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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8화 (28/624)

제28화

27화-악령 퇴치 (3)

일단 물러나자.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깨달은 순간, 설천위는 즉시 결정을 내렸다.

지금 도전하는 건 자살이랑 다를 게 없다.

마침, 아직 문을 열었을 뿐 안에 발을 들인 게 아니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

[늦었다.]

순간 무언가가 몸을 훅 잡아당기는 느낌.

그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몸을 비틀었다.

“컥!”

그리고 전력을 다한 일격.

철백의 가슴에 일권을 날린 설천위는 그 반동으로 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천위!!”

허나, 그 덕에 철백은 무사히 영역을 벗어나 사적귀검(斜跡鬼劍) 현태중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눈물 나는 우정이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태중은 입꼬리를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자루의 검.

[하지만 그런 우정도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이지.]

비관적인 색이 가득 묻어 있는 비웃음과 함께 현태중은 검을 들어 설천위를 겨눴다.

[네가 죽는다고 한들, 저 녀석은 너를 위해 복수하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정파의 무인이란 그런 족속들이니까.]

분노가 서려 있는 그 목소리에 겨우 균형을 다잡은 설천위는 중지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그딴 거 바라고 구해 주는 친구가 어디에 있냐?”

[껄껄껄, 맞는 말을 하는구나.]

“그렇죠? 저 자식은 왕따여서 친구가 없었나 보네요.”

암영의적의 말에 대꾸하며 설천위는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어차피 도망 못 갈 거라면,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

[어리석은 놈이구나.]

설천위의 당돌한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일까, 아니면 화를 돋운 것일까.

현태중은 웃으며 검을 움직였다.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그 동작에 설천위는 기괴한 감각을 느꼈다.

비틀어졌다.

검의 궤적이.

그리고 그렇게 느낀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늦었다.

촤악!

[천위야!]

“……미친?”

어깨에서 반대쪽 가슴까지, 사선으로 피가 뿜어져 나온다.

단숨에 베인 설천위는 뿜어져 나오는 피를 재빨리 혈도를 짚어 지혈했다.

허나 완전히 지혈되진 않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쇼크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상처.

혈도를 막은 정도의 지혈로는 감당할 수 없다.

끊임없이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에서 억지로 의식을 떼어 놓은 설천위는 자세를 잡았다.

이미 당한 상처다.

이것에 휘둘려 목을 내놓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설천위의 눈이 삶을 향한 투쟁으로 불타오르는 순간, 현태중은 또다시 검을 그었다.

이번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다.

하지만.

‘또 비틀어져 있어.’

무언가 다르다.

왜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의 괴리가 이리도 크단 말인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설천위는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범위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아예 예상되는 최대 범위까지 피하는 것이 정석이다.

최대한 속도를 내 거리를 벌린 설천위가 다시 자세를 고쳐 잡는 순간.

[판단은 빠르구나. 허나 몸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 주지 못하고 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참격이 따라붙는다.

“!”

아까처럼 대놓고 베인 건 아니지만, 팔에 상당한 깊이의 자상이 생겼다.

[변검(變劍)이다.]

그리고 그런 설천위에게 암영의적이 조언을 했다.

[궤적이 변하는 검법은 많다. 한데 저자는 그것에 허와 실을 만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궤적까지 만들어 내는구나.]

그 정도면 변검이 아니라 환검(幻劍) 아니야?

변하는 수준이 아니라 환각을 만들어 내는 수준이잖아.

암영의적의 설명에 이를 악문 설천위는 회복을 최대로 발동시키며 영력을 끌어올렸다.

애초에 강하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기술도 대충 알고 있었고.

그런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게임에선 범위가 조금 더 넓다는 수준이었는데, 이건 뭐 아예 다른 존재이지 않은가.

이를 악문 설천위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무인 대 무인의 대결로는 어림도 없다.

애초에 생각했던 공략 방법도 무로 꺾어서 이기는 게 아니지 않았던가.

다만, 처음 생각했던 방법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다.

그건 게임에서도 실제로 해 본 적 없는 도박이니까.

그러니, 원래의 공략법을 써야 한다.

설천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집중력을 한계의 한계까지 끌어올린 상태.

보스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반응한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속도에 모든 것을 맞춰라.

[가소롭구나.]

그 어리석은 반항에 현태중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인지 깨닫게 해 주마.

현태중의 눈에서 다시금 살기가 터져 나오는 그 순간, 설천위는 땅을 박찼다.

뭐가 됐든 움직인다.

뭐가 됐든 피한다.

전부 피할 수 있다면, 이길 수 없는 보스 따윈 없다.

극한의 극한까지.

설천위가 떨어지는 현태중의 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 그 순간.

[여기까지.]

공간을 장악하던 현태중의 살기가 단숨에 그 존재감을 잃었다.

단 한마디.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현태중이 십수 년에 걸쳐 다져 놓은 영역(靈域)이 힘을 잃는다.

격(格)의 차이.

무인으로서도.

영적인 존재로서도.

모든 것에서 밀린다.

그것을 직감한 현태중이 망설임 없이 목표를 바꾸는 순간.

그의 목표가 된 천마의 눈이 그를 직시했다.

[싸울 겐가? 딱히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네만.]

나지막한 목소리.

허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기세가 아니었다.

권위(權威).

인간의 생사를 손에 쥐고 흔드는, 절대자의 권위가 그 목소리에 가득 차 있었다.

싸우면 진다.

그것을 직감한 현태중은 결국 검을 거뒀다.

뭐가 됐든,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용감하게 맞서 싸운다고 한들, 쓰러지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현태중이 검을 거두자 천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일세.]

[……무엇을 노리는 거지?]

[뭐, 사소한 후학 육성이라고 생각하게나.]

사소하긴 개뿔.

어느새 집중이 풀려 반쯤 쓰러져 있는 설천위를 챙기는 천마를 보며 현태중은 미간을 찡그렸다.

[몇 번을 싸워도 내가 이길 것이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 아니겠나?]

빙긋 웃으며 대답한 천마는 설천위를 짊어진 채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럼, 또 보세나.]

* * *

“……어떻게 됐어?”

“천위!”

훈련장.

설천위를 업고 달려온 철백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웃으며 그를 내려놨다.

“벌써 정신 차린 겐가?”

“그냥 긴장이 풀려서 살짝 기절했던 것뿐이니까.”

“상처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말하는구먼.”

회복의 효능으로 어느새 상당한 수준까지 회복된 상처를 보던 철백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천마라는 분께서 전해 달라고 했네. 아직은 무리이니 천천히 다시 도전하라고.”

“……뭐, 그렇긴 하지.”

도저히 영역(靈域)에서 나갈 길이 안 보여 싸우려 하긴 했지만 솔직히 무리였다.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보여?”

“응? 뭐가 말인가?”

“천마라는 사람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며.”

“아, 그 문 앞에서는 보였는데 거길 벗어나니 어느새 사라지셨네.”

“영역의 영향인가.”

[아마 맞을 게다.]

천마의 대답에 설천위는 철백을 바라봤다.

덩치에 맞지 않게 걱정이 담겨 있는 눈동자.

저 눈에 영안의 씨앗이 깃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열 번 정도면 되려나?”

“뭐가 말인가?”

“네가 영혼을 볼 수 있게 되기까지.”

영역이 확실히 혼에 영향을 많이 주긴 하나 보네.

게임에서도 영역에 오래 있으면 영력 스탯이 오르곤 했으니까.

몇몇 재능이 부족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영역에서 일정 시간 있는 것으로 조건을 달성하기도 했고.

“후, 그나저나 계획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가 말이냐?]

“그 괴물 녀석을 처리 안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설천위의 갑작스러운 혼잣말에 철백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봤다.

딱 봐도 혼이랑 대화하는 것 같으니까.

그나저나 아까 봤던 그 천마라는 분인가?

철백의 눈에 살짝 부러움이 담기는 사이, 천마는 웃으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마침 딱 좋은 상대더구나.]

“딱 좋기는 개뿔이 좋아요? 말도 안 되게 강하던데.”

[생전의 경지가 완숙한 화경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아이쿠야!

화경?

천마의 대답에 설천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화경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 경지에 올랐다는 것 하나만으로 무림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경지다.

지고의 상징이라는 강기(罡氣)도 쓸 수 있게 되고.

그걸 완숙이라 불리는 경지까지 갈고닦았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 인간을 무슨 수로 이겨?

그 아래, 아래인 절정만 만나도 손도 못 쓰고 당하는 판인데.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설천위를 보며 천마는 작게 웃었다.

[살아생전에 화경이었던 것이지, 지금 화경인 게 아니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혼들은 죽으면 대체로 전생에 강했던 것만큼 강한 것 같던데.

[화경은 결국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 경지. 죽으면 그 힘은 상당수 흩어지는 법이다.]

아하.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천마 할배는 혼 상태에서도 겁나 강하니까 살아생전에 화경보단 강했단 소리군.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를 얻은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천마가 쯧쯧 혀를 찼다.

[또 딴생각이더냐?]

“씁, 예리하시네요.”

[이젠 네 녀석의 사고야 내 손바닥 안이니라. 여하튼, 잡설은 그만하고 본론을 말하마.]

설천위의 집중을 되돌려 놓은 천마는 멀뚱히 앉아 있는 철백을 바라봤다.

[육체를 잃어 그 힘을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그 무(武)의 경지만큼은 여전하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수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테지.]

“……그래서요?”

[무려 셋이다.]

천마의 눈에 물수건을 들고 들어오는 서하영이 잡힌다.

이 셋 중에 무(武)의 재능이 가장 뛰어난 아이.

어쩌면 이번 수련에선 저 아이가 가장 많은 것을 얻어 갈 수도 있다.

혹은.

“셋이면 할 만하다고요?”

이 신뢰의 터럭만큼도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꼬맹이가 가장 많은 것을 얻어 갈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이 아이들에게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싸움이다.

물론 준비는 필요하다.

[내일부터 내가 본격적으로 무예를 전수해 줄 것이다. 오전에는 수련에 힘쓰고, 오후에는 끝없이 도전하거라.]

지옥 같은 훈련이 되겠지만.

뭐, 무인의 훈련이라는 게 다 그런 법 아니겠는가?

몸으로 먹고살기 위해선 그만큼 뼈를 깎는 고행이 필요한 법이니까.

젊은이들의 끝없는 전진을 기대하며 천마는 웃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학기가 끝나기까지 한 달. 사적귀검(斜跡鬼劍)을 쓰러트리고, 피로 물든 그 발자취를 지워 내거라.]

* * *

고요.

그저 홀로 앉아 있는 시간.

한없이 느리게 가는 그 시간은 끝없이 고통스럽다.

전신에 박힌 검 때문에?

아니다.

이런 고통 따위 고통의 범주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숨통을 끊어 버린, 심장에 박힌 검?

아니다.

그 검은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됐을지언정 고통의 원인이 되진 않았다.

원인은 감정이다.

반으로 쪼개진 심장이 끝없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그런 고통.

지옥.

영원히 타오르는, 분노와 절망.

육신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가치.

이 영역(靈域)은 그 가치를 키우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

허나, 그 또한 벽에 막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뭐가 부족한 것일까.

[……피.]

역시, 부족한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다.

재료가, 재료가 부족하다.

새로운 피를 향한 갈망으로 서서히 이성을 상실해 가는 두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는 그 순간.

“2트째 하러 왔다, 색히야!”

대전의 문이 열리며, 그 새로운 피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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