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35화-승급전 (4)
“……누구냐고?”
설천위의 질문에 이를 악문 규도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복수를 위해 갈고닦은 시간이 얼만데!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계급(癸級)에게 박치기로 기절 당했다는 오명의 시간이 그 얼마나 길고 어두웠던가!
이번 방학에 가문에 들어가 그 얼마나 뼈를 깎는 수행을 했던가!
“놈! 내 검으로 정의를 보여 주마!”
분노와 함께 검을 뽑은 규도를 보여 설천위는 삐딱하게 서서 그를 바라봤다.
“아니, 네가 먼저 시비 걸어서 진 거면서 왜 화를 내냐.”
뻔뻔한 놈일세.
이를 악물고 검을 드는 규도를 보며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옆에 서 있는 심판을 바라봤다.
저놈도 나름대로 이성은 남아 있는지 시작 신호 전에 공격은 안 하고 있으니까.
설천위의 시선을 눈치챈 심판을 맡은 교관, 청성은 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
그리고 단숨에 떨어지는 손과 함께 규도가 땅을 박찬다.
성장이 느껴지는, 빠른 속도.
이류라고 하기엔 훌륭한 그 속도에 청성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런 발전이야말로 젊은이의 특권이지.
자, 그럼 어떻게 나올 것이냐?
생각보다 빠른 규도의 공격에 청성은 이번엔 설천위를 바라봤다.
학관에 몰아치는 폭풍의 중심.
몇 년에 한 번씩 나오는, 계(癸)의 이단아들.
그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던가.
몇몇 교관들은 수치라고 싫어하지만, 자신은 좋아했다.
젊은이가 낙제생이라는 낙인을 딛고 일어서는, 그 성장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사파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지금, 이런 학생의 성장이야말로 이 무림의 미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학생의 변화는 참으로 기대가…….
기대를 담은 청성의 눈동자가 일순 크게 떠진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설천위의 눈이 똑바로 검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
이건 참 훌륭하다.
상대의 공격을 똑바로 보는 건 무인의 기본이지만, 검이라는 날붙이는 생각보다 더 큰 공포를 자아낸다.
가문에서 외면당해 제대로 된 수련을 못 받은 설천위가 저렇게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어떤 혹독한 수련을 했을까.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한 성장이다.
거기에 하나 더 청성이 놀란 이유.
설천위의 주먹이 이미 규도의 턱에 닿아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신이 아주 잠깐.
잡생각에 빠져 있던 그 찰나의 순간.
설천위의 주먹이 시작에서 끝에 도달했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
‘일류?’
고작 이류 정도의 능력으로 자신의 동력(瞳力)을 뛰어넘을 순 없다.
최소 일류.
그것도 속도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면 힘들다.
그렇기에, 이류 수준의 규도는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아니, 인지한 순간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무, 슨…….”
순식간에 품으로 파고든 설천위의 주먹에 규도의 턱이 돌아간다.
몸의 제어권을 날려 버리는, 인내가 불가능한 공격.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규도를 보며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쉑히야.”
내가 잊겠냐?
나 그런 사람 아니다.
호쾌하게 과거를 털어 내는 성격이 아니라, 이 말이야.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로 무릎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규도의 복부로 설천위의 주먹이 박힌다.
속도를 더해 위력을 만들어 낸 일권(一拳).
“커헉!”
뇌가 흔들려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맞은 복부.
근육의 긴장으로 방어해 내지 못한 상태에서 꽂힌 고통은 뇌리로 깊숙이 파고든다.
의식을 잃을 정도의 강렬한 고통은 아니지만, 몸을 비틀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몰려온다.
무릎과 더해 꺾이는 허리.
허나, 쓰러지지 않는다.
의지가 육체조차 초월해서?
아니다.
규도의 분노는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다.
쓰러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설천위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내지르는 주먹이 턱을 쳐올린다.
그리고 좌우.
[섬벽권(閃霹拳)]의 묘리만을 담은, 빠른 주먹질이 규도를 두드린다.
그렇게 잠깐.
일방적인 폭력에 완전히 힘이 풀린 규도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려는 순간.
“승자! 설천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청성이 설천위의 승리를 선언했다.
“감사합니다.”
청성의 심판에 포권으로 예를 표한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물러났다.
그의 주먹이 끈적한 피로 물들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담담한 퇴장.
허나, 청성은 그 뒷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어느새 기절해 버린 규도를 보던 청성은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성장에 개입이 조금 늦어졌다.
덕분에 말도 못 할 몰골이 되어 버렸으니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그의 손짓에 연무장 위로 올라온 이들이 규도를 데리고 떠나는 것을 보며 청성은 작게 웃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새로운 신성의 등장을 예고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 * *
[깔끔하게 이겼구나.]
“그러게요.”
뭐 예선 통과니까 좋아할 것도 없긴 하지만.
이번에 무룡투쟁에 출전하는 인원은 총 60명.
당연히 반 정도를 걸러 내기 위한 예선전이 펼쳐지고 있다.
부전승을 포함해 남기는 인원은 32명.
이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경기장에서 관전자를 데리고 경기가 치러진다.
32강부터 본선이라 할 수 있지.
애초에 학생들의 성장을 위한 행사다.
눈으로 봐서 배우는 게 있는 만큼, 제대로 된 경기는 전부 공개된 곳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번에도 궁금해서 찾아온 학생들이 아예 없진 않지만.
[그나저나 다른 애들의 경기는 보러 가느냐?]
“음, 그래야겠죠?”
딱히 할 것도 없고.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는 긴장한 친구들이 많으니 공기라도 좀 쐬다가 들어가야지.
그렇게 밖으로 나온 설천위는 대충 자리를 찾아 기마 자세를 취했다.
[음. 훌륭하구나.]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암, 그것이 무(武)의 기본이니라. 덕분에 보통의 공격에 섬벽권(閃霹拳)의 묘리를 담는 것도 꽤나 능숙해졌으니.]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는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거, 그 보법이 너무 어려운 거라고요.
[섬벽권(閃霹拳)]은 中上(중상)인데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는 上下(상하)고.
그 차이가 얼마나 큰데.
그나저나.
“역시 조금 더 강한 것 같단 말이지.”
[뭐가 말이냐?]
“현태중 아저씨를 거둔 뒤에 묘하게 신체 능력이 좋아진 것 같아서요.”
이게 조금 묘하단 말이지.
스탯창에 표기되는 것보다 조금 더 강한 느낌이긴 한데, 기준점이 확실하질 않으니 확신이 안 선다.
특히 근력은 아직도 下中(하중)에 머물러 있는데, 다른 스탯을 못 따라갈 정도로 부족하단 느낌은 안 든단 말이지.
근력도 상승 직전이라서 그런가?
설천위가 고민하는 그 순간, 천마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화경 정도 되면 그것이 체감될 정도인가 보구나.]
“……예?”
[네가 익힌 [혼원패공(魂元覇功)]이 으뜸인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처음 듣는 소린데?
설천위의 눈빛이 가늘어지자 천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해 주지 않았느냐? 네가 혼을 거두면 그 혼의 힘이 평상시에도 어느 정도 네게 영향을 끼친다고.]
“안 했는데요.”
[늙으니 까먹는 게 많아졌구나.]
이럴 때만 늙었지.
천마의 뻔뻔한 표정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다시 몸 상태에 집중했다.
뭐, 이제 알게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냐.
암영의적을 거뒀을 때보다 현태중을 거뒀을 때 더 확실한 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생전의 강함에 따라 그 영향이 다르리란 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혼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거를 필요가 있다.
최대 숫자를 모르는 상태에서 막 받았다가는 나중에 아쉬운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뭐, 일단은 수련이나 해야지.
화경급 혼이라는 게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충 생각을 정리한 설천위가 다시 기마 자세에 집중하려는 순간.
“천위!”
“뭐야? 언제 왔어?”
“후딱 갔다 와서 빨리 한 경기 치르고 왔지.”
“서 소저는?”
“음…….”
서하영을 찾는 질문에 잠시 말을 멈췄던 철백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자세한 건 경기를 보면서 말하자고. 서 매의 경기도 그리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
“벌써?”
“길게 이어질 이유가 어디 있겠나?”
하긴 진검을 들고 나오는 대회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박 터지게 싸우는 진흙탕 싸움까진 안 갈 테지.
그걸 막으려고 심판들도 있고.
어차피 점수 때문에 하는 거니 목숨 걸고 싸우는 녀석들도 없을 테고, 적당히 중재해서 빠르게 끝낼 가능성도 있다.
오늘 안에 예선을 끝낸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거의 끝에 잡힌 서하영의 경기가 얼마 안 남았을 정도면 확실히 빠르긴 하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철백의 뒤를 따라 다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 펼쳐지는 전투는 꽤나 호쾌하게 지나갔다.
경기에 나오는 녀석들의 실력은 대부분 일류 아니면 이류다.
일류들은 본선을 노리고.
이류는 적당히 이겨서 점수를 노리고.
절정 이상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정말 강한 몇 명은 위에서부터 잘라서 부전승으로 올라갔으니까.
그래서 아쉽게도 남궁천의 경기는 볼 수 없었다.
그 녀석은 부전승 1순위니까.
뭐, 왠지 모르겠지만 구경도 하러 안 왔고.
약한 녀석들 정보를 얻을 시간에 수련에 힘쓰는 게 낫다는 입장인가?
뭐 그럴 만한 실력이긴 한데.
남궁천을 잠깐 떠올리던 설천위는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냈다.
서하영이, 드디어 연무장 위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호오? 대단하구나!]
천마의 감탄.
[음, 훌륭하군.]
거기에 현태중의 칭찬.
암영의적은 놀랐는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혼들의 반응을 본 철백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들 한 번에 눈치채시는군요.”
한 번에 눈치챘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야.
이건 아니지.
아니, 아무리 재능의 격차라는 게 있지만 이건 아니잖아!
설천위의 눈이 창을 든 채 당당히 서 있는 서하영을 응시한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기세.
심판조차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상대만이 계(癸)라는 그녀의 등급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뿐.
“시작!”
심판의 신호와 함께 상대는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창은 자고로 긴 길이를 장점으로 삼는 무기다.
검을 들고 상대해야 한다면 접근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다.
창은 제대로 휘두를 수 없지만 검은 휘두를 수 있는 거리까지.
그 거리를 노리고 달리면서도 긴장을 늦추진 않는다.
계(癸)라곤 해도 무룡투쟁에 출전권을 얻었다면 최소 이류 이상일 테니까.
혹시 모를 견제에 대비하여 검을 앞으로 내밀고 달리고 있던 그 순간.
“어?”
무언가 싸늘한 감각과 함께 발이 멈춘다.
검이…… 어디 갔지?
짧은 의문.
손을 바라보니 검을 쥐곤 있다.
그렇다면 검이 시야에서 사라진 이유는 하나.
반 토막 난 검신을 바라보던 상대의 몸이 천천히 무너진다.
무릎이 땅에 닿는 그 순간.
촤악!
몸 곳곳에 난 상처에서 일순 핏줄기가 터져 나온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베어 냈기에, 베였음에도 잠깐 붙어 있던 피부 밑으로 피가 몰려 일순 터져 나온 것이다.
[풍영류창(風泳流槍) 제3초 삭풍(朔風)]
북쪽에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처럼.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창에 북풍의 날카로움이 깃들었다.
[변화에 속도를 더할 수 있게 됐구나.]
천마의 짧은 평에 설천위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정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뭔데, 벌써 절정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