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37화-승급전 (6)
강함이란 무엇일까.
철백이 어린 시절부터 고민해 온, 그의 근본에 자리 잡은 의문이다.
의문의 시작은 하나였다.
폭력으로부터 지켜야 할 가족을 지키는 것.
어떻게 해야 그런 강함을 얻을 수 있을까.
내공을 익힐 순 없다.
지식을 쌓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머리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부모님이 남겨 주신, 튼튼한 육신 하나뿐.
동네 양아치들을 정리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공을 익힌 이류 무인을 만났을 때였다.
일방적인 패배.
상대의 팔을 부러트려 놓은 대신, 몇 주간은 움직이지 못할 중상을 입었다.
필요하다.
이 육체를 살릴 수 있는 배움이!
그렇게 이를 악물고 노력해 들어온 무림학관.
강대한 육체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잠깐.
금방 밑바닥으로 떨어져 배움의 기회조차 제대로 얻을 수 없게 됐다.
아니, 내공이 없다는 것은 배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철백은 설천위에게 감사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자신과 같이 바닥에서 이를 악물고 올라가는 동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와 함께한 수련은 자신에게도 아직 피워 내지 못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영력(靈力).
미약하지만, 단전이 없는 자신도 분명하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힘.
그래.
오만과 편견이었다.
왜, 굳이 단전이 필요한 것인가?
내 육체에는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이 있는데.
쉬지 않고 해 왔던 호흡법.
그로 인해 미세하게 근육에 축적되는 자연지기.
상처 입은 근육이 회복되는 과정에서도 자연지기는 근육에 스며들었다.
그걸 의도적으로 쌓고 의도적으로 움직인다.
천마에게 조언을 구해 만들어 낸, 오로지 철백 자신만을 위한 심법.
금강육골(金剛肉骨).
근육에 자연지기를 쌓을 수 있다면, 뼈에도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그 자체로 나는 강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근육.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금강의 뼈.
내 육체는 지킬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받아 내는 불패(不敗)의 벽이 되리라.
형형하게 빛나는 철백의 두 눈을 마주한 상대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아!!”
검이 튕겨져 나간다.
상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그저 전진해 온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 공포를 일으키는가는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하물며,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무시하며 끊임없이 공격해 온다면.
그 한 방, 한 방의 공격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고통스럽다면.
“승자! 철백!”
결국, 검을 놓고 주저앉은 상대의 모습에 심판이 승리를 선언했다.
경기장에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외공.
오로지 그것 하나만으로 일류 고수를 짓밟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동생아, 쟤가 네 다음 상대라고?”
“……제가 이기면 그렇게 되겠지요?”
“힘 조절 잘해라.”
물론, 힘을 너무 빼면 지는 건 동생이 되겠지만, 동생의 실력이라면 충분하겠지.
드물게 동생의 눈을 보지 않은 채 입을 연 남궁선은 철백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죽이면 내가 못 데려가니까.”
* * *
“야, 겁나 세다잉.”
“후, 성장의 증거지.”
대기실.
철백을 기다리던 설천위는 조금 전에 펼쳐진 경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더럽게 강해지긴 했어.
거기에, 방학 중에 겪었던 경험 덕인지 본래 가야 할 길도 더 빠르게 찾아냈고.
게임에서 철백이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지만 그 구동 원리는 모르니 섣불리 조언하기 힘들어서 답답했지.
덕분에 막혀 있던 게 하나 내려간 기분이다.
“그럼, 다음 상대는 남궁 소협인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철백의 담담한 대답에 서하영이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철백의 신체는 내공이 충분하면 자신의 창도 거의 견뎌 낸다.
정말 심혈을 기울인 일격이 아니면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기 힘들 정도.
하지만, 상대가 초절정에 오른 남궁천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의 검은 당연하다는 듯이 철백의 몸을 가를 테니까.
서하영의 시선에 담긴 걱정을 읽은 철백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살아서 내려올 테니까.”
“……너무 다치진 말아요.”
“그건 약속하기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아우! 정말!”
아주 그냥 X랄들이 났구나.
여기에 너희 둘만 있는 줄 아냐?
어느새 대화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버린 설천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으면 지는 거다.
[끌끌끌, 유예린 그 아이에게 가는 것이냐?]
“제가 걔한테 왜 가요?”
[눈에서 부러움이 그냥 차올라 넘치던데, 그럼 행선지가 정해져 있는 것 아니냐?]
“아이 씨, 예 맞아요~. 배알이 꼴려서 남궁천 걔한테 개 털어 달라고 부탁하러 갑니다. 예?”
재미있다는 듯 놀리는 천마를 향해 눼눼, 하며 방을 나온 설천위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순간.
“내 동생이 그런 부탁은 잘 안 들어주는 편인데?”
“……남궁선?”
“오, 나를 그냥 이름으로 부르다니 배짱 한번 좋은 녀석이구나?”
입꼬리를 비트는 남궁선의 모습에 설천위는 아차 했다.
“죄송합니다. 창천검(蒼天劍) 대협.”
“뭐, 됐다. 동생의 친구가 그 정도 실수는 할 수 있지. 다음부턴 누님을 붙이도록.”
아, 괜찮은 건가?
남궁선의 목소리에 포권을 풀고 고개를 든 설천위는 그제야 남궁선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170을 조금 넘기는 키.
또렷한 이목구비에 포니테일로 깔끔하게 묶은 머리를 한 시원한 느낌을 주는 미녀.
거기에 품이 넉넉한 푸른 무복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몸매까지.
허리춤에 찬 남궁세가의 보검, 창천검(蒼天劍)에 눈이 가는 게 가장 마지막이 되는, 압도적인 존재감의 여성.
이 무림을 나누고 있는 정파와 사파.
그중에서도 정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개의 단(團). 그중에서도 창천단(蒼天團)의 주인.
창천검(蒼天劍) 남궁선.
그리고 현존하는 몇 안 되는 무림학관의 갑(甲) 졸업생.
“너도 조금 흥미롭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아까 싸웠던 녀석인데.”
“철백 말씀입니까?”
“어, 둘이 절친이라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음……. 예.”
뭐, 아직도 둘이 꽁냥거리고 있진 않겠지.
슬슬 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을 시간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그대로 남궁선을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중간중간 남궁선을 알아본 이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뭐, 지들이 어쩔 건데?
“이야, 후배들이 나날이 나약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예?”
“그러니까 나 때보다 못한 것 같은데, 또 몇 놈을 잘한다 이 말이야.”
아, 라떼는?
이 누님도 꼰대구먼.
남궁선에 대한 판단을 빠르게 내린 설천위는 남궁선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대기실로 향했다.
“사실 동생한테 안내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걔가 다음 시합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관은?”
“아, 떼어 두고 왔지. 쓸데없는 소리나 할 게 뻔하니까.”
불쌍한 백윤철.
남궁선의 부관을 위해 가볍게 기도한 설천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침묵이 싫었는지 남궁선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너도 좀 흥미가 있거든?”
“저 말입니까?”
“응. 너, 왜 경지가 오락가락하냐?”
“재능이 워낙에 부족해서 있는 힘껏 쥐어짜면 조금 강해지는 것뿐입니다.”
“그 정도가 아닌 것 같던데?”
피식 웃은 남궁선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설천위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입니다.”
“오, 도착했어?”
하려던 말은 머릿속에서 치워 버린 남궁선은 설천위가 가리킨 문을 그대로 열었다.
그리고.
“……쟤들 사귀냐?”
“송구스럽게도 아직 아닙니다.”
“뭐 가문의 허락이라도 기다린대?”
“뭐, 그렇지 않을까요?”
철백은 몰라도 서하영은 나름 뿌리 있는 무가 출신인 것 같으니까.
아직도 서로 꽁냥꽁냥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는 남궁선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아, 이 누님 생각해 보니 아직도 솔로지.
이대로 가면 노처녀 확정…….
남궁선을 보며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너, 방금 상당히 해선 안 될 생각을 한 것 같다?”
“아, 아닌데요?”
“흐음?”
날카로운 남궁선의 눈빛을 받아넘긴 설천위는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백아! 손님 오셨다!”
* * *
“입단 권유라.”
무룡투쟁의 첫날이 끝난 저녁.
훈련장에 모인 세 사람은 가벼운 다과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일단 세 사람 다 첫날은 통과.
충격적인 일이 있다면, 남궁선의 입단 권유인가.
설천위와 함께 철백을 찾은 남궁선은 망설임 없이 철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과 함께하자고.
자신이 네 재능을 완전히 꽃피워 주겠다고.
자신감에 찬 그 대답에 철백도 살짝 당황했지만…….
“거절한 거 맞냐? 창천검, 그 양반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
현시대의 남궁세가 직계는 대체로 다 선인이다.
물론 가문이 워낙 크다 보니 내부에 더러운 놈들도 있지만, 남궁선과 남궁천은 확실하게 선인의 영역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남궁선의 밑으로 들어가면 솔직히 좋다.
설천위의 말에 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됐다. 가능성만 보고 뽑힐 순 없지.”
“그럼?”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가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들어가야지.”
하여튼 성격하고는.
당당하게 말하는 철백을 보며 피식 웃은 설천위는 그대로 찻잔을 내밀었다.
“그럼 제대로 해 보자고. 일단 내일 시합부터, 오키?”
“오키?”
“알겠냐고.”
“아, 물론이지. 오키!”
거, 배우는 거 빠르네.
피식 웃은 설천위를 보며 철백도 웃음을 터트리고, 서하영도 작게 웃으며 찻잔을 내밀었다.
“그럼 내일 제대로 간다!”
* * *
“시합은?”
“이제 막 시작해요.”
자신의 시합을 끝내고 대충 상처만 치료하고 자리에 앉은 설천위는 서하영의 말에 시합장을 바라봤다.
과연, 이제 올라왔는지 서로 포권으로 예를 표하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이번 상대는 아예 수비적으로 나와서 뚫는 데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상처도 꽤 얻었고.
뭐 회복이 있으니 금방 사라질 상처들이지만.
회복을 발동시키며 설천위는 시합에 집중했다.
뭐가 됐든, 이 시합만큼은 확실하게 두 눈에 새겨야…….
“음?”
순간,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대체 무슨?
[감이 상당히 좋아졌구나.]
그런 설천위의 반응을 칭찬하는 천마.
그의 시선은 시합장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안에 담긴 것은 감탄이었다.
[현세대의 남궁 가주가 참 뛰어난 인물이긴 하지만, 자식 농사도 이렇게 잘 지었을 줄이야.]
남궁선, 그 여아는 워낙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났으니 논외로 쳐야 한다.
하지만 저 아이는 다르다.
재능이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유예린 그 아이보다도 부족하다.
그런데 동렬에 올라섰다?
그걸 채울 수 있는 건 이것들뿐이다.
한결같은 노력.
지옥 같은 수련.
[창궁무애검이 하늘을 그려 내는 데 이르렀구나.]
유예린의 검이 은신(隱身)의 이치를 담아냈듯.
남궁천의 검은 창천(蒼天)의 이치를 담아냈다.
“크하아아압!!”
이를 악물고 돌진하는 철백의 발이 평소보다 미묘하게 무겁다.
거대한 하늘을 담은 중검이 뿜어내는 압박감.
절대의 벽을 꿈꾸는 육체는 아직 미완.
하늘 아래, 결국 짓눌리고 풍화되어 사라지는 폐허가 된다.
앞으로 돌진해 남궁천의 검을 두 팔로 막아 낸 철백.
허나, 그 검은 압도적인 무게를 바탕으로 철백의 팔을 조금씩 베어 내며 그 무릎을 땅과 가까워지게 한다.
그리고.
[상성이 참 좋지 않구나.]
천마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철백의 무릎이 땅에 닿는다.
미완의 벽이 드넓은 하늘에 무너진 순간.
그의 목에 드리워진 검에 심판이 승자를 외친다.
“승자! 남궁천!”
승자 선언.
그리고 그 선언과 함께 경기장을 둘러보던 남궁천의 시선이 한 곳에 꽂힌다.
호승심이 불타오르는 뜨거운 시선.
그 시선을 마주한 설천위는 여유롭게 한 번 웃은 뒤 그를 마주했다.
저 괴물 새끼, 어떻게 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