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54화-참수사신 (5)
전장의 공기가 변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윤백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쏴라!”
공격 명령과 동시에 숨어 있던 적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그리고 윤백을 비롯한 일류 이상의 무인들은 땅을 박찼다.
무림에서 활이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정 거리에서 쏘면 일류 이상의 무인은 반응해서 막거나 피하기 쉽고, 근접에선 검이나 도가 더 강하기 때문.
하지만 그건 개인 혹은 소수의 싸움에서 통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쪽이라도 집단이 된다면 활이라는 원거리 무기는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다.
봐라, 지금도 저렇게 막기 위해…….
“호신강기?!”
아니, 호신강기는 아니다.
그만한 기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왜, 마치 투명한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화살이 막힌단 말인가.
당황한 윤백이 주춤하는 사이, 명령대로 충실하게 땅을 박찼던 부하 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본래라면 화살을 막거나 피하느라 생긴 빈틈을 찔렀어야 할 공격.
하지만, 설천위는 화살을 막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검을 쥔 손은 자유로웠다.
“컥!”
벤다.
설천위가 휘두른 검이 공격을 위해 무방비 상태가 된 적의 목을 베었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
남자는 자신의 죽음에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공격에 집중한 것이었으니까.
자신의 죽음 뒤에 달려올 동료들이 자신의 죽음에 가치를 만들어 줄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죽음에 당황하진 않았다.
죽음에는.
‘이, 이게 무슨……!’
설천위의 가슴.
직선으로 찔러 넣은 검이 허공에 멈춰 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밀어낼 수가 없다.
대체 왜?
호신강기?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호신강기는 초인의 영역에 오른 자들이 가진 전유물.
흉내는 낼 수 있더라도 이런 위력은……!
[크르르르르.]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던 남자는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나지막한 울음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죽음에 도달한 찰나의 순간.
자신의 검을 물고 있는 묵빛의 용이 보였다.
[패룡지기(覇龍之氣)]
패룡의 기운은 그 육체를 휘감으니.
자신의 몸을 지키는 힘을 느끼며 설천위는 검을 뽑았다.
다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육체의 질 자체가 달라졌다.
강화됐다는 게 이런 소리구나.
[패룡지체(覇龍之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절정이라도 해 볼 만하겠어.
“흡!”
어느새 접근한 또 다른 적이 검을 휘두른다.
허나, 무시한다.
[크르르르르르.]
이쪽에는 용이 깃들어 있으니까.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추는 검을 느낄 때쯤, 설천위의 검 또한 상대의 몸에 닿아 있었다.
동시에 떨어지는 목.
기술로 베어 낸 게 아니다.
힘과 속도로 그냥 잘라 낸 것뿐.
거친 단면이 그 증거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람은 목을 베면 죽는다는 사실뿐인데.
그렇기에 검을 거둔 설천위는 발이 멈춰 있는 나머지 적들을 보며 웃었다.
“왜 멈춰 있지?”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이를 악문 윤백은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명백하게 느린 움직임, 굼뜬 반응 속도.
아무리 목숨을 버리는 공격이라 할지라도 목으로 들어오는 칼에는 조금이라도 반응해야 한다.
그게 인간의 본질이니까.
아무리 지우고 지우려고 해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생존 본능이니까.
그런데, 그런 반응조차 없었다.
인지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였다는 소리다.
그럴 리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분명 빠르긴 했지만, 본능의 영역에서까지 반응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화살을 막아 내고, 적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것.’
“……사술인가?”
“그건 좀 듣기 거북하네. 나 이래 봬도 명문 정파의 자식인데 말이야.”
윤백의 중얼거림을 조소로 받은 설천위는 검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왜 안 들어와? 시작해야지?”
도발.
그 모습에 윤백은 이를 악물었다.
고작해야 애X끼 따위가……!
가문에서도 버림받은 놈이 이런…….
‘……진정해라.’
치솟던 분노를 가라앉힌 윤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아닌데?”
“……대화가 안 통하는군.”
어깨를 으쓱인 윤백은 작게 신호를 보냈다.
“네가 뭘 믿고 있는지는 훤히 보인다. 나만 막아 내면 뒤에 있는 녀석은 혼자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 인질 걱정 없이 이렇게 나와서 설치는 거겠지.
하지만, 거기까지다.
“네 녀석의 얄팍한 계획 따위 우리에겐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한다.”
윤백의 신호에 천천히 앞으로 나온 마추중이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큼지막한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마추중의 눈에선 찐득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녀석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버틸 수 없다.”
다친 상태라곤 하나 초절정 고수.
거기에 멀쩡한 초절정 고수가 하나 더.
버틴다?
같은 초절정 고수라도 버티기에 벅찰 터.
승리는 확실하게 이쪽의 것이다.
당장 눈에 띄게 굳어 버린 저 눈동자가 그 증거다.
설천위의 표정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 윤백은 검을 들었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주마.
윤백의 신호와 함께 멈춰 있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설천위가 이를 악무는 그 순간.
“뒤로 오세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주 조금.
거리로 따지면 1m가 조금 넘는 수준의 이동.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일섬(一閃)]
목이 베인다.
달려들던 이들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설천위가 만들어 낸 것과는 전혀 다른, 마치 냉동 상태의 고기를 단숨에 잘라 낸 것 같은 깔끔한 단면.
자신의 죽음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 그 눈에는 결사의 각오로 가득 차 있었다.
달려들던 이들의 목을 단숨에 베어 낸 공격에 담겨 있는 것은.
[자비인가.]
천마의 중얼거림에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단숨에 목을 베어 버리는 살수(殺手)에서 자비라는 감정이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공격에 담겨 있는 정서는 자비가 확실했다.
그렇기에.
“……무슨?”
너무도 이질적인 감각에 아군의 죽음조차 느리게 알아챈 윤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머릿속에 차오른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작은 걸음 소리와 함께 그 원인이 걸어 나왔다.
“여러분들이 제 목숨을 노리는 적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네요.”
느릿하고 여유로움이 담긴 목소리.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로 윤백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저도 이분에게 가세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참수사신의 손녀인가?”
“조부께서 그리 불리셨다고 듣긴 했네요.”
담담함.
아무리 무림이 피와 피로 점철된 세상이라고 하지만, 대체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십 대 초반.
아무리 무림에서 굴러도 사람의 목숨을 취하고 저리도 담담하다니.
‘그 괴악한 노인네의 손녀라는 건가.’
이를 악문 윤백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보인 공격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으나, 그 실력을 전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참수사신은 오로지 한 가지만을 갈고닦은 송곳과 같은 고수.
그런 고수의 절학을 이은 손녀이니 경지 이상의 위력을 보여 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허점을 찾아내 그것을 파고들기만 하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윤백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수 없다.
“재미있네.”
입꼬리를 비틀고 있는 저 가증스러운 꼬맹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자신과 같은 것을 생각해 낸 저 녀석은 분명…….
“드루와. 왜 쫄았냐?”
방어에 전념할 테니까.
사람을 짓누르는 힘.
자신보다 약한 부하들은 저 녀석의 영역에 들어간 순간, 저 계집의 공격에 반응조차 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그건 자신들도 마찬가지다.
저 영역에 들어가서 저 계집의 공격을 견뎌 내며 이길 수 있을까?
“윤백.”
마추중의 목소리에 윤백은 이를 악물었다.
방법이 없다.
저 둘의 조합은 뚫을 수 없는 방어다.
그렇다면 일단 시간을 끌자.
이쪽이 머릿수가 많으니 시간을 끌면 충분히 이점을 가져갈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반응의 둔화를 불러왔다.
“안 들어오면 내가 간다?”
나지막한 설천위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 미친놈이……!”
궤적을 숨기는 검법.
분명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공격은 자신의 목이 아닌 손목을 노리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놈!!”
윤백의 반응이 방어로 향하는 순간, 비슷하게 반응해 공격을 취한 마추중의 도끼가 설천위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설천위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크르르르르르.]
막아 낸다.
일류 수준의 검을 완전히 정지시킨 건 아니더라도,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꾸는 건 가능했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몸을 비틀어 상처 없이 도끼를 피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허 참, 이제야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는 것 같구먼.]
속도로는 최고라는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가 빛을 발한다.
정면에서 의식의 빈틈을 찌르는 기습을 성공시키고, 상처 없이 물러나는 것조차 가능케 하는, 신속의 보법.
본래라면 근력이, 순발력이 부족해서 낼 수 없었던 속도가 [패룡지체(覇龍之體)]에 의해 마땅히 내야 할 속도를 되찾았다.
“이노옴!”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
내려친 도끼를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찬 마추중이 달리는 설천위의 등을 향해 도끼를 내려치려던 그 순간.
찌잉.
날카로운 무언가가 발을 멈추게 했다.
이전에 비슷한 것을 느꼈고, 그 결과로 발목을 잃었다.
“큭!!”
도끼로 목을 감싼 마추중은 강렬한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이 무슨 묵직한 공격이란 말인가!
“어머.”
막혔다는 것 자체가 의외여서 그런가.
소윤혜는 잠시 마추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거리에선 무리네요.”
소윤혜의 작은 중얼거림에 마추중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들이……!”
초절정이 어떤 경지이던가.
그 이름이 나름 성 단위로 퍼질 정도의 경지다.
중소 문파의 장문인 중에서도 초절정에 오르지 못한 자가 많은 경지다.
그런데.
그런데 이 괴물 같은 놈들은 대체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바쳐 이뤄 낸 것이 마구 짓밟히는 감각에 마추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도끼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날이 나간 도끼.
상관없다.
머리통에 내려찍으면 날이 없어도 뭉개 버릴 수 있다.
죽여 주마.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주마.
“혈천을 위해!!”
이 목이 떨어져도 네놈들의 팔 하나라도 가져가 주마!
앞으로 달려 나가는 마추중의 도끼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설천위만을 노리고 떨어진다.
그 마지막 발악에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가 맞대응하려는 그 순간.
[피해라!]
천마의 외침에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몸을 뒤로 날렸다.
의심?
그런 거 할 여유가 있을 리가.
천마가 저렇게 다급하게 외쳤다는 말은…….
“허, 피해?”
처참하게 갈라진 땅.
그 앞에 선 노인은 놀람이 담긴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노인의 모습을 확인한 마추중은 고개를 돌려 윤백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 윤백이 자신의 차례는 없을 거라고 확언했었는지.
“삼공(三公)……!”
마추중의 경악에 힘입어 설천위는 있는 힘껏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혈사련의 최대 전력 중 하나.
혈첩검(血疊劍) 노공(老公).
감당할 수 없는 화경급 고수의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