”
설천위를 데려간 백화단주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 * *
“눈은 왜 가린 건가요?”
“우리는 백화단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백화산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른 건가요?”
“다르죠. 이쪽이 저희의 본거지. 무림맹에 있는 건 업무를 위한 지부 정도의 느낌일까요?”
거참, 비밀스러운 조직이네.
이른 아침 백화단주와 학관을 나선 설천위는 두 눈이 가려진 채 마차에 타고 있었다.
“어르신들도 전부 이곳에 모여 주세요.”
[흠흠, 우리는 풍경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거늘…….]
설천위에게 붙어 있는 혼들도 전부 모아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백화단주.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기묘한 부담감과 함께 마차를 타고 며칠.
“도착했네요.”
백화단주의 한마디와 함께 공기가 변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순수하고도 푸른 공기.
순수한 영력이 짙다는 증거다.
“……여기는요?”
“백화산의 초입이에요.”
“초입인데, 이렇게 벌써 영력이 변할 정도인가요?”
진짜 이름난 명당인가 보네.
두 눈이 가려진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백화단주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짙은 차이는 안 나는데 말이죠.’
중심부에 도달하면 모를까, 보통은 산의 절반을 올라도 느낄 수 없는 차이다.
그걸 초입에서, 그것도 바로 느꼈다는 건…….
‘재능 하나는 확실한 것 같네요.’
하긴 아무런 배움도 없이 혼자 개화시킬 정도의 재능이니 말할 필요도 없나.
작게 고개를 끄덕인 백화단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천위의 안대를 풀어 줬다.
“여기서부터는 보셔도 돼요.”
이미 진법 안으로 들어왔으니.
다시 설천위의 앞에 앉은 백화단주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어떤가요? 백화산의 풍경은.”
“……대단하네요.”
마차에 나 있는 자그마한 창.
그 밖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혀를 내둘렀다.
“저주 받아서 죽는 거 아니에요?”
“후후, 그럴 수도 있겠죠?”
창밖.
하늘을 메우는 엄청난 숫자의 혼령이 설천위의 눈을 어지럽혔다.
주변의 영력이 짙어져서일까.
평소라면 보기 힘든 약한 혼들까지 흐릿하게나마 보이고 있다.
그 숫자는 그야말로 세는 것이 힘들 정도.
“이곳은 죽은 자들이 명계로 가는 입구 중 하나입니다.”
“그런 곳에 왜 집을 짓고 살아요?”
변태인가?
미간을 찡그리는 설천위의 물음에 백화단주는 빙긋 웃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죠.”
백화단주의 대답과 함께 마차가 멈췄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요. 말들이 힘들어하거든요.”
먼저 마차에서 내리는 백화단주의 뒤를 따라 내린 설천위는 기묘한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문.
마치 지옥이 조각되어 있는 것 같은 거대한 철문이 길 한복판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들어가면 안 된다고 친절히 경고해 주는 문 같은데 돌아가도 되나요?”
“안 돼요.”
단호박인가.
설천위의 소망을 단숨에 잘라 낸 백화단주는 망설임 없이 문에 다가가 손을 댔다.
그러자 천천히 열리는 문.
거대한 철문이 열리는데도 아무런 소음도 없다는 게 더 소름이다.
“자, 들어가죠.”
망설임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가는 백화단주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그 뒤를 따랐다.
아까부터 혼들이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는데, 대체 왜일까.
그런 의문을 풀 새도 없이, 한 걸음 문 안으로 내디딘다.
그리고.
[호오오오오오오오오오!]
[으으으으으으으으.]
온갖 소음이, 온갖 사념이 공간을 메운다.
정신을 뒤흔드는, 죽은 자들의 울부짖음.
어떤 이는 원망을.
어떤 이는 분노를.
어떤 이는 슬픔을.
어떤 이는 만족을.
수많은 감정이 설천위를 향해 엄습한다.
그렇기에.
[크르르르르르르르르.]
무의식중에 발동된 [패룡지기(覇龍之氣)]가 패융의 몸을 키운다.
몸을 둘러싸는 패융의 눈빛에 설천위를 향해 달려들던 혼들이 기겁을 하면서 물러난다.
“음, 참으로 부러운 아이네요.”
그 모습에 정말 부럽다는 듯 눈을 휜 백화단주가 가만히 패융을 바라봤다.
“안 줍니다.”
그 모습에 패융의 턱을 간지럽히며,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백화단주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백화단은 왜 이런 기묘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뭐 하나 이해되는 상황은 아니지만…….
“오는 길에 했던 얘기는 진짜겠죠?”
“그럼요. 제가 제시하는 시험 겸 의뢰를 완수하면 이번에 낙제를 받기로 된 과목은 전부 문제없이 통과될 거예요.”
학관장의 재량으로.
역시 이 세상은 인맥빨이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앞서 걸어가는 백화단주의 뒤를 따랐다.
숲속에 자리 잡은 긴 계단, 몇 번이나 갈라지는 길을 망설임 없이 나아가던 백화단주의 걸음이 멈춘 것은 어느 동굴의 앞이었다.
“위에 서겠다고 했죠?”
“그런데요?”
“이 안에 있는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다면 믿겠습니다.”
백화단주의 눈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천마를 향한다.
“당신이 저분의 흐트러짐을 만들 약점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겠습니다.”
천천히 동굴로 들어가는 백화단주.
그녀의 뒤를 따라 동굴에 도착한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컹! 컹! 컹!]
거칠게 짖는,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
분명 실체가 있는데, 그 몸에 일렁이는 것은 푸른 불꽃이다.
“주인을 잃고 폭주한 아이입니다.”
“……쟤 등급은요?”
“등급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죽은 저 아이의 주인은 전 백화단주입니다.”
이런 미친……!
난이도 최상이네! 이 아줌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