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42화-중간고사 (2)
“으~! 한 2주는 귀찮게 됐네요.”
교관이 나간 뒤, 홍유화는 기지개를 켜며 입술을 삐죽였다.
말이 2주지, 그 기간 대부분을 노숙으로 보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치르고 싶지 않은 시험이긴 하다.
근데 어쩌겠는가.
해야지.
“아니, 그 전에 이 시험 난이도에는 아무도 불만 없는 거야?”
“응? 뭐가 말인가?”
거,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지 마라, 남궁천.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2주면 다른 과목들은 어떻게 하고, 거기에 사파의 영역이라니.”
“음, 이 생존술 수업은 보통 고학년이 들으니 그 정도는 기본 아닌가?”
“……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거 기초 생존술…….
“설마 천위, 모르고 수업을 신청한 건가?”
“에? 설마요. 꽤 유명한데요. 이 수업.”
……그러고 보니 홍유화도 남궁천이 이 수업을 듣는 데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지.
“보통은 무공 관련 수업을 먼저 듣죠. 강해지는 게 우선이니까.”
“이런 실전을 위한 수업은 대체로 실제 임무에 투입을 앞둔 졸업 예정자들이나 듣는 법이지.”
“씁?”
“저는 무공 수업에선 딱히 들을 게 없어서 미리 듣는 거지만요.”
“나도 그렇다네.”
아 놔, 그런 거였어?
왠지 철백이랑 서하영 둘 다 다른 수업을 듣더라.
“그런 의미에서 언니가 참 아쉬워했죠.”
“음? 왜?”
“언니는 작년에 들었거든요. 이 수업.”
“아!”
하긴 그쪽도 무공으론 배울 게 거의 없는 상태니까.
대충 납득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난이도가 높은 시험이 기본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악물고 하는 수밖에.
그렇게 설천위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그리는 순간.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건가요?”
“뭐가?”
홍유화의 질문에 설천위는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같이 가자고?”
“그건 됐어요. 제가 무슨 득을 보겠다고 당신이랑 같이 가나요?”
“그럼 뭐?”
“황보택. 어찌할 거냐고요.”
움찔.
홍유화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섞인 질문에 저 멀리 있던 황보택이 움찔거린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내가 약속을 못 지키게 되어 버렸네.”
“그러니까요. 무룡투쟁에서 뚝배기를 부숴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러니까 내가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설천위.
그리고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흘겨보고 있던 황보택에게로 향한다.
“누가 예선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지, 뭐야?”
“어후, 당당하게 자기가 짓밟아 주겠다고 선언한 주제에 예선에서 탈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게 말이야. 참, 이 근성이 없어, 근성이. 뼈를 깎아 내는 각오로라도 올라왔어야지.”
“그러니까요.”
노골적인 조롱.
그 조롱에 황보택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 예선전 상대도 일류의 끝자락이었다.
정말 치열하게 싸워 한 끗 차이로 패배했을 정도로 실력은 비등비등했다.
단지 조금 실수해서 판정패를 당한 것뿐인데…….
황보택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르는 순간.
그의 성질을 못 이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보택.
그 시선이 강렬하게 설천위를 향해 꽂힌다.
하지만.
“뭐? 꼽냐?”
설천위라고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는 망설임 없어 황보택을 향해 걸어갔다.
“시비를 턴 건 네가 먼저고, 약속을 못 지킨 것도 넌데. 왜 그리 눈을 치켜뜰까?”
“네놈……. 이 치욕…….”
“치욕은 개뿔, 먼저 내 약혼녀를 욕한 건 너잖아.”
부들거리는 황보택의 모습에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향한다.
“꼬우면 한판 뜨든가?”
한판 뜨든가.
원래라면,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데.
‘……빌어먹을!’
봐 버렸다.
설천위가 남궁천을 꺾은 일검(一劍).
자신이 도달할 수 있을까 없을까도 판별할 수 없는 아득한 영역에 발을 들인 일검(一劍).
무룡투쟁을 보러 왔던 아버지가 찾아와 뭐라 했던가.
그 정도 수준까진 가지 못하더라고, 그 검을 한 번이라도 받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지금의 수준으론 일격조차 받아 내지 못한다는 소리다.
설령 설천위가 그 공격 후에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수준이 되더라도 그 검을 막지 못하는 순간, 패배는 확정이다.
도발에 응할 수 있는 실력차가 아니라는 거다.
이를 악문 황보택은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다.
차마 사과도 못 하고 대놓고 굽힐 순 없으니 무시한다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기개도 없는 쉑히, 너랑 싸워서 뭐하겠냐.”
짧은 조롱과 함께.
그 조롱에 황보택은 그저 이를 악물 뿐이었다.
* * *
“그래서, 우리 둘이 출발인가?”
“이런 임무는 많으면 오히려 불편한 법이지.”
“홍유화 걔는 뭐, 혼자 가려나?”
“음, 아닐 걸세. 그녀는 주변과 적당히 친해지는 유형이니.”
아, 같이 갈 동성 친구들이 있다고?
음, 그럼 그게 낫지.
노숙이 잦으면 이성이 있는 건 불편할 테니까.
현명한 선택이야.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나저나 천위 괜찮겠나? 황보택, 그 녀석도 나름 질긴 녀석일세.”
“뒤에서 수작도 많이 부리고?”
“……알고 있었나?”
“뭘 알아. 그런 녀석들이 다 뻔하지 뭐.”
자존심이 곧 자존감인 녀석들은 쌔고 쌨다.
심지어 가문마저 좋아 남에게 떠받들리는 생활을 한 녀석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낙제생이라 가문에서 버려졌던 녀석에게 사람들 앞에서 개무시를 당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근데.
“뭐, 지가 어쩔 건데?”
“음, 그것도 그렇긴 하군.”
이번 시험에서 수작을 부린다?
지도 바쁜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친다?
남궁천이 있는 지금 우리 둘을 잡으려면 웬만한 무력대(武力隊) 하나를 보내야 한다.
가문에서 아무리 우쭈쭈 하는 자식이라도 그 자식의 투정 하나로 무력대를 보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번 시험에선 수작질 불가능.
그렇다면 학관 내에선?
여기선 더 불가능이다.
뭐, 쓸 수 있는 수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명색이 패력(覇力) 단주(團主), 황보중의 자식이다.
어느 정도 선은 지킬 줄 알겠지.
황보택에 대한 걱정을 저 멀리 던져 버린 설천위는 짐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그럼 출발하자.”
“좋지.”
지옥의 달리기 시작이다.
* * *
“허억, 허억.”
“천위, 체력을 키울 필요가 있네.”
“이게 키운 거다. 이 재능충 새끼야.”
출발 닷새째.
남궁천의 속도에 맞춰 달리던 설천위는 결국 한계를 맞이했다.
물론 이것도 남궁천이 어느 정도 배려를 해서 따라올 수 있었던 거지만.
“음, 이러게 되면 2주를 꽉 채우겠구먼.”
“야, 못 해. 이게 한계야.”
“흠, 그럼 오늘은 조금 일찍 쉬도록 하지.”
“야 이씨, 해가 졌는데 무슨 일찍 쉬어?”
“어제는 더 늦게까지 달렸네. 천위.”
정말?
달리느라 그것도 몰랐네.
띠벌.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킨 설천위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땔감.”
“그럼 내가 식재료를 구해 오지.”
순식간에 숲으로 사라지는 남궁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땔감을 열심히 모았다.
어차피 근처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으면 되니 문제없지만.
호북성은 이미 거의 다 돌파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강서성이다.
문제는 돌아가야 한다는 거지만.
거기에 도착해서 임무 완료 지점까지 찾아야 하니 정말 2주가 빡빡하다.
뭐 빡빡한 이유는 도주 중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연출…….
[천위, 적이다.]
“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갑작스러운 천마의 경고에 품에 있던 땔감을 전부 던져 버린 설천위는 곧바로 움직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긴 하지만, 적당히 뛸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소리에 집중하며 천마의 안내대로 달린 설천위가 도착한 곳엔…….
“하압!”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궁천이 있었다.
딱 봐도 나 암살자요, 하는 놈들이랑 싸우고 있는 모습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
“천위! 그분의 보호를 맡기겠네!”
“어?”
이게 또 무슨 개소리…….
남궁천의 말에 재빨리 주위를 훑어본 설천위는 한쪽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여자.
외모는 상당히 예쁘다.
쓰는 무기는 도(刀)인가?
솔직히 말해 그다지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남궁천이 저리 날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살려면 호랑이의 등에 타는 수밖에.
[영각(靈覺)]
몸의 감각을 깨운 설천위가 단숨에 쇄도한다.
목표는 당연히 하나.
여자의 보호다.
“큭?!”
단숨에 끼어든 설천위의 등장에 암살자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렇게 긴 싸움으로 흘러간 것 자체가 이번 암살은 실패라고 증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해서든 빠르게 끝내고 빠지는 것이 필요한 시점.
문제는.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대체 왜……!’
어린놈 주제에 무지막지한 실력으로 부하들을 썰어 넘기고 있는 남궁천의 모습에 조장은 이를 악물었다.
거기에 일류 정도는 되어 보이는 놈까지.
시간을 더 끌면 필패다.
그렇기에 조장은 명령을 바꿨다.
목숨을 던지는 합동 공격.
상대의 검에 걸리는 녀석은 죽는 거고.
그렇게 검이 막힌 사이, 이쪽은 상대를 죽인다.
그렇게 뜻을 정한 암살자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순간.
“어허.”
[어허.]
그들의 목표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천하의 대도(大盜).
암영의적.
그는 피 터지게 싸워서 누군가를 지키지 않는다.
여자를 들쳐메고 단숨에 포위를 빠져나온 암영의적은 그대로 남궁천의 곁에 섰다.
“나는 계속 도망 다닐 테니 알아서 잘 막게.”
[나는 계속 도망 다닐 테니 알아서 잘 막게.]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반항은 하지 않는 여자를 어깨에 멘 채 설천위가 뛰어다니고.
거슬리는 점이 사라진 남궁천의 검은 거침없이 적을 베어 냈다.
그 결과.
‘도주한다!’
수신호로 신호를 보낸 조장은 그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암살자들.
네다섯 정도가 살아 도망치는 모습을 보던 남궁천은 검을 거뒀다.
“안 따라가냐?”
“무리네. 아무리 나라도 지친 상태로 훈련받은 암살자 전원을 처리할 순 없지.”
뭐, 그건 그렇긴 하지.
남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기지개를 켜며 어느새 기절한 여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얘는 어쩔 거냐?”
“음, 일단 상태를 보도록 하지. 마침 오늘은 이제 쉬려고 했으니.”
“이대로 안 도망치고?”
“저들도 전력을 가다듬어 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일단 휴식이 먼저네.”
하긴 어쩔 수 없나.
이쪽도 암영의적 아저씨가 몸을 막 굴려서 쓰러지기 직전이고.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어느새 여자를 챙긴 남궁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야영지.
뭐, 야영지라고 해 봤자 짐만 두고 떠났던 것뿐이지만.
오는 길에 던져 놨던 땔감들을 다시 주워 와 불을 피우고, 간단히 식사를 준비했다.
오늘 사냥은 실패했으니 미리 사 놨던 보존식이 저녁이다.
그렇게 육포와 곡물을 말려 뭉친 보존식을 먹는 사이.
“으음…….”
“오, 깼군.”
여자의 움직임에 남궁천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다행히 치명상까진 없었기에 정신을 차린 여자지만, 아무래도 후속 조치는 필요했다.
“간단히 응급처치는 해 놨으나 의원에게 보이지 않으면 몸이 상할 것이오.”
“…….”
그렇기에 물에 푼 곡물을 넘겨주는 남궁천의 말에 여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살폈다.
확실히 곳곳에 붕대가 감겨 있다.
“……소협들은 누구신가요?”
“음, 수행 중인 무림 초출이오.”
초출은 맞긴 하지.
초절정 초출이긴 하지만.
남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설천위는 이내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부탁드릴 상대가 소협들밖에 없습니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여인이 그것을 힘겹게 내밀었다.
문제는 그 상자에 새겨진 문양.
꽃이 달을 감싸고 있는 문양.
‘혈성지록(血聖之錄)?’
이 여자, 혈사련(血邪聯) 그 미친 것들이랑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