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47화-중간고사 (7)
“쳐라!!”
난전이 시작되었다.
살수들과 연가의 병력, 그리고 설천위 일행.
이 세 세력이 부딪힌 순간부터 우위는 다름 아닌 설천위들에게 있었다.
“큭! 빌어먹을 놈들!”
연가의 병력을 마주한 칠영은 이를 악물었다.
저 가증스러운 애X끼들이 또 함정을 파 놨다.
이렇게 되면, 저 포위 병력들은 방해밖에 안 된다.
그냥 무시하고 공격?
하나하나가 적의 몸을 지켜 주는 은폐물이 된 이상,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이쪽이 되레 반격을 당한다.
가장 좋은 수법은 적들이 싸우는 혼란을 틈타 노리는 거지만…….
‘은신을 감지하는 것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
분노로 달려왔던 칠영의 두뇌가 전투를 앞두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수란 목숨을 내놓고 임무를 완수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저한 계산 아래 행동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임무를 허공에 날려 버릴 만한 막무가내식 돌격은 절대 금물이다.
생각해라.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가.
무엇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가.
칠영의 눈이 깊이 가라앉고.
이내 분노를 완전히 삼킨 칠영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서히 압박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천천히 접근하는 칠영의 존재를 인지한 남궁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런 남궁천과 눈이 마주친 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복면을 내렸다.
“네놈들은 결국 죽을 것이다.”
* * *
“똘똘한 놈들이네.”
난전 속.
연가의 무사들을 정리하며 이동하던 설천위는 가볍게 혀를 찼다.
살수 녀석이 분노한 상태로 찾아왔을 땐 제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다.
전투 앞에서 침착해지는 타입인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다.
뭐가 됐든, 이쪽도 나름의 이점이 있으니까.
“신경을 갉아먹을 속셈인가 보군.”
설천위의 앞을 달리던 남궁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자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살수 놈들의 기척에 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전투의 긴장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게 만들려는 속셈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늦췄다간 그 순간을 노리고 습격을…….
“신경 쓰지 마. 필요해지면 내가 말해 줄게.”
남궁천의 상태를 바로 읽어 낸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며 장담했다.
이쪽은 상시 경계 가능한 혼들이 있다고.
문제없다.
설천위의 장담에 남궁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공을 거뒀다.
어찌 됐든, 힘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게 좋다.
앞으로 며칠은 싸워야 할 테니.
그렇게 최대 전력을 아끼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이제 상당히 할 만해졌다.
아직 경험치도 꽤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한 번 정도는 헤쳐 나갈 수 있을 거고.
거기에 적들의 포위망 수준을 보아하니 큰 어려움 없이…….
[천위, 아무래도 사학(邪學)이란 이름을 도박으로 딴 것 같진 않구나.]
“씁?”
천마의 목소리에 즉시 수신호로 남궁천을 멈춘 설천위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조그맣게 보이는 적들.
포위망이다.
북쪽만이 아닌, 동쪽에도 포위망을 쳐 놨다.
“천위?”
“아무래도 적들이 멍청하기만 한 건 아닌가 보네.”
가볍게 혀를 찬 설천위는 주위를 쓱 둘러본 뒤 나무에서 내려왔다.
살수들은 여전히 근처에 있다.
저 녀석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이 앞에도 포위망이 있어. 어떻게 할래?”
설천위의 말에 상황을 깨달은 남궁천은 잠시 고민하는 듯 앞을 바라봤다.
짧은 사고 뒤, 남궁천은 입을 열었다.
“뚫자. 그 외의 길은 없으니까.”
“오냐.”
널 따라가겠다고 정했으니, 확실하게 따라가 주마.
주먹을 움켜쥔 설천위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괜히 빠르게 도망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못 도망가니까.
그렇다면.
“또 만났구나.”
“오, 익숙한 얼굴이네?”
맞서 싸울 뿐이지.
* * *
설천위와 남궁천의 앞을 막아선 사내, 전철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놀라우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게.”
“아니, 뭐 상처도 다 치료 못 한 몸으로 왔다는 건 안 놀라운데…….”
말끝을 흐리는 설천위의 대답에 전철후는 피식 웃으며 도를 내렸다.
“어떻게 여기를 틀어막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이거군?”
“어.”
“뭐, 뻔한 일이다. 사냥을 자주 하다 보면 사냥감의 습성이 보이는 법이라서 말이다.”
입꼬리를 비튼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비웃음.
“너희 같은 애X끼들은 위기에 몰리면 가장 먼저 엄마 젖부터 찾거든.”
“오, 그래서?”
“설가 네 녀석은 가문과 사이가 안 좋으니 서쪽은 제외, 그렇다면 남은 건.”
“남궁세가지.”
“그러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는 북동쪽을 틀어막아야지.”
전철후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합리적인 생각이지.
“허를 찌를 생각이었겠다만, 어린 네놈들의 생각이야 뻔하니라.”
내려놨던 도를 들어 남궁천을 겨눈 전철후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그림자 놈들! 이 녀석은 내가 맡을 테니 저놈은 알아서 처리해라!”
“오? 그래도 되겠어? 전이랑 똑같을 텐데?”
“흥, 내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이느냐? 지금은 어떻게 잘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때 네 녀석의 팔은 확실하게…….”
코웃음을 치는 전철후를 비웃듯 설천위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검을 뽑았다.
“팔이 뭐?”
“……어떻게?”
“쓰고 몇 달이나 불구가 되는 기술은 기술이라고 안 하지.”
뭐, 사실 보통 두세 달 정도는 불구가 될 정도의 상처가 맞긴 하지만.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전철후의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뭐, 그렇다고 네 상대가 나는 아니고.”
여전히 등에 연수화를 업은 상태인 남궁천이 검을 들어 전철후를 겨눈다.
“네 상대는 나다.”
“애X끼들이…….”
아무리 이쪽이 다쳤다고 한들, 고작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들이……!
연수화를 내려놓지 않은 채 검을 드는 남궁천의 모습에 솟구치는 화를 입에 문 전철후가 도를 몸 쪽으로 당겼다.
기수식(起手式).
저번 전투에선 취하지 않았던, 전력을 끄집어내겠다는 그 의지의 표현에 남궁천 또한 자세를 잡았다.
도를 가슴께까지 당겨 찌르기 자세를 취하는 전철후.
양손으로 검을 쥔 채 상단 자세를 취하는 남궁천.
베기를 주력으로 하는 도가 찌르기 자세를 취하고, 찌르기를 쓸 수 있는 검이 베기 자세를 취하는 기묘한 구도.
그 구도를 가만히 지켜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고 뒤로 돌았다.
저쪽은 남궁천이 알아서 하겠지.
“자, 살수 놈들아! 이쪽이다!”
“오만한 놈……!”
호쾌하게 소리치며 손을 까딱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칠영의 이마엔 힘줄이 솟았다.
저 오만방자한 놈의 심장에 비수를 박지 못하면 살수 생활을 접으리라.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치욕에 치를 떨면서도 칠영은 냉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쳐라!”
분노? 치욕?
그런 건 승리했을 때 풀 수 있는 거다.
굳이 이 손으로 승리하지 않더라도!
칠영의 지시에 열댓 명의 살수들이 단번에 설천위를 향해 뛰었다.
본래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될 인원수.
하지만, 철저한 훈련 끝에 완성된 합격술은 그 과한 인원수조차 공격력으로 바꾼다.
시작은 비수.
살수들이 망설임 없이 뿌린 십수 개의 비수가 설천위를 향해 쇄도한다.
“흡!”
살수들의 비수를 주먹으로 쳐 낸 설천위는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살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두 눈을 부릅뜬 설천위의 동공이 짐승의 그것으로 바뀐다.
[크르르르르.]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패기가 그 존재감을 뿜어내며 상대를 압박한다.
[패룡지체(覇龍之體)]
혼과 인간의 본능에 간섭하는 힘에 움직임이 경직된 살수의 공격이 반 박자 느려진다.
그리고 그 틈을 망설임 없이 찌르는 설천위의 주먹.
[섬벽권(閃霹拳) 제1초 일벽(一霹)]
안면을 뭉개는 주먹과 함께 설천위는 몸을 비틀었다.
멈추면 안 된다.
[끊임없이 흐르거라.]
천마의 조언을 따라, 그저 끊임없이 움직인다.
적의 공격을 막고 피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느낄 정도로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고 움직인다.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의 흐름과 섬벽권(閃霹拳)의 흐름을 맞추거라.]
두 가지 모두 섬뢰(閃雷)의 영향을 받은 무공.
당연히 그 안에는 서로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가 있다.
그 이치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설천위의 몸은 정말로 한 줄기 섬뢰가 되어 적들을 관통했다.
“후우!”
숨을 몇 번 쉴 정도의 시간.
달려오던 암살자들을 전부 눕힌 설천위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슬 감이 온다.
섬벽권을 배웠음에도 천마가 섬뢰풍영보의 배움을 막지 않은 이유가.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로 통할 수 있기에 막지 않은 거다.
“네놈…….”
순식간에 쓰러진 부하들의 모습에 칠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소모품으로 쓰는 부하들이라곤 하지만, 그 경지는 이류의 끝자락이다.
고작해야 일류 수준인 설천위가 이렇게 단숨에 해치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즉.
‘정보가 잘못됐거나 변화가 있었다.’
어린놈이니 성장했다는 선택지가 조금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차분하게 분석을 마친 칠영은 비수를 들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이제 막 절정의 초입에 들었을 애송이.
이쪽의 상대는 안 된다.
아무리 살수의 이점인 기습을 잃었다고 해도 저런 애송이한테 질 정도로 무르게 살아오진 않았다.
거기에 저 거칠어진 숨.
승기는 이쪽에…….
“천위!”
“오냐!”
“가자!”
가자?
어딜?
순간 이해 못 할 남궁천의 외침에 칠영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전철후.
졌다?
전철후가?
아니, 진 게 아니다.
남궁천도 상당한 크기의 상처가 가슴에 생겼으니까.
그렇다면.
간다는 것은?
순간 상황 파악이 끝난 칠영이 도주를 막기 위해 땅을 박차려는 순간.
“움직이면 죽는다.”
[움직이면 죽는다.]
나지막한 살기가 칠영의 발을 묶었다.
전신을 강타하는, 압도적인 살기.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괴물의 살기.
그의 시선이 다시 설천위를 향했다.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올린 채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외양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압박감이 공간을 짓누른다.
그렇게 순간 굳어 버린 칠영을 뒤로한 채 설천위와 남궁천은 달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끝까지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쪽은 도망치는 데 성공만 하면 되니까.
즉.
“잘 있어라!”
포위망을 뚫을 틈만 생기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다.
전철후와 칠영이 비어 버린 틈.
남궁천이 휘두르는 검을 막을 수 없는 연가의 포위망이 단숨에 뚫린다.
그렇게 단숨에 활로를 뚫은 남궁천과 설천위는 그대로 내달렸다.
전철후와 칠영이 몸을 추스르고 따라붙겠지만 뭐, 이제 앞을 막는 건 없다.
달리고 달리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다.
그렇게 죽어라 달리는 시간.
[음, 아직까진 여유가 있구나.]
저 멀리서 따라오는 살수와 전철후의 기척을 감지해 주는 암영의적 덕에 설천위와 남궁천은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주 하루째.
정말 미친 듯이 달리고 달리던 어느 순간.
[멈추거라.]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발을 멈췄다.
“왜요?”
[아무래도 상황이 썩 좋지 않게 흘러가는구나.]
“예?”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아까 전철후랑 살수 놈들은 꽤 뒤에 있다며?
천마의 말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재빨리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남궁천도 함께.
그렇게 높은 곳에 오른 설천위는 눈에 들어온 풍경에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저 초원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초원이라도…….”
[저기, 안 보이느냐?]
“보이긴 뭐가…….”
“천위.”
“응?”
“아무래도 사파 놈들이 그리 멍청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남궁천까지 이상한 소리를 해 대자, 설천위는 다시 안력을 집중해 초원을 바라봤다.
뭐 이상한 점은 검은 선 하나밖에…….
“검은 선?”
“안휘성으로 넘어가는 길을 차단한 것 같다. 아무래도 사천맹(邪天盟)이 움직인 것 같군.”
초원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
그 모두가 사람이었다.
“삿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