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55화-참수사신 (6)
화경(化境).
지고의 경지.
진정한 초인.
그런 평가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그들은 두 가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강기(罡氣)와 정수(精髓).
시간적 순위는 정수가 먼저이고, 강기가 그다음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혹은 자신의 무(武)에 대한 골자를 이해하고 체화하는 것.
그 결과물로 완전하게 응집된 유형의 기(氣)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화경이다.
그렇기에 그 무(武)는 이질적이며 독보적이다.
그렇기에 그 기(氣)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그 이전 단계와 압도적인 격차를 만들어 낸다.
넘을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존재에 이른다.
“신기하구나. 분명 직전까지도 눈치챈 기색이 없었는데?”
그렇기에 설천위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혈첩검(血疊劍) 노공(老公).
게임에서도 봤던, 네임드 빌런.
그 존재감은 그 지고의 경지만큼이나 압도적이다.
최소 무림학관의 막바지는 되어야 나올 강적.
위험하다.
가장 먼저 몸이 반응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패기가 오로지 한 대상을 향해 파고든다.
어떻게든 움직임을 묶어 여유를 만들고자 하는 발악.
허나.
“허?”
그조차 무시한다.
확고한 확신을 품은 강자를 억압하기엔 아직 힘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도망쳐!”
1분.
아주 잠깐만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면 충분하다.
저 정도 검 실력이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터.
이쪽이 해야 할 건 최소한의 시간 벌이다.
[내 공격은 쓸 생각 마라.]
현태중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한 수로 화경급 적을 전투 불능 혹은 추격 불능으로 만드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게 됐으면 현태중이 학관에서 고혼(孤魂)이 되진 않았겠지.
설령 현태중이 생전에 그게 가능했어도 지금 내 몸을 통해 그걸 해내는 건 절대 무리일 터.
뭐가 됐든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다.
다행인 점은 게임 속에서 노공의 검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는 것 정도?
아예 그 본질도 모르는 상태에서 맞이하는 것보단 낫겠지.
그러니.
“가소롭구나.”
저 비웃음을 없애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압도적인 중량감.
알고 있는 기술이다.
엄청난 두께의 참격을 날리는 기술.
검의 폭을 생각하고 피하면 무조건 베인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전력으로 뛴다!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진 설천위가 땅바닥을 구른다.
[패룡지체(覇龍之體)]로 얻어 낸 육체 능력이 가능케 한 움직임.
알고 있다면.
예상할 수 있다면.
“드루와.”
얼마든지 피해 주마.
* * *
구르고, 땅에 몸을 붙이고, 몸을 날린다.
그야말로 처절한 몸부림.
누군가가 적을 앞에 두고 저런 행동을 한다면 무인이라면 백이면 백, 그 모습을 비웃을 것이다.
나려타곤(懶驢打滾)이라는 말이 괜히 무림의 조롱이 된 것이 아니다.
검을 든 무인이 흙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때와 경우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윤백은 지금 처음 알았다.
‘이런, 미친……!’
평소 언행을 조심하고 있던 윤백은 순간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입안에서 씹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자신조차 기습에 당하긴 했어도 제대로 싸운다면 승리를 점칠 수 있을 정도의 상대다.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고 검의 위력이 강해지긴 했지만, 그 근본이 되는 기술은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였으니까.
기습만 아니었다면, 저 여아와의 조합에 정신이 팔린 것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는 상대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네 녀석은 굼벵이의 형이 분명하구나.”
어찌 삼공의 검을 저렇게……!
분노가 서린 삼공의 목소리에 윤백은 설천위를 바라봤다.
잔뜩 더러워지고 해진 옷.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에 베인 상처에선 피가 흐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치명상은 없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기색조차 웃음으로 지운 채, 삼공을 바라본다.
“끝이야? 휴식 시간인가?”
도발.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이런 상황에서 도발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윤백은 미간을 찡그렸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이냐.
그런 의문을 모두가 가질 때, 한 사람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정파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놈이구나.”
“뭐래.”
노공의 말에 설천위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지만, 노공은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네 녀석의 뜻은 전해지지 않은 것 같구나.”
“……죄송해요.”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노공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리고 보지 않고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어서.
“왜 안 도망간 건데?”
“정확히는 못 도망간 거예요.”
천천히 걸어 설천위의 곁에 선 소윤혜는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저, 다리에 문제가 있어서 못 뛰거든요. 원래는 걷는 것도 못 했어요.”
도에 손을 올린 채 소윤혜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겁먹어서 빨리 나서지 못해 미안해요. 힘들겠지만, 당신이 도망쳐 주세요.”
“무슨 개소리야?”
“어쩔 수 없는 걸요. 전 할 수 없으니까.”
설천위의 반응에 작게 웃으며 소윤혜는 흥미롭다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노공을 바라봤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제가 상대해 드릴게요.”
“네가? 내 검을 받아 낼 자신은 있더냐?”
“없어도 해야지요.”
담담한 미소와 함께 도를 쥔 소윤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전장의 공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소윤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氣)가 주위를 잠식한다.
그 범상치 않은 힘에 노공조차 검을 드는 그 순간.
“……열여덟 살?”
움찔.
“어린놈이 반말하지 말라고?”
갑작스레 혼자 중얼거리는 설천위의 목소리에 소윤혜가 움찔거리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누가…….”
내 나이를 말해 줬냐.
그런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설천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무림학관으로 데려가 줄게. 나이는 뭐 상관없으니까.”
누구와 대화하는 걸까.
왜 그 대화하는 대상이 눈에 그려지는 걸까.
묘한 착각에 가까운 감각을 느끼며, 소윤혜가 멍하니 설천위를 바라보던 그 순간.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이겠군.”
노공의 검이 움직였다.
첩첩이 쌓인, 철편과 같은 검기.
그 검기가 두 사람을 베어 내기 위해 채찍처럼 파고든다.
즉각 반응한 소윤혜가 도를 뽑으려는 그 순간.
‘없어?’
손이 허전하다.
오른손으로 쥐고 있어야 할 도가 없다.
왜?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 찬 순간.
소윤혜의 눈앞엔 거대한 등이 있었다.
한 손엔 자신이 애용하는 도를 자신이 애용하기 이전의 주인처럼 쥔 등이.
“괘씸한 놈.”
[괘씸한 놈.]
묘하게 변한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바람이 갈라진다.
담담하게 도를 치켜든 몸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폭풍을 흘려 낸다.
“덤벼라. 몇 번이고 그 목을 베어 주마.”
[덤벼라. 몇 번이고 그 목을 베어 주마.]
익숙한 말.
“내가 베어 내지 못할 목은 없으니.”
[내가 베어 내지 못할 목은 없으니.]
자신만만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담긴 목소리.
“할부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 소윤혜는 자신을 돌아보는 설천위의 얼굴에 입을 틀어막았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어린애구나.”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어린애구나.]
따스함이 담긴 그 눈동자는 분명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소윤혜가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는 사이,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뒈지겠다!!’
이 미친 노인네! 패융이 나간 다음에 들어와야지!!
노년에 내공 없이 생활해서 비루한 몸뚱이로도 충분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고 들어서 허락한 건데!
설천위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물론 몸은 그러지 못했지만.
패융이라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화경급의 혼을 받아들였다.
육체는 과부하를 넘어 터지기 직전에 이르렀고, 정신은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서 화경이라는 거대한 혼에 짓눌린다.
이대로라면 혼이 망가질 것 같은 느낌.
이 노인네, 악령이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압박감 속에서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패기(覇氣)를 끌어올렸다.
스탯을 올렸을 때 봤던, 존재를 향한 지배력이 강화된다는 문구.
그게 의미하는 것이 대충 어떤 것인지 알았기에 그 힘을 통해 버티고자 했다.
화경이라는 거대한 혼을 억누르고 자신을 유지한다.
육체는 맡겨도 자아를 잡아먹혀선 안 된다.
그래야 자신의 육체를 되찾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설천위가 나름 필사적인 싸움을 이어 나가는 사이, 참수사신(斬首死新) 소백진은 웃었다.
“생각보다 훌륭한 몸 아닌가?”
[생각보다 훌륭한 몸 아닌가?]
생각보다 더 괜찮은 몸 상태가 유쾌했고.
그리고.
“그 목을 취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구나.”
[그 목을 취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구나.]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상대가 기꺼웠다.
“목을 벨 가치가 있는 악인이로다.”
[목을 벨 가치가 있는 악인이로다.]
소가(素家)는 죄인의 참수를 맡아 온 가문.
소백진은 무인의 길을 위해 가문을 저버렸으나, 그 근본을 잊진 않았다.
자신들의 도가 목을 베어 내는 존재는 오로지 하나.
악인(惡人)뿐.
“자, 시작하자꾸나.”
[자, 시작하자꾸나.]
* * *
공간이, 대지가 비명을 지른다.
막대한 내공을 품은 노공의 검이 대지를 뒤흔든다.
검에 서린 강기는 무엇이라도 뭉개 버릴 것처럼 압도적으로 전장을 휩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담담히 선 소백진의 도는 그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몇 번이나 중첩된 강기의 일격?
벤다.
사슬처럼 엮어 휘몰아치는 변화무쌍한 일격?
벤다.
꺾이고 꺾여 그 끝을 예상할 수 없는 일격?
벤다.
벤다.
베고 또 벤다.
모든 만물에는 급소가 있으니, 사람에게 목이 있는 것과 매한가지다.
그러니 벨 수 있다.
[참수(斬首)]
소백진의 도는 담담하게 설천위와 손녀를 지켰다.
눈부신 속도도.
압도적인 위력도.
다채로운 변화도.
공간을 짓누르는 압력도.
눈을 속이는 허초도.
그 무엇도 없는, 그저 베기 위한 도(刀).
그 도(刀)가 방어에 이리도 좋다는 것을 소백진은 지금 처음 알았다.
“…….”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노공을 보며 소백진은 도를 쥐었다.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
내면에 있는 본래의 주인이 버거워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
그러니 조금 더…….
[도착했다.]
노공을 바라보던 소백진은 천마의 목소리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뒤늦게 기척을 읽은 노공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이거, 처음 뵙는 선배군요.”
담담한, 하지만 진득한 살기가 깃들어 있는 목소리.
두 눈에서 깊디깊은 살기를 흘려 내는 여인의 등장에 노공은 검을 거뒀다.
“늦었군.”
시간 초과다.
“이런, 제 물음엔 대답해 주시지 않는 건가요?”
날카로운 눈으로 노공을 바라보는 유예린의 주위에 다섯 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혈단(暗血團).
화경의 고수조차 물고 늘어져 목숨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극독을 품은 비수.
그리고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형형한 기세의 젊은이들까지.
그 모습에 노공은 검을 거둔 채 몸을 돌렸다.
“물러난다.”
“……예!”
그 결정에 윤백은 겨우 응급처치를 한 손목을 부여잡고 그 뒤를 따랐다.
망설임 없이 퇴각하는 그 모습을 경계하며 유예린은 설천위의 앞에 섰다.
“무림의 말학이 대선배를 뵙습니다.”
“흐음, 예의가 바른 아이구나.”
[흐음, 예의가 바른 아이구나.]
“감사합니다. 허면, 제 낭군님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걱정이 담긴 유예린의 눈동자에 소백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물론이다.]
이 녀석도 힘들어하고 말이야.
그 즉시 설천위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소백진.
동시에 함께 빠져나오는 패융이 작은 모습으로 변해 설천위의 어깨에 올라탔다.
“설 공자.”
넘어지려는 설천위를 붙잡은 유예린은 지친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이제 돌아가요.”
“그래야지.”
학관으로 돌아가는 거 한번 더럽게 힘드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