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29화-악령 퇴치 (5)
여태까지와는 명확히 다른 모습.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붉은 기류는 어느새 혼탁한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무언가에 오염된 듯한 모습.
거기에 이전과 차원이 다른 살기는 지금부터의 싸움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싸움이 되리란 걸 확실하게 알려 줬다.
“철백!”
“오냐!”
허나 망설이지 않는다.
설천위의 부름에 단숨에 그 앞으로 끼어든 철백은 전신의 근육을 조였다.
강철(鋼鐵).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을 최강의 방패가 되리라.
강렬한 의지를 품고 그 의지를 육체가 구현해 낸다.
쾅!!
무언가 터지는 강렬한 폭음과 함께 설천위는 땅을 박찼다.
충격 때문에?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움직여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현태중을 향해 달린다.
그의 지척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초 남짓.
주먹을 들이미는 그의 반대편에선 서하영이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목표는 하나.
“가라!!”
철백에게 검을 붙잡힌 현태중의 빈틈!
서하영의 창이 먼저 급소를 노리며 파고든다.
당연히 그에 반응한 현태중은 검을 회수하고자 했다.
“안 된다.”
허나 움직이지 않는다.
내공 없이 인간의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린 강철의 사내가 움켜쥔 검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빼려면, 전력을 다해 이 사내를 베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미 늦겠지.
입꼬리를 비튼 철백을 잠시 바라보던 현태중은 결국 검을 놓았다.
검을 놓음과 동시에 그의 손은 서하영의 창을 받아 낸다.
그 난이도는 당연히 검을 쥐고 있을 때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애초에 그가 서하영의 창을 굳이 검으로 쳐 냈던 이유가 뭔가.
내공과 영력을 동시에 다루는 그녀의 창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걸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쳐 내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허나, 선택이란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법.
파고드는 창을 현태중의 손이 휘감는다.
아무리 검을 주로 하는 무인이라고 하지만 고작해야 이런 꼬맹이에게 밀릴 정도로 적수공권이 약하지는 않다.
손등으로 날의 방향을 틀고, 그대로 파고들어 창을 틀어쥔다.
육체는 없더라도 실체는 있다.
그 힘은 영력에 비례해 강해지기에, 현태중이라는 혼의 악력은 서하영을 능가했다.
단숨에 창을 단단히 붙잡은 현태중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창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공격.
주먹.
현태중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까지 몸을 낮춰 파고든 설천위를 내려본다.
이제 이 공격만 막으면…….
[훌륭하구나.]
암영의적이란 혼의 칭찬과 함께, 가볍게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순간.
[네놈…….]
설천위가 무엇을 했는지 현태중은 깨달았다.
애초에 설천위는 이쪽의 급소를 노릴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렇기에, 훨씬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한 개째.”
설천위의 손에 들린, 반 토막 난 검신을 보며 현태중의 눈이 붉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도 더욱 짙어진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의 몸에 박혀 있는 검신들은 적들의 절망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절망한 이들이 찔러 넣은 최후의 발악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복수의 증거이고.
[잘못된 선택이다.]
아직도 복수를 마치지 못한 자신을 향한 증오이다.
스산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강렬한 충격이 설천위를 덮친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철백 또한 검을 놓치고 몇 걸음이나 물러난 상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혼이 되고 나서 오히려 더욱 성장한 부분도 있구나.]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 천마의 목소리가 전장의 혈기를 잠재웠다.
[죽고 나서 의(意)가 더욱 강해졌어.]
[네 녀석이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껄껄, 후배의 성장은 언제나 기쁜 법이지. 뭐, 죽은 몸인지라 별 소용은 없겠지만 말이네.]
현태중의 날카로운 시선을 웃으며 받아넘긴 천마는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통찰력 하나는 역시 훌륭하구나.]
아주 제대로 짚었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정답을 찾아낸 설천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武)에 대한 재능 빼곤 전부 다 가진 아이답다.
[그러면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네.]
[……꺼져라.]
[껄껄, 그럼 다음에 봄세.]
대충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한 철백과 서하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 의미를 알 수 없는 공격에 약간의 내상을 입긴 했지만, 거동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빠져나가고, 천천히 일어나 엉덩이를 턴 설천위는 손에 있던 검신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씁, 세이브 기능은 없나 보구먼.”
당연히 현태중의 몸을 살핀 설천위는 자신이 뽑았던 부위에서 천천히 재생을 시작한 검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루에 한두 개씩 꾸준히 빼낼 수만 있었다면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 텐데.
아쉽구먼.
그나저나 이 방법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네.
‘무려 천마 할배가 보증해 줬으니까.’
게임에서 했던 방법과 달라 조금 불안했는데, 이 정도면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인가.
“그럼 내일 보자고, 형씨.”
[빨리 꺼져라.]
거, 까칠하기는.
* * *
“도르마무!”
“도르마무!”
“……넌 왜 따라 하냐?”
“왠지 재미있어 보여서 따라 해 봤다.”
“도르마무!”
“어쭈?”
철백에 이어 서하영까지 따라 하는 것을 본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당당하게 걸었다.
“뭐,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애송이들이.]
처음 검신을 뽑고 나서 열흘째.
이제 방학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설천위와 친구들은 전날 4개의 검신을 남기고 패배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
[너를 제외한 두 사람의 성장 속도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나.]
“……거, 섭섭하게 왜 그래요?”
암영의적의 칭찬에 설천위는 입술을 삐쭉였다.
아니, 하는 김에 나도 껴 주면 뭐 큰일 나나?
저 녀석들이 성장을 엄청나게 빨리하고 있는 건 맞지만, 나도 나름 잘 성장하고 있거든요?
이번엔 제대로 된 한 방도 준비했거든요?
뭐, 철백이나 서하영이 천마 할배에게 배운 무공을 겁나 빨리 빨아들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오! 나는 왜 설천위인가.
비정한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설천위가 자아 성찰에 빠지려는 순간, 철백이 그의 어깨를 쳤다.
“시작하자!”
“……그래야지.”
쉑히, 타이밍 좋기는.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정면에서 대놓고 자세를 잡는 설천위의 앞으로 철백과 서하영이 나선다.
“하압!”
[정말 괴물 같은 재능이구나!]
단숨에 돌진하는 서하영의 창을 입꼬리를 비튼 현태중이 받아 낸다.
적이란 것을 잊으면 정말 지켜보는 보람이 있는 아이들이다.
가진 내공의 한계 때문에 벽을 뚫진 못하고 있지만, 어느새 일류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서하영.
내공조차 없는 몸으로 그런 서하영의 움직임에 맞춰 줄 수 있는 철백.
다만, 이 녀석의 경우 지금은 영력으로 싸우고 있어 큰 문제가 없지만 아마 무인들과 싸우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진 못하겠지.
인간에게도 확실하게 통하는 힘을 찾아내는 것이 이 녀석의 과제일 터.
요 며칠간 싸우면서 이름까지 알아 버린 아이들을 보며 현태중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있는 녀석들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신이 빠지며 정신이 상당히 맑아졌다.
막아 놨던 둑의 문을 열면 한순간 물이 넘쳐나지만, 빠져나간 만큼의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가, 조금씩 원래의 자신을 되찾아 주고 있었다.
허나.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원래의 자신이 된다고 한들,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심장이 차가워질수록.
깊은 곳에 자리한 증오를 더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이 살기를 품고 번들거린다.
이 이상의 정(情)은 자신에겐 사치다.
후학의 성장에 기뻐하는 마음은 자신에겐 죄악이다.
짓밟고 나아가리라.
이 아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대업을 이뤄 내리라.
그 괴물 같은 영감의 방해?
할 테면 해 봐라.
그 끝에 파멸만이 있을지라도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성이 돌아오면, 각오 또한 선명해지는 법.
완전히 변한 현태중의 모습에 서하영과 철백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태까지와는 확실히 다른 기세.
방심하면 순식간에 죽는다.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그들의 정신력을 한계의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동시에 그들이 맡은 임무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들이 해야 할 것.
해야만 하는 것.
“흐아아아아아!!”
강렬한 포효.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철백의 몸이 전진한다.
그 속도는 서하영과 설천위에 비하면 눈에 띄게 느렸지만, 그렇다고 기어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단지 그 둘이 특출 나게 빨랐을 뿐.
위협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돌진해 오는 철백을 보며 현태중은 검을 휘둘렀다.
뭐가 됐든,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죽음을 선사해 주마.
망설임을 버린 현태중의 검이 철백의 급소를 노리고 궤적을 그려 낸다.
보이는 것과 실체가 완전히 다른 궤적은 도저히 철백이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하압!”
그 사이로 파고든 서하영의 창이 궤적을 최소화한다.
전부 다 막아 낸다는 말도 안 되는 시도가 아닌, 정말 중요한 급소만을 지키기 위한 방어.
그렇기에 철백은 최소한의 상처로 현태중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합 하나는 정말 잘 맞는 한 쌍이구나!]
물 흐르듯 이어지는 그 합공을 칭찬하며 현태중은 검을 움직였다.
고작해야 품 안으로 파고든 것뿐.
눈앞에 있는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없는데…….
순간 싸늘한 느낌에 몸을 돌린 현태중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멈춰 있다.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이 없어서?
아니다.
이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다.
그의 역할은 이것이기 때문이다.
견제.
목숨을 건 견제.
그것이 그의 역할이고.
그 역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이야…….”
[이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현태중의 눈에 세 개나 되는 검신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돌리고 있는 설천위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런 몸으로 잘도 움직이는구나.”
[이런 몸으로 잘도 움직이는구나.]
미묘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런 설천위를 바라보는 현태중의 눈동자가 싸늘해진다.
그 시선을 눈치챈 설천위는 세 개의 검신을 한 손에 움켜쥐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훔칠 수 없는 건 이 세상엔 없다네. 후배.”
[내가 훔칠 수 없는 건 이 세상엔 없다네. 후배.]
* * *
“슬슬 정리가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
구교사.
느긋한 걸음으로 내부를 걷던 남자, 팽후는 상당히 깔끔하게 손질된 내부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녀석들 일 하나는 잘하는구나.
일솜씨가 생각보다 더 뛰어나네.
“음?”
미리 기감을 열어 뒀던 팽후는 자신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의 감각에 단숨에 바닥을 박찼다.
지형은 전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단숨에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한 팽후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허…….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구나.”
철백을 지키는 서하영의 창술을 본 팽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법을 승화시킨 저 창법이라면 그 대쪽 같은 멍청이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겠군.
거기에.
내공도 없는 철백이란 아이는 어떤가.
대체 어디서 저런 무공을 배웠는지 근육을 쓰는 법 자체가 달라져 있다.
아마 웬만한 일류 정도는 무난하게 짓밟을 수 있겠지.
절정급은 힘들겠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의 성장이다.
이건 학관의 자존심을 떠나 저 아이들이 계(癸)로 있다는 것 자체가 학관의 수치가 될 만한 수준이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계급을 대대적으로 움직여야겠어.
그렇게 팽후가 다음 학기를 계획하던 그 순간.
“……음?”
그의 눈에 들어온 움직임에 팽후의 미간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절정?”
아니, 속도만 보면 초절정?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팽후의 시선 끝엔 여태까지와는 느낌이 전혀 다른 미소로 웃고 있는 설천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