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33화-승급전 (2)
“설 공자!”
개학식이 끝나고, 지루한 팽후의 연설에 깜박 졸았던 설천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왜?”
“어머? 오랜만에 보는데, 반응이 조금 심심하네요?”
“난 늘 한결같이 네 생각만 해서 언제나 곁에 있는 것 같거든.”
“워우.”
[오호, 조금 치는구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멍했던 정신이 철백과 천마의 목소리에 완전히 깨어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린 순간.
“후후, 그러면 다행이네요.”
나지막한 유예린의 웃음에 설천위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흑역사를 추가할 순 없지.
무언으로 일관하는 설천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웃던 유예린은 이내 고개를 돌려 철백을 바라봤다.
“철 소협도 오랜만에 봬요.”
“음, 오랜만일세. 유 소저. 듣자 하니 본가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예, 조금 처리할 일이 몇 가지 있었거든요.”
철백의 질문에 유예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처리할 일 중 하나가 뭔지 대충 짐작이 간 설천위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아따, 섬서유가(陝西妞家) 더럽게 무섭구나.
누가 살업(殺業)을 뿌리에 두고 성장한 가문 아니랄까 봐.
이런 가문이 어떻게 정파에 발붙이고 있는 걸까.
“그런데……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지셨네요?”
“조금의 성취가 있었소.”
“조금이라고 하기엔…….”
잠시 철백을 살피던 유예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축하드려요.”
“고맙소.”
“왠지 설 공자의 분위기도 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야기를 조금 들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응? 지금?”
“예. 지금이요.”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유예린이 설천위를 바라봤다.
“서 소저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상처에 좋은 찻잎을 가져왔어요.”
“찻잎?”
“예. 그러니 얘기할 시간은 충분할 거예요.”
부드러운 미소.
그 미소에서 귀찮아짐을 직감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이럴 땐 포기하는 게 빠른 법이지.
* * *
“어머!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서하영의 병실.
팽후의 배려로 얻은 병실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다인실이긴 하지만, 마침 방학 중이라 입실해 있는 건 서하영뿐이고.
덕분에 유예린의 등장에도 별다른 민폐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병(丙) 등급의 유예린은 이 학관 내에선 거의 절대자의 위치에 있으니까.
가문도 가문이고.
보통이라면 부담을 안 가지기가 힘들 정도로 하늘 위에 있는 사람이다.
뭐, 서하영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지 신나게 떠들고 있지만.
설천위와 철백은 가끔 대답 정도만 하고 있고, 대화는 주로 서하영과 유예린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벌써 일류의 끝자락이라니.”
“헤헤, 운이 좋았지요.”
“운도 재능이지요. 재능을 타고나는 것도 운이니까요.”
[껄껄, 그럼 네 녀석은 운이 정말로 없는 녀석이구나!]
[전생에 큰 죄를 진 게지.]
뭐라는 거야.
유예린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놀리는 암영의적과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운이 없기는 누가 없어?
나 이래 봬도 영적인 재능 하나만큼은 걸출하거든.
설천위의 눈빛을 읽은 천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봤다.
[네 약혼자나 저 아이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재능은 아니지 않으냐?]
그건 쟤들이 너무 반칙인 거지.
“그런데, 그럼 무룡투쟁에 나가시나요?”
천마의 놀림을 무시로 일관하던 설천위는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유예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가래. 학관장이 직접 전해 줬어.”
“그거 잘됐네요. 서 소저가 그렇게 허름한 건물에서 머무는 게 많이 안쓰러웠거든요.”
“헤헤, 그래도 나름 살 만했어요!”
참 긍정적이구나.
게임에서 봤던 창절은 상당히 딱딱한 성격이었는데.
사람이 어떤 일을 겪으면 그렇게 변하냐.
“그나저나 그러면 준비는 시작하셨나요?”
“준비?”
“예. 무룡투쟁의 출전을 결심하면 보통은 그 전 학기부터 준비를 시작하거든요.”
“준비랄 게 따로 있나? 그냥 수련하던 대로 해서 싸우면 되지.”
애초에 우리는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들은 거라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심드렁한 설천위의 태도에 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상대를 알고 싸우는 것과 모르고 싸우는 건 차이가 크니까요.”
“그렇긴 한데…….”
여기에 영상 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만 듣고 상상해서 잘못된 이미지를 만드느니 걍 백지에서 하는 게 낫지 않나?
설천위의 심드렁한 태도에 철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상대를 파악할 수 없다면 아예 백지가 나을 수도 있지.”
“그렇지?”
철백과 설천위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武)에 있어서 정보는 곧 힘이에요.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으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도와준다고?”
“예.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방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유예린.
참으로 보기 좋은 미소인데…….
왜 싸늘한 걸까?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주일이라는 수업 선택 기간을 지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설천위가 이번에 신청한 수업은 네 가지.
기초 추종술, 기초 생존술, 기초 무기술, 기초 의학.
이 네 가지다.
전부 교양이라 부르는, 비전문 과목들.
실질적인 무공 강의인 전문 과목들보단 무시당하는 경향이 큰 수업들이다.
그래서 애초에 듣는 사람도 많이 없다.
당연히 편히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흐음?”
[뭐 잘못한 것 있느냐?]
기초 생존술 수업 시간.
한쪽에서 설천위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에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녀석, 유예린이란 아이도 그렇고 생각보다 그쪽으로 능력이 뛰어난 것 같던데 혹시?
[과거에 정분이 났던 여아라던가…….]
“뭐래요. 제 나이 기억 안 나요?”
다 늙어서 왜 또 주책이야.
천마의 헛소리를 작은 목소리로 받아친 설천위는 여전히 이어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여자의 정체?
이미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있나.
유예린이 친동생처럼 아끼는 홍유화다.
현재 등급이 뭔진 모르겠지만 게임 중반에 불리는 별호는 알고 있다.
홍화(紅花).
붉은 꽃.
참고로 이건 정파인들이 앞에서 불러 주는 별호.
사파인들이 뒤에서 부르는 별호는 이거다.
혈귀화(血鬼花).
꽃은 그냥 맞추려고 붙인 거고, 본질은 앞의 두 글자다.
피에 미친 귀신.
상대를 결코 살려 보내지 않는, 잔혹한 살검(殺劍).
듣자 하니 가문도 적당한 중소 가문이라던데 나중엔 초절정까지 오르는 걸로 기억한다.
거기에 항상 유예린의 곁을 따라다니는, 정말 충신 중 충신이다.
심지어 유예린이 타락했을 때도 곁에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유예린 일편단심의 캐릭터라서…….
“저기요.”
“……왜요?”
설천위를 별로 안 좋아한다.
쥐뿔 가진 것도 없는 게 사랑하는 언니의 혼삿길을 틀어막고 있는 거로 보이겠지.
유예린한테 접근하는 남자들이 좀 괜찮나?
가문이면 가문,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어디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남자들을 설천위 하나가 전부 막아 내고 있으니 짜증 날 법도 하지.
그래서 설천위는 조심스럽게 나가기로 했다.
홍유화가 네임드급의 재능을 가진 괴물은 아니어도 솔직히 능력이 있는 편인 건 맞으니까.
이쪽의 모든 걸 드러내 싸우지 않으면 필패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 싸우는 게 최선이지.
거기에다 유예린이 아끼는 동생이니, 괜히 쓸데없이 문제를 만들어서 좋을 게 없다.
“최근 언니의, 그러니까 은검(隱劍) 유 소저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거든요.”
“……그래서요?”
“그거 그쪽 때문이죠?”
“……맞다면요?”
설천위의 굼뜬 대답에 그의 앞에 앉은 홍유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약혼자라지만 너무 빠른 건 지양하시죠?”
“빠르긴 뭐가 빨라요?”
“남녀가 둘이서 할 수 있는 거 뻔하죠.”
뭐냐, 왜 눈에 경멸의 빛이 들어 있냐.
이거 겁나 억울하네.
홍유화의 눈을 마주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무룡투쟁의 출전이 결정돼서 유 매, 아니 유 소저가 도와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예?”
뭐야, 뭐에서 놀란 건데.
눈을 동그랗게 뜨는 홍유화의 모습에 설천위는 찝찝함을 안고 그녀를 바라봤다.
유 매라고 부른 거?
그게 문제인가?
아니, 습관이 무섭…….
“무룡투쟁이요? 계급(癸級)인데?”
아, 그쪽?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니까요.”
“흐음?”
살짝 믿기 힘들다는 듯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보던 홍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상당히 기세가 좋아졌네.
이 정도면 정말 나갈 만하겠는데?
“잘됐네요. 언니의 약혼자가 계(癸)라는 게 항상 불만이었거든요.”
“……그거 죄송하게 됐네요.”
이 싸가지 없는 게 왜 시비야?
허나 참아야 한다.
……싸우면 지니까 참는 건 아니고, 다 유예린을 생각해서 참는 거다.
암.
내가 얘랑 싸우면 중간에 있는 유예린이 불편해지잖아?
그렇게 설천위가 스스로의 인내를 합리화하며 홍유화를 애써 무시하는 순간.
“무룡투쟁? 이거 재미있는 얘기네.”
누군가가 설천위를 향해 다가왔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긴 표정.
그 얼굴을 확인한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누구냐?”
“뭐?”
“누구냐고.”
어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엑스트라가 껄렁하게 시비를 털어.
“시비를 털어도 자기소개부터 해라. 구경꾼들이 재미없어하니까.”
“……이 새끼 봐라?”
홍유화를 대할 때랑은 전혀 다른 태도.
그 태도에 헛웃음을 흘린 남자, 황보택은 그를 노려봤다.
“약혼자 믿고 나대는 것 같은데, 우리 황보세가에도 그 계집의 힘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뭐? 계집?”
황보택의 도발에 설천위보다 빠르게 반응한 홍유화가 일어서려는 그 순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설천위가 황보택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조금만 호흡이 흐트러져도 주먹이 나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
“이래서 찌질이들은 안 돼. 뭐만 하면 가문부터 들먹이고 말이야.”
“네놈…….”
“야, 가문 너만 좋냐? 나도 좋아.”
호남설가(湖南雪家).
신흥삼가(新興三家) 중 하나인, 호남의 패자(霸者).
장강수로십팔채를 필두로 사파가 득세하는 호남을 정리한 정파의 거석(巨石).
그 가문의 권세는 아직도 호남에서 사파들을 짓누르고 있는 현역이다.
세간에서 설천위를 평가할 때 가문에선 반쯤 버려진 거라고 생각해 의식하지 않지만, 설천위도 가문으론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꼽냐? 꼬우면 알지? 덤벼. 가문 들먹이는 건 그만하고. 시비를 털어도 자기 실력으로 털어야지.”
“이 새끼가…….”
수업 시작 전.
당연히 시비를 털긴 했지만, 애초에 싸울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겁만 주고 말려고 했는데…….
노골적인 설천위의 도발에 황보택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
설천위도 내공을 움직였다.
뭐가 됐든 선빵 필승.
비무로 끌고 가지 못한 건 아쉽지만, 저쪽에서 먼저 약혼자를 모욕했으니 명분은 이쪽에 있다.
유예린을 걸고넘어진 이상, 주도권은 이쪽에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 일단 한 방 먹이고 생각…….
“하하하! 혈기 넘치는 친구들이군!”
순간.
어깨에 올라온 단단한 팔에 설천위와 황보택 모두 공격을 멈췄다.
이유는 하나다.
대체 언제?
어떻게?
두 사람이 고개를 틀자, 호쾌한 미소를 지은 호남이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수업 시작 전에 싸움은 좋지 않지. 어차피 무룡투쟁에 나가면 3주 후에 싸울 것인데 벌써부터 힘 뺄 필요는 없지 않나, 친구들?”
기세만으로 두 사람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실력.
검에 새겨진 창천(蒼天)이라는 두 글자.
검룡(劍龍) 남궁천.
유예린과 같은 병(丙) 등급의 괴물.
아니, 이런 수업에 이런 녀석이 대체 왜……?
설천위가 어이없어하는 그 순간.
“이번 무룡투쟁엔 나도 나가니 셋이서 자웅을 겨루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야 씨, 그건 반칙이지!
네가 거길 왜 나와!
[껄껄, 4강 쉽지 않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