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39화-승급전 (8)
아직까진 혼자 힘으론 도망치는 게 한계.
남궁천과의 시합 초반.
설천위는 그 사실을 깨닫고 담담히 수용했다.
남궁천의 재능과 노력은 그만한 격차를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빙의를 발동시켰다.
대상은 암영의적.
그의 힘을 빌려 초절정의 영역에 한 발 걸쳐 남궁천에게 맞섰다.
그 결과는 아주 약소한 패배.
이유는.
[더럽게 튼튼한 놈이구나!]
투덜거리는 암영의적의 목소리대로, 남궁천의 단단한 수비 때문이다.
본래 전투를 배울 때 제대로 배운다면 방어를 먼저 배운다.
상대를 쓰러트린다고 해도 이쪽이 망가지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남궁천은 훌륭하게 전투를 배웠다.
단단하고 빈틈이 적은 방어 능력.
빙의로 온전한 능력을 전부 끌어내지 못하는 암영의적이 뚫을 수 있는 방어가 아니었다.
아마 생전의 전성기였어도 선배의 체면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가 한계였겠지.
너무도 괴물 같은 재능 앞에서 암영의적이 투덜거리는 사이, 설천위는 결국 마지막 선택지에 도달했다.
체력이 슬슬 바닥을 보인다.
반면, 남궁천은 튼튼한 기본기만큼이나 튼실한 체력 덕에 아직도 쌩쌩한 상태.
그렇다면 이쪽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아저씨.”
[준비됐다.]
현태중의 대답에 설천위는 곧바로 자리를 잡았다.
딱 한 번.
딱 한 번이다.
남궁천이 예상치 못한 속도에 경계심이 잔뜩 올라 몸을 숙이고 있는 지금.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최적의 거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습했던 거리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문 설천위가 검에 손을 올리는 순간.
암영의적이 빠져나가고, 현태중이 들어왔다.
“간다.”
[간다.]
나지막한 목소리.
담담하기 그지없는 한마디와 함께 설천위의 팔이 움직인다.
검을 뽑아 휘두른다.
그 단순한 동작을 위한 움직임에 남궁천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전력.
내공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검을 움직인다.
모든 것을 받아 내는 하늘을 빚어낸다.
부드러움의 이치를 담은 초식이 완벽한 수비를 만들어 낸다.
[구민(九旻)]
드높은 하늘은 무엇이든 담아내니.
그 하늘에 닿을 것 무엇이더냐.
창천이 자랑하는 방어가 남궁천을 지킨다.
그렇기에 남궁천은 안도했다.
늦지 않게 초식을 펼쳤으니까.
아니, 남궁천만이 아니었다.
경기를 보던 이들의 대부분이 그리 생각했다.
역시 남궁천, 훌륭한 반응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하늘이 갈라진다.
남궁천이 만들어 낸, 드높은 하늘이 수십 갈래로 쪼개져 흩어진다.
늦지 않게 펼쳤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이미 늦은 것이다.
어떤 발자취도 남기지 않는, 무흔(無痕)의 검.
그 시작은 설천위의 몸에 들어간 현태중이 검을 쥔 순간부터였다.
“커헉!”
강렬한 충격.
전신을 난자하는 참격의 충격에 남궁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단 일수(一手).
남궁천이 철백을 한 번의 초식만으로 제압했던 것처럼.
현태중의 검은 단 한 번의 초식만으로 남궁천을 제압해 냈다.
절정과 초절정의 차이보다, 초절정과 화경의 차이가 훨씬 더 크기에 생기는 격차.
강제로 초식을 파훼당한 충격에 남궁천의 무릎은 이미 땅에 닿아 있었다.
“급소는 잘 지켜 냈구나. 훌륭하다.”
[급소는 잘 지켜 냈구나. 훌륭하다.]
칭찬과 함께 현태중은 아직도 멍하니 있는 심판을 바라봤다.
“판결은?”
[판결은?]
“스, 승자! 설천위!”
설천위라는 거대한 지진이 무림학관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 * *
시합장 안의 모두가 엄청난 충격에 빠져 있는 그때.
“천아!”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남궁선이었다.
단숨에 뛰어오르려는 그를 팽후가 붙잡는다.
동시에, 경기장 곳곳에 있던 몇 사람들의 기세가 난폭하게 들끓는다.
이유는?
당연히 하나다.
저 검은 자신들에게조차 분명한 위협이 되는 흉기니까.
아니, 이게 정말 현실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넘어 상황을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을 뒤흔든다.
가능한 건가?
일류에 겨우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헤아리는 것조차 힘든 벽 너머의 공격을 재현해 내는 것이?
“저게, 저게 대체 뭐예요!”
자신을 붙잡은 팽후의 손을 뿌리친 남궁선의 눈이 불타오른다.
대답에 따라 아예 뒤집어서 엎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눈빛.
그 눈빛에 팽후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는 일일세.”
“그게 말이 돼요?”
“되지. 보게, 나만 해도 지금 엄청나게 놀라지 않았는가?”
솔직함이 묻어 있는 팽후의 목소리와 눈빛에 남궁선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다.
그렇다면.
“진짜 몰랐다고요? 저런 괴물을?”
“자네가 타인에게 괴물이라고 하니 참으로 어색하긴 하지만, 뭐 그렇다네.”
자기도 학생 때 저 정도는 해 놓고 남이 한다고 반칙이라니.
뻔뻔한 어른으로 자랐구나.
팽후의 눈빛에 살짝 이성을 되찾은 남궁선은 헛기침과 함께 다시 경기장을 바라봤다.
“스, 승자! 설천위!”
“아니, 근데 저 자식이……. 지긴 누가 져?”
승자 선언에 또다시 눈이 돌아가려는 남궁선을 붙잡은 팽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왜 남궁선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이해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 보였으니까.
“이 무룡투쟁이 결국 친선 대련의 연장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뭐가 됐든, 심판이 한 번 승리를 선언하면 번복은 없다.
그렇게 목숨 걸고 달려드는 대련이 아니니까.
설령 싸움이 길어지면 이길 수 있더라도 심판의 판단 아래 패배가 선언됐다면 패배다.
“검을 쥐는 것도 못 하는 상태인데, 그런 녀석한테 승리는 좀 아니잖아요?”
“심판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잘 숨기고 있으니 된 것 아닌가?”
“뭘 잘 숨겨요! 심판 눈이 옹이구멍인 거지!”
팽후의 대답에 남궁선은 미간을 찡그린 채 경기장을 바라봤다.
느긋한 걸음으로 시합장에서 내려가는 설천위.
그의 팔은 도저히 성한 상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자신의 경지와 육체를 초월한 검식을 무리하게 펼쳐 냈기 때문이겠지.
순식간에 대기실로 사라지는 설천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남궁선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이제 어찌할 거예요?”
“음.”
남궁선의 질문에 미간을 찡그린 팽후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쪽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찾아올 손님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아오! 더럽게 아프네……!”
[말했지 않았느냐. 남궁천을 꺾을 정도의 위력을 내면 네 몸이 망가진다고.]
“회복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서요!”
[이 정도면 일주일 열심히 치료하면 되지 않겠느냐?]
“아 놔!”
그게 감당이 되는 범위냐?
뻔뻔한 현태중의 대답에 설천위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연습 때는 조금 무리하면 된다며!
이제 조금이냐?
최선의 상태로 실전에서 쓰겠다고 연습해 보지 않은 내가 병X이지.
근육은 물론이고, 인대나 뼈까지 망가진 것 같은 오른팔의 상태에 설천위가 열심히 내공을 돌리는 순간.
“설 공자!”
누구보다 빠르게 도착한 유예린이 대기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팔을 잡고 살핀다.
[호오?]
그 모습에 감탄한 천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소적검에 눈이 멀어 그걸 어떻게 썼는지, 어디서 배웠는지를 꼬치꼬치 물어볼 터인데…….
[정말 참된 사랑이로구나.]
이렇게 뜨거운 처자가 이런 놈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라니.
이 세상의 손해로고…….
천마가 개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차는 사이, 설천위의 팔 상태를 확인한 유예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대체 대련 하나 이기겠다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
“제가 말했죠? 안위가 최우선이라고! 근데 이게 지금……!”
이를 악문 유예린은 일단 가지고 다니는 상비약을 꺼내 설천위의 팔에 바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골절의 통증을 줄여 주는 약이 있으니 일단 이거라도 응급처치를 해야지.
그렇게 유예린이 뼈가 부러져 잘못 자리 잡은 곳은 없는지 확인하며 약을 바르자, 설천위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진짜 더럽게 아프다!
“후, 다행히 뼈가 잘못 자리 잡은 곳은 없네요. 골절도 그렇게 심하지 않아요.”
[말하지 않았느냐.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고.]
저, 저 주둥이를 그냥…….
뻔뻔하게 대답하는 현태중의 모습에 치솟으려는 혈압을 유예린의 얼굴을 보고 겨우 가라앉힌 설천위는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약혼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래도 고맙다면 다음에…….”
“천위!”
유예린의 말을 끊고 거칠게 열리는 대기실 문.
거친 숨을 몰아쉬는 철백과 서하영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은 한숨과 함께 자리를 비켜 줬다.
“상태는 상당히 안 좋아요.”
“안 좋다 함은?”
“다음 경기는 무조건 기권해야 할 수준이죠.”
“음…….”
확신이 어린 유예린의 대답에 철백과 서하영의 시선이 설천위의 오른팔을 향했다.
붕대로 감긴 오른팔.
보니 중간중간에 무언가로 대놓은 흔적까지 있다.
골절이란 소리겠지.
“한 방 먹이려다가 큰 대가를 치뤘군.”
“하지만 먹였지.”
입꼬리를 비트는 설천위.
그 모습에 마주 웃는 철백.
“오우!”
“오우!”
두 사람의 팔이 허공에서 얽혀 교차한다.
“설철 크로스!”
“설철 크로스!”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죠?”
“몰라요. 가끔 저래요.”
어깨를 으쓱인 서하영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소저는 안 궁금하신가요?”
“뭐가 말이죠?”
“설 소협이 어떤 방법으로 싸웠는지요.”
서하영의 말에 유예린은 작게 웃으며 꺼내 놓은 약들을 정리했다.
“알려 줄 때가 되면 알려 주겠지요.”
“……그 전까지는요?”
“믿고 기다릴 뿐이죠?”
“장난 없네요. 언니.”
“예?”
“아,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서하영이 유예린의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에 감탄하는 그 순간.
“이거, 내가 그리 좋지 않은 순간에 온 건가?”
담담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대기실 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응급조치를 끝냈는지 붕대를 이리저리 감은 남궁천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벌써 오셨나요?”
“어, 누님이 바로 가 보라고 하던데……. 이유를 알겠네.”
설천위의 팔 상태를 확인한 남궁천은 웃으며 그에게 걸어갔다.
한 걸음 앞.
설천위의 앞에 멈춘 남궁천의 모습에 서하영이 긴장감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그 순간.
“남궁세가의 남궁천이라고 하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포권과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이는 정중한 인사에 설천위도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설가의 설천위야. 나도 잘 부탁해. 포권은 미안하네. 팔이 이래서.”
자신의 팔을 살짝 가리킨 설천위는 웃으며 멀쩡한 왼손을 내밀었다.
“전에는 나도 싸가지 없게 굴어서 미안했어. 그때 친해졌으면 이렇게 못 싸울 것 같았거든.”
“문제없네. 나도 덕분에 많은 걸 배웠으니.”
“아, 이거 악수. 서역의 인사라더라.”
“악수?”
설천위가 내민 왼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천은 이내 그 뜻을 깨닫고 마주 손을 내밀어 설천위의 손을 붙잡았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물론, 부탁하고 싶은 건 이쪽도 많다네.”
“아, 말은 그냥 편하게 해도 돼. 너, 그거 은근 어색하다.”
“그런가? 나름 위엄을 갖추려고 해도 안 되더군.”
누님의 영향인가?
피식 웃은 남궁천은 악수를 풀곤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떤 요술을 부렸는지 설명 좀 해 줄 수 있나?”
우리 누님이 궁금해 미치려 하거든.
나도 그렇고.
* * *
“……말도 안 된다.”
상위 등급이 머무는 숙소.
모두가 일인실을 쓰는 이곳에 자리 잡은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
설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설천위.
이를 악문 설천강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이 가능해지는 그나마 말이 되는 가능성.
“……아버지?”
아버지의 은밀한 지원.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
또, 우리를 버리고 그 아이입니까?
설천강의 눈동자 안에서 강렬한 시샘의 불꽃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