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25화-악령 퇴치 (1)
꼬우면 덤벼라.
그 노골적인 도발에 검을 뽑았던 남자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계급(癸級)의 버러지가 어디서 약이라도 주워 먹고 왔나 보구나! 오냐! 오늘 격의 차이가 뭔지 제대로 알려 주마!”
검을 들이미는 남자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가 됐든 쉬운 녀석들이다.
가문은 중소라 불리는 수준이지만, 그 자존심만큼은 대문파 부럽지 않다.
그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녀석들.
하긴, 저런 자신감이라도 없으면 창칼이 난무하는 무림에서 버티기 힘들긴 하지.
그 덕분에 이용해 먹기도 쉽지만.
순식간에 흐름을 타 주는 상대의 모습에 설천위가 그 흐름을 이어 나가려는 순간.
빡!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식당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땅과 사람이 마주치는 소리.
“나, 철백.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내들을 바라보는 철백.
그의 손엔 안면이 뭉개져 의식을 잃은 남자가 들려 있었다.
“네, 네놈!”
동시에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 철백의 태도에 남자들 또한 당황해 검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설천위가 철백을 말리려는 순간.
“선공은 네 녀석이 먼저 한 거다!!”
기어코 검을 쥔 누군가가 철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숨을 노린 살수(殺手)는 아니지만, 팔다리 하나쯤은 잘라 버리겠다는 살기가 서린 공격.
그 노골적인 공격에 철백은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같잖구나!”
돌덩이처럼 단단한 양 주먹을 단숨에 몸 앞으로 교차시키는 철백.
그의 어깨를 노리고 떨어지던 검은 주먹들 사이에 껴서 단숨에 부러졌다.
일수(一手).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무기를 부러트려 버리는 그 모습에 달려들던 남자가 당황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상대는 내공도 없는 계(癸)의 버러지인데?
이해하지 못할 전개에 당황한 남자의 움직임이 멈춘 그 순간, 철백은 멈추지 않았다.
교차했던 주먹을 단숨에 허리춤까지 당겨서 근육을 조인다.
그리고 팽팽하게 땅긴 근육을 해방하는 것으로 쏘아 낸 신속의 일권(一拳).
빡!
또다시 울린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을 잃은 남자의 고개가 꺾인다.
동시에 의식까지 꺾여 버린 남자가 바닥과 마주하는 사이, 철백은 눈을 돌렸다.
뭐가 됐든,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끝을 봐야 하니까.
남아 있는 적의 수는 둘…….
“하아, 귀찮게 됐네.”
쓰러진 남자들 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는 설천위의 모습에 철백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긴 내가 싸우고 있는 동안 가만히 있을 친구는 아니지.
그런데 뭐가 귀찮게 됐다는 거지?
“사적인 싸움은 금지인 거 모르냐?”
“……아.”
설천위의 타박에 철백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학관 내에서 사적인 싸움은 금지.
비무라는 형태로 싸움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지만, 여하튼 사적인 싸움은 금지다.
퇴학 조치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벌이 있는…….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뭐 어쩌겠냐. 나도 겨우 참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참는 게 더 이상한 거긴 하지.
설천위도 녀석이 서하영을 만지기 전에 철백이 막았으니 참은 거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안 참았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웬만하면 비무로 끌고 갔겠지만.
기분 좋게 복수하고 벌 받으면 찝찝하니까.
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일이지.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일어나 철백과 서하영을 바라봤다.
“밥이나 먹자.”
뭐, 이미 저지른 걸 어째?
식당에 왔으니 밥이나 먹어야지.
* * *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요?”
“왔어?”
“예. 왔는데……. 제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일각(약 15분) 정도인데 꽤나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군요.”
식당으로 들어온 유예린은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지나쳐 식탁 앞에 앉았다.
“뭐, 저 녀석들이 시비를 걸었고 그래서 우리가 싸웠다. 끝이야.”
“비무로 안 끌고 가고요?”
“저 녀석들이 서 소저를 희롱해서 철백이 못 참았거든.”
서하영을 희롱했다는 말에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을 보는 유예린의 눈이 싸늘해졌다.
“쓰레기들이군요.”
“뭐, 그렇게 됐으니 우리는 밥을 먹고 나면 자진 신고를 하러 가야 할 듯해.”
설천위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그래야 벌의 수위도 낮아질 테니.”
자수만큼 좋은 게 없지.
“뭐,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그렇게 큰 벌은 없을 테니까요.”
“응? 왜?”
“이 학관도 나름 정파의 무리라서요.”
먼저 시비를 건 쪽이 누구일지는 딱 봐도 보인다.
게다가 아녀자 희롱?
아무리 무인의 길을 걷고 있다곤 하지만,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 선을 어겼으니 죄의 무게는 저쪽에 더 실릴 터.
“아마 청소 정도가 벌 아닐까요?”
“……그건 그거대로 싫네.”
변소 청소 같은 거 걸리면 답이 없으니까.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많이 먹어 두자.
* * *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보고를 위해 학관장실을 찾은 집법당(執法堂)의 당주, 모용철의 물음에 팽후는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자네는 어찌했으면 좋겠나?”
“상황을 고려하면, 벌점과 연무장 청소 정도의 처벌이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렇겠지.”
무림학관에서 비무를 중시하는 것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가 규율의 강화.
아무렇게나 막 싸우게 내버려 두면 흑도의 잡것 무리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정파의 일원으로서 합당한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함이다.
날짜와 시간을 공지하고, 보증인을 세워서 비무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같은 무력으로 먹고사는 입장이어도 품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
허례허식이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정파라는 게 그런 품격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파 무리와 다를 게 없는 집단이니까.
그러니 그런 품격을 해칠 만한 짓을 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 마땅하다.
마땅한데…….
“성장 속도가 아주 대단하군.”
“동감입니다.”
상대는 이류 넷.
삼류에서 빌빌거리던 두 사람이 넷을 제압하는 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류를 바라보고 있든가, 아님 일류에 도달했든가.
정말 놀랄 만한 성장이다.
하물며 그들이 그 재능의 부족으로 인해 내쳐진 계(癸)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놀랍다.
“구교사의 상황은 어떤가?”
“구교사 말씀입니까?”
“최근에 다시 쓰기로 하지 않았나?”
“예. 하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다 함은?”
“아무래도 괴이(怪異)가 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괴이한 일(怪), 초인적인 힘(力), 난세에 일어나는 현상들(亂), 초자연적인 신비로운 일(神).
공자가 말한, 학자가 믿어선 안 되는 비현실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 분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안다.
공자가 저런 말을 한 것은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여하튼, 이 괴력난신이라 부르는 괴이(怪異)는 무인에게도 골칫거리다.
처리하기 위해선 최소 현기(現氣) 단계에 이른 무인이 필요하니까.
경지로 따지면 최소 일류 이상의 무인이 필요하단 소리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음, 정보가 조금 있어서 말이야.”
바로 조금 전, 하나의 거래를 대가로 받은 정보를 떠올린 팽후는 입꼬리를 올렸다.
참으로 똑똑한 아이야.
이걸 예상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구교사의 청소를 맡기게.”
“예? 하지만…….”
“괜찮으니 그렇게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의아함을 해소하지 못한 모용철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모용철이 나간 뒤, 혼자 남은 팽후는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몇 년은 참 재미있겠어.”
* * *
“구교사 청소?”
“어, 구교사 청소.”
훈련장.
아침 일찍 모인 철백과 서하영은 설천위가 가져온 소식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곳이 있어?”
“어, 있어. 옛날에 미친 살인마 하나 때문에 청소하는 걸 포기하고 버린 건물.”
게임 할 땐 참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살인마 하나가 난리를 쳤다고 건물을 통째로 버려 버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어?
깨끗이 닦아서 쓰면 되지.
“자존심 때문이군요?”
“뭐, 그렇겠지.”
서하영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볼 땐 몰랐지만, 무림이라는 곳의 안에 들어와 보니 알 것 같다.
살인마에게 그 정도로 휘둘린 것 자체가 덮어 두고 싶은 치욕인 거겠지.
그걸 왜 지금 와서 꺼내는진 모르……진 않지.
구교사 청소는 게임에도 나오는 에피소드니까.
동호회(同好會).
뭐 현대로 따지면 동아리인데, 이 녀석들이 지금 부실 부족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부족을 구교사로 메우겠다는 생각인 거지.
아무리 무림학관에 땅이 넘쳐도 새로운 건물을 마구 짓는 건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니까.
여하튼, 그래서 게이머가 일류 혹은 그 이상에 올라 괴이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달성하면 이 구교사 서브 퀘스트가 열린다.
클리어하면 업적도 주고, 보상도 나름 쏠쏠하게 들어오는 괜찮은 퀘스트였지.
문제는 이 퀘스트가 열렸다는 것 그 자체다.
‘학교에선 우리를 이류 정도로 볼 확률이 높은데…….’
일류? 그것도 현기(現氣)가 능숙할 정도의 일류?
그런 수준까지 올라섰으리라고 판단할 리가 없다.
애초에 저번 싸움에서도 그런 기술은 쓴 적도 없고.
그러니 이류의 끝자락 혹은 일류의 완전 초입 정도로 여기는 게 당연할 텐데…….
왜 이런 임무를 줬을까?
[아무래도 네가 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구나.]
가만히 고심하던 설천위는 천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답은 그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유예린이 위에 알렸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철백이나 서하영은 위에까지 그 정보를 전할 인맥이 안 되니까.
[배신인 게냐?]
암영의적의 질문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배신일 리가 없다.
유예린은 오로지 순수하게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니까.
그렇다면, 무언가 거래가 있었던 거다.
그 정보를 제공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거래.
“아무래도 승급시켜 주려나 본데.”
“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아니, 별거 아니야. 그럼 언제 갈까?”
“우리 둘이서 청소하려면 시간도 꽤 걸릴 테니 당장 오후에라도 출발하는 게 좋겠군.”
철백의 말에 설천위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청소하다 보면 만날 녀석들 만나서 싸우기도 하겠지만, 빨리 시작할수록 좋긴 하지.
애초에 한번 들어갔다고 못 나오는 장소도 아니고.
“잠깐만요. 왜 둘이서 해요?”
“응?”
“당연히 저도 가야죠!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서하영의 모습에 철백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건물 하나니 꽤 오래 걸릴 텐데?”
“그럼 더더욱 같이 가야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서하영.
그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창도 챙겨 와라.”
* * *
“벌써요?”
“예. 구교사 앞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럼 벌써 들어갔겠네요.”
부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따라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래선 이야기가 안 된다.
믿는 구석도 좀 있고.
그러니 이쪽은 하나뿐인 낭군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할 일을 하면 된다.
“본가로 돌아갈게요.”
“준비하겠습니다.”
“예.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해 주세요.”
나가는 부하의 뒤를 바라보는 유예린의 눈동자가 서늘한 살기로 빛났다.
뭐가 됐든 용서하지 않을 거다.
유가(妞家)는 원한을 남기지 않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