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24화-혈사련 (5)
“그러니까 혼령이 알려 줬다, 이건가?”
“어. 내가 죽다 살아난 동굴에 있던 혼령이 알려 줬어. 내가 먹은 약초를 노리고 온 것 같다고.”
“그 혈주인가 하는 것도 혼령이 알려 준 건가요?”
“어. 조직 이름이 혈사련(血邪聯)인가? 뭐 그랬던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유예린은 고민에 빠진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심각해진 유예린의 표정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유예린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림사에 흔히 나오는 비밀 조직이라도 되나 보네요.”
“뭐, 이번에는 운이 나빴다 정도로 넘어가면 되겠지.”
“자자, 그럼 진짜로 돌아갈 준비를 하죠.”
설천위의 긍정에 가벼운 박수로 분위기를 환기한 유예린은 일행을 일단 해산시켰다.
그렇게 각자가 방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아 있던 유예린의 곁으로 부하 하나가 떨어졌다.
“혈사련이란 조직을 조사해 보세요.”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사라지는 부하.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는 유예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초절정 고수가 수장의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 냉정을 잃고 흔들렸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이기에 그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걸까.
설천위는 가볍게 넘어가는 듯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볍게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이 깊어진 유예린이 여러 가지 정보를 떠올리며 혈사련이라는 단어의 흔적을 찾는 사이, 설천위는 방에 도착해 미간을 찡그렸다.
[거짓말이 참으로 능숙하구나.]
[음음, 역시 무(武)에 대한 재능 빼고 모든 것을 가진 아이답구나.]
할 짓 없는 두 노령(老靈)이 철백 때문에 대답할 수 없는 설천위를 놀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대답을 못 하는 설천위의 태도에 입맛을 다신 둘은 장난을 그만뒀다.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구나. 내가 선명초를 훔친 조직은 음지의 조직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암영의적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설명은 못 들었는데?
[음? 말 안 했느냐? 어쩌다 얻은 정보로 선명초의 위치를 찾긴 했는데, 그걸 어떤 조직이 입수했길래 훔치다가 죽었던 거다.]
못 들었는데요.
그런 뒷얘기가 있었으면 바로바로 해 줬어야지.
혈사련 놈들이 얼마나 미친놈들인데.
음지의 조직인 주제에 소매에 자신들의 표식을 새기고 다니는 미친놈들이다.
[음……. 그러고 보니 내가 싸웠던 놈들의 소매에도 붉은색 자수가 있었던 것 같구나.]
그렇겠지.
암영의적의 말에 설천위는 확신했다.
그 선명초, 혈사련에서 노리던 거다.
그렇다면 왜?
왜 선명초를 노렸지?
게임에서 혈사련과 싸울 때 선명초가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녀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선명초는 병이나 독에는 통하지 않는다.
통했으면 암영의적이 그런 동굴을 파서 혼자 죽진 않았겠지.
암영의적이 선명초를 훔친 건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필요했던 인간이 죽고도 남았을 시간.
왜 지금에 와서 찾기 시작하는 거지?
그럴 이유가…….
‘아니지.’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절박함이 중요한 거다.
[허, 포위당했구나.]
천마의 말에 설천위는 그대로 짐을 어깨에 걸쳤다.
“포위당했어!”
“음?”
“지금 당장 서 소저부터 챙겨!”
“알겠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철백은 망설임 없이 방을 박차고 나갔다.
아마 순식간에 서하영과 합류하겠지.
그렇다면 이쪽에서 해야 할 건 당연히 하나다.
“유 매!!”
마지막까지 1층에 있었던 유예린과 합류하는 것.
단숨에 1층으로 내려간 설천위는 그대로 미간을 찡그렸다.
“설 소협?”
어느새 곳곳을 틀어막은 적들이 객잔을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부르는 유예린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일단 그대로 유예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니, 상황이 이런데 왜 느긋하게 차나 마시고 있는 거야.
“적이 얼마나 많은지 파악 못 했어. 일단…….”
“빼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유예린.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 객잔을 감싼 적들은 딱 봐도 훈련된 자객들로 보였으니까.
왜 어제 싸움에 나오지 않고 지금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굳이 할 필요 없는 선택이네요.”
“……이유는?”
“지원을 부른 건 저들만이 아니라서요.”
간단한 대답.
자신감에 차 있는 그 대답에 설천위가 되물으려는 그 순간.
“컥!”
자객 하나의 목이 무언가에 꿰뚫렸다.
“암살이란 건 이렇게 대놓고 하는 게 아니죠.”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며 유예린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명을 기다립니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유예린은 짧게 대답했다.
“몰살입니다.”
[존명(尊命)!]
대답과 함께, 피와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음에 설천위와 유예린을 노리고 뛰어드는 이들은 지척으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먼저 숨이 끊어졌다.
“……겁나 세네.”
“우리 가문의 자랑 중 하나인 암혈단(暗血團)이에요.”
아, 유예린의 직속 조직 중 하나로 유명한?
지금도 유명한진 모르겠지만, 게임에서는 확실하게 유명했다.
더럽게 강한 조직으로.
유예린과 적대하게 되면 상대하는 일이 생기는데, 난이도가 미친 듯이 높다.
엄청난 수준의 암살자로 이루어진 조직인데, 상위 5인은 초절정이다.
화경에 올라도 조금만 실수하면 죽는다.
아니, 근데 그런 조직을 왜 불렀데?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린 순간, 어느새 유예린의 곁에 떨어진 남자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경계 업무에 집중해 주세요.”
“존명.”
대답과 함께 스르륵 사라지는 부하.
아니, 대체 얼마나 은신술이 뛰어나면 눈앞에서 사라지냐.
설천위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유예린은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자, 돌아가요? 공자.”
……그래, 뭐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가 뭐가 중요해.
덕분에 길게 싸워야 할 일이 십 분 만에 끝났는데.
유예린의 상큼한 미소에 설천위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돌아가자.”
학관에 돌아가서 수련이나 하자.
* * *
“정신 나간 년…….”
설천위들이 머무르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언덕 위.
객잔을 바라보던 여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암혈단을 부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겨우 눈치채고 빠져나왔네.”
“듣자 하니 그 약혼자가 죽을 뻔했다더군.”
“그래서?”
“관련된 모든 가문을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고 하던데.”
아주 미X년이 따로 없구먼.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동료의 대답에 유예린에 대한 평가를 수정한 여인은 한숨과 함께 객잔을 바라봤다.
“우리끼리 가기엔 늦었겠지?”
“암혈단까지 상대하면 필패다.”
“쯧, 그 머저리가 혼자 뛰어가지만 않았어도…….”
“어쩌겠는가? 이미 늦어 버린 것을.”
유예린이라는 강적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좋다고 달려간 놈을 방치하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목숨 정도는 붙어서 빠져나올 줄 알았던 녀석이 콱 죽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숨을 내쉰 여인은 쪼그리고 앉아 아쉬움이 담긴 눈으로 객잔을 바라봤다.
“저놈들이 선명초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더 문제다. 아마 이미 먹어 버렸을 테니까.”
“유예린은 이제 영약이 필요 없잖아?”
“그 약혼자는 아니지.”
“아, 그것도 그런가.”
고개를 끄덕인 여인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이미 늦은 일이다.
선명초는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러면 그분의 회복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다른 대체재를 찾는 수밖에. 이러고 있는 것도 시간 낭비다.”
“쯧, 어쩔 수 없지. 가자.”
남아 있던 미련을 끊어 낸 여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붙잡고 있기엔 이쪽도 사정이 빠듯했으니까.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수고한 값만큼은 받아 내 주마.’
목숨으로.
살짝 뒤를 돌아보는 여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빛났다.
* * *
“도착!”
쾌활한 서하영의 목소리에 철백이 부드럽게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유예린 덕에 상당히 편하게 돌아올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이야기를 하며 걷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이런 여행에서 이동은 몸이 편한 게 좋으니까.
“유 소저, 고맙소이다.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왔소.”
“아, 고마워요!”
“후후, 괜찮아요. 어차피 혼자 타면 공간도 많이 남는걸요? 오히려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철백과 서하영의 감사 인사에 웃으며 손을 내저은 유예린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공자도 좋았지요?”
“……어. 좋았어.”
너랑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필사적으로 삼킨 설천위는 헛기침과 함께 짐을 어깨에 걸쳤다.
“도착한 김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
“그거 좋네요.”
“찬성!”
여전히 쾌활한 서하영의 동의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철백.
그렇게 네 사람은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애초에 짐도 별로 없었으니 한 끼 정도는 짐을 가지고 가서 먹는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어머, 그리로 가나요?”
“응? 아…….”
자연스럽게 가장 낮은 하급의 식당으로 걸어가던 설천위는 유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유예린은 항상 상급만 가겠구나.
상중하.
차이는 당연히 음식의 질이고, 그 대가는 돈이다.
중급만 돼도 상당한 가격이란 말이지.
상급은 어림도 없다.
상황을 떠올린 세 사람의 몸이 굳자, 유예린은 웃으며 중급 식당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이번 임무로 포상금도 나올 테니, 중급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괜찮겠군.”
“좋아요!”
철백과 서하영의 동의에 설천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끼 정도의 사치는 괜찮겠지.
사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게 네 사람이 식당으로 향하던 도중.
“이런……. 잠깐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겼네요.”
유예린이 걸음을 멈추고 미안하다는 듯 세 사람을 바라봤다.
“식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갈 테니 먼저 식사하고 계셔 주세요. 금방 갈게요.”
“알겠소. 소저. 어차피 많이 먹으니 천천히 오시오.”
“후후, 그렇다면 마음이 조금 편하네요. 금방 돌아올게요!”
든든한 철백의 대답에 웃으며 멀어지는 유예린.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설천위는 앞서가는 철백과 서하영의 뒤를 따랐다.
서로를 보며 하하호호 하는 모습이 참…….
[껄껄껄, 좋은 연인이구나!]
[벌써부터 옆구리가 시린 게냐?]
“아니거든요?”
그새 또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두 혼령을 무시한 설천위는 그대로 식당으로 들어갔고…….
“하! 네놈들은 주제 파악도 못 하는 거냐?”
노골적인 시비가 설천위를 반겨 줬다.
이야, 그립네 그리워.
요 몇 달간은 본 적도 없었는데.
안 들어오던 중급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시비가 걸리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피식 웃은 설천위가 철백과 서하영을 향해 걸어가는 사이, 시비를 건 남자는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꼴에 좀 생겼다고 남자를 끼고 다니는 것 같은데, 상대를 잘못 골랐네.”
입꼬리를 비틀며 서하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
“꼬리 칠 거면 나 같은 사람한테 꼬리를 쳐야지.”
노골적인 성희롱과 함께 움직이는 손.
무공의 묘리를 담아 기묘하게 움직이는 손이 서하영의 엉덩이를 향한다.
그 모습에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렸고.
“이런 쓰레기가…….”
철백의 눈이 뒤집혔다.
“아아악!”
단숨에 남자의 팔을 잡아챈 철백이 그대로 그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뿌득 뿌득.
뼈가 어긋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무릎이 꺾인다.
“이 자식!”
그 모습에 다급히 검을 뽑는 남자의 동료들.
그 모습을 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슬슬 계(癸)에서 벗어날 때가 되긴 했지.
철백과 남자들 사이에 낀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중지를 세웠다.
“꼬우면, 비무 한판?”
싸울 거면 제대로 싸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