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43화-중간고사 (3)
“음, 이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구려.”
대뜸 상자를 내미는 여자의 행동에 남궁천이 난색을 표했다.
하긴 상황 설명도 안 해 주고 그걸 내밀면 쓰나.
남궁천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여인은 한 번 호흡을 고르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저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중 하나입니다.”
“가보?”
가보라는 말에 남궁천의 표정이 변했다.
여자가 가문의 가보를 들고 암살자에게 습격당했다?
거기에 일류 이상으로 보이는 여자의 무공, 눈빛에 서린 감출 수 없는 분노.
“권력 투쟁인가?”
“예, 부끄럽게도. 패배해서 도주하던 중이었죠.”
“그냥 조용히 도망치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 물건은 절대 외부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권력을 잡은 놈은 그딴 거 관심 없고?”
“……예.”
흠, 살짝 각이 보이네.
“상자 내용물은?”
“저도 모릅니다. 가문의 누구도 모르지요. 그래서 그 멍청한 오빠가 거래 재료로 쓴 것이지만요.”
과연.
아직까진 혈사련과 연관이 없는 단계인가.
혈성지록(血聖之錄)은 혈사련의 초대 혈주의 기록이 담긴 서적. 즉, 일종의 성서(聖書)다.
그쪽은 말이 연합이지 거의 종교나 다름없으니까.
문제는 이 혈성지록이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공.
초대 혈주가 끝에 완성시켰다고 하는 궁극의 무공이 잠들어 있다.
뭐, 그런 설정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성향이 중립이거나 악인 경우 저 혈성지록을 취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으니까.
그러면 뭐, 대부분 타락 루트로 가서 배드엔딩 직행이다.
애초에 현 무림의 정파는 말도 안 되는 전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혈사련의 무공이나 사파의 무공은 괴이와 상성이 좋지 않다.
후반부에 나오는 괴이를 잡으려면 정파, 그것도 성 속성을 띤 무공이 좋다.
소림의 무공이라든가.
여하튼 원래라면 이 여자는 죽었을 거다.
남궁천이 지금 이 시간에 여길 지나는 건 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일 테니까.
게임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변수.
이 여자가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미래에 문제가 생긴다.
‘이대로 두고 가? 아니면 아예 데리고 가?’
어떤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지?
설천위가 고민에 빠진 순간.
“제 이름은 연수화입니다. 제발 이 물건만이라도 가져가 주십시오.”
“음,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구려.”
여자의 절박한 부탁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결국 가문의 물건. 외인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당신의 형제에게 돌려주고 몸의 안전을 보답 받는 게 낫지 않소?”
정서적으로도 그게 맞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가문의 물건인데 그걸 외인에게 넘기는 경우가 어디에 있나?
본인도 그 물건이 절대 외부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유언이 있었다고 말해 놓고.
선뜻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에 연수화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외인이 낫습니다. 두 분은 정파의 소협들이지요?”
“……어찌 알았소?”
“제 얼굴을 못 알아볼 순 있어도 제 이름까지 모르는 건 사파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순간, 연수화의 대답에 설천위의 머릿속에 한 가문이 떠올랐다.
연이라는 성을 쓰는 사파의 가문.
“사학(邪學) 연가(連家)!”
설천위의 말에 남궁천은 미간을 찡그렸고, 연수화는 작게 웃었다.
“예, 제가 그 사학 연가의 막내, 연수화입니다.”
“그렇다면 권력을 쥔다고 나선 이는 장남인 연주택이겠군.”
“예, 그 멍청이가 가주가 되겠다고 외부인을 끌어들였지요.”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고, 남궁천도 연수화가 사파인이라는 사실에 묘한 표정을 짓는 사이.
연수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가보는 악용의 여지가 많으니 악인에게 넘어가선 안 된다는 말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사파는 대다수가 악인이니 외부에 넘어가면 안 된다로 뜻이 통한 거고?”
“예. 그러니 두 분이라면 맡길 수 있습니다.”
단단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자신들을 응시하는 연수화를 보며 남궁천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맡아 드리지.”
“감사…….”
“단, 이 가보만이 아니오.”
검을 쥔 채 남궁천은 담담히 약속했다.
“당신의 목숨도 맡아 드리겠소. 이대로 죽기엔 너무도 아쉬운 호걸이니.”
뭐래, 이 자식아.
우리 시험 중이야.
* * *
“씁, 이번에도 과목 하나는 낙제 확정이군.”
“미안하게 됐네.”
“됐다. 나도 그냥 두고 가면 뒷맛이 찝찝했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라고 한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말고요.”
다음 날.
결국 남궁천과 설천위는 시험을 포기하기로 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수화를 데리고 사파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니까.
임무의 종결지가 외진 곳이긴 해도 사람이 아예 없는 곳도 아니고.
일단 이대로 복귀해서 잘 보고하면 되겠지.
그렇게 한참을 걷던 순간.
[천위야.]
“천위.”
천마와 남궁천의 부름에 설천위는 그대로 미간을 찡그렸다.
“왜?”
“적이 매복하고 있다. 아니, 포위하고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군.”
잠깐, 잠깐.
“천라지망(天羅之網)?”
“아무래도 그것 같다.”
이 미친놈들이…….
그걸 하룻밤 만에 펼쳤다고?
심지어 우리의 도주 경로를 예측하고?
“천라지망 자체는 저 때문에 펼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두 분이 정파 사람이라는 게 들켰군요.”
“이유는?”
“저를 습격했던 인원들이 본 남궁 소협의 인상착의와 무공 때문이겠지요.”
“그것만으로?”
남궁천은 지금 눈에 띄지 않게 복장을 바꾼 상태다.
검도 적당히 천으로 감아 문양을 숨겼고.
그냥 딱 봐선 젊은 무인으론 보여도 정파라고 단정 짓긴 힘들 텐데…….
“거기에 제가 겁탈당한 흔적도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
“사파인이라면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그 정도 요구는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이야, 사파 새끼들 살벌하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지. 이 시대의 사람 사는 세상, 그것도 무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면 대체로 말이 안 되는 게 많지.
대충 납득하고 넘어간 설천위는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뭐가 됐든, 이쪽의 길은 막혔다.
이 이상 전진하면 저쪽에서도 눈치챌 터.
천라지망은 엄청난 규모로 사람을 펼쳐 포위하는 것인 만큼 상대의 수준은 이류 정도가 한계일 거다.
뚫으려고 한다면 뚫지 못할 이유는 없다.
없지만…….
“역시 정면 돌파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군.”
“음, 무리야.”
연수화가 문제다.
상처가 덜 회복된 그녀는 움직임이 자유롭지가 않다.
저쪽에선 그물부터 암기까지 다양한 수법을 준비해 왔을 터.
저들의 포위가 몇 겹으로 펼쳐졌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강행 돌파는 무리다.
“돌자. 이건 선택지가 없다.”
“어쩔 수 없군.”
“죄송해요. 저 때문에…….”
“우리가 선택한 길이오. 그렇게 죄송스러워할 것 없소.”
고개를 못 드는 연수화의 어깨를 토닥인 남궁천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방향을 틀었다.
“이 방향이 함정일 가능성은?”
“거의 확정이겠지.”
사학(邪學)이라 불리는, 사파의 두뇌를 담당하는 가문 중 하나니까.
이런 기본적인 유도 정도야 당연히 깔고 들어갈 터.
앞날이 아주 걱정되는구먼.
* * *
“그래서요? 그 가보가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고?”
“예. 다만 선조 중 한 분께서 반드시 봉인해야 할 물건이라면서 감췄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흠, 그렇구먼.
“천위, 생각보다 여유가 있군?”
“뭐래. 네가 다 잡았는데 내가 여유가 없을 이유가 어디 있냐.”
시체와 피가 낭자한 공간.
그곳의 중심에 앉아 있던 설천위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이번이 몇 번째지?”
“다섯 번째군.”
“점점 주기가 빨라지고 있고.”
“전멸시킨다고 시키고 있지만 아무래도 애초에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정찰까진 못 잡으니 어쩔 수 없지.”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남궁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적의 수준이 조금씩이나마 올라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류 수준의 적들이 이쪽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겠지.
“역시 저를 두고 가시지요. 두 분만이라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천라지망을 조금만 지나면 정파의 영역이다.
두 사람이라면 억지로라도 뚫고 갈 만한 수준.
허나 이대로 계속해서 조여지기만 하면 그 끝은 뻔하다.
애초에.
“저들이 노리는 건 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정파에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이리도 지독하게 따라붙는 것입니다.”
이쪽만 죽으면 두 사람을 향한 압박은 당연히 풀어진다.
이렇게 목숨 걸고 이럴 이유가…….
“역시 잘 모르는구려.”
“예?”
“우리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것이 소저는 물론 적들이 가진 약점이오.”
이성과 합리?
그게 뭐냐.
“사람이 사람을 구할 때는 이타적인 계산이 들어가지 않는 법이지.”
아이가 갑작스레 우물에 빠지면 누구라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그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하였다.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사람이라 하였다.
의(義)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 가지는, 가장 근본에 있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
“그대를 구하기로 정한 시점부터 우리의 손익은 이미 논외의 이야기요.”
손익을 따질 것이라면 애초에 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남궁천의 대답에 연수화는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행태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났다.
이 더러운 놈들이 또 공기 묘하게 만드네.
[껄껄껄, 왜? 그 아이가 그립더냐?]
“됐네요.”
눈치 백 단인 천마의 놀림을 넘기며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뭐, 남궁천이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아예 손익을 계산하지 않을 순 없다.
이쪽도 살긴 살아야지.
일단…….
“슬슬 돌파해 볼까?”
* * *
“멍청한 놈들! 아직도 못 잡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것이…… 적의 수준이 생각보다 더 뛰어납니다.”
“뛰어난 걸 누가 모른다더냐? 천라지망이다! 수백 명이 있는데 고작 셋을 못 잡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심지어 하나는 중상인데!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연주택의 목소리에 부하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화가 난 상태의 연주택에게 뭐라고 말한들 소용이 없고, 괜히 이쪽만 피를 볼 테니까.
‘멍청한 게 입만 살아선…….’
사학(邪學) 연가(連家)의 후계자는 대대로 머리싸움으로 정해진다.
애초에 무공으로 가문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기에 가능한 전승 방식.
허나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고르고 골라도 피는 옅어지는 법.
현시대의 장남은 그리 뛰어난 머리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범인보다는 좋지만 사학(邪學)이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한 수준을 갖췄다고 평가되는 건 막내인 연수화였다.
이성도, 지성도 부족한 연주택이 날뛰기에 충분한 이유다.
부모를 배신하고 외부를 끌어들여 권력을 손에 쥔 연주택.
그가 가장 먼저 한 선택이 바로 형제들의 제거였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연주택은 정당성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이리도 심혈을 기울여 동생을 사냥하고 있는 것이지.
짐승과 같은 연주택의 행실에 부하가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고 있던 순간.
“긴급입니다!”
“들어와라!”
다급한 부하의 목소리에 연주택의 목소리가 또다시 높아졌다.
긴급이라니.
대체 또 뭔데?
살벌한 연주택의 시선이 새롭게 들어온 부하를 향했지만 부하는 그 압박감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포위망이 뚫리고 있습니다!”
“뭐?”
“귀신같이 조금이라도 더 약한 곳을 공략해 천라지망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