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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22화 (22/624)

제22화

21화-혈사련 (2)

[뭘 고민하고 있는 게냐?]

습격 직전, 산채 대문 앞에 선 설천위는 천마의 물음에 입을 다문 채 유예린을 바라봤다.

‘망설이지 마세요.’

불을 피우기 전, 작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모였을 때 유예린이 모두에게 한 말이다.

망설이지 말라.

그 말의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철백도, 설천위도 아직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기에 좋은 무술이 권법이니까.

아무리 주먹이 단단하다고 해도 쇠보다는 무르고.

아무리 주먹이 날카롭다고 해도 날보다는 무디다.

당연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적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무공을 펼쳐 왔다.

애초에 단번에 적을 죽일 힘과 기술이 없었으니 그런 결과가 나온 거긴 하지만.

그런데 이젠 아니다.

철백은 대체 뭘 처먹고 저렇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사람의 뚝배기 정도는 그냥 부술 힘을 얻었다.

설천위도 [영각(靈覺)]을 통해 사람 목숨 정도는 충분히 빼앗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상대가 적을 땐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이번처럼 적이 많은 곳에 들어갈 때다.

사방에 적이 넘치는 와중에 힘 조절?

죽기 딱 좋은 오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걱정돼서 그러는 게냐?]

[허허허. 젊구나, 젊어.]

설천위의 고민을 눈치챈 천마와 암영의적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렸을 때의 고민이니라. 사람의 목숨이 가지는 무게에 대해 고민해 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암, 세상이 아무리 비틀렸다고 해도 인명의 가치는 항상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지.]

좋다고 떠들어 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설천위는 한 귀로 흘렸다.

허울 좋은 말은 지금 필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각오.

사람의 목숨을 이 손으로 거둘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각오뿐.

그렇게 설천위가 멍하니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는 그 순간.

“으랏차!!”

기합성과 함께 문짝이 날아갔다.

일말의 망설임과 고민도 없는 호쾌한 일격.

“가자.”

그 당당한 목소리에 긴장하며 손을 움켜쥐던 설천위는 피식 웃었다.

그래.

뭘 고민하냐.

지금 쳐들어가면, 적들은 날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밀 거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범죄자가 된 놈들이니까.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불살(不殺)이니 뭐니 고민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죽여야 한다면 죽이고.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안 죽인다.

간단한 것 아닌가.

생명의 무게?

내 생명의 무게만큼 무거운 게 어디 있다고.

전부 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천희가 가지고 있던 윤리의식 따윈 버려라.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약육강식의 무림을 살아가는 설천위니까.

“흐하하하! 간다!”

철백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설천위도 땅을 박찼다.

처음에는 천천히.

[영각(靈覺)]은 성능이 좋은 만큼 확실하게 제약이 있다.

일단 제한 시간이다.

[영각(靈覺)]은 내공을 소모하진 않지만, 정신력과 영력을 소모한다.

영력이 부족하면 정신력으로 버틸 순 있지만 효율은 떨어진다.

그 학검인가 하는 놈이랑 싸울 때는 진짜 극한까지 쥐어짰었지.

불굴이 아니었으면 벌써 기절하고도 남았을 거다.

다음으로는 재사용 대기 시간이다.

한번 사용하고 나면 혼을 강제로 깨워 신체와 동화시킨 후폭풍이 있다.

몸의 성능이 조금 떨어지는 데다 한동안 [영각(靈覺)]을 쓸 수가 없다.

그러니 이건 제대로 싸울 때를 위해 남겨 두는 게 좋다.

대충 계획을 세우는 걸 끝낸 설천위가 적들의 앞에 도달하는 그 순간.

“우어어어어!”

사람이 설천위의 옆을 스쳐 날아갔다.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지는 공기.

“흐하하하! 인간 암기다!”

그게 암기냐.

“그건 암기가 아니죠.”

모두가 하고 있던 생각을 유예린이 대신 입으로 내뱉어 주는 사이, 장씨 삼 남매도 움직이고 있었다.

“놈!”

장묵이 철백의 앞을 가로막는다.

상당한 덩치를 지닌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니 굉장히 위협적인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가장 날뛰던 철백을 묶어 두는 사이, 장영은 산적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우왕좌왕 흩어져 있던 산적들이 빠르게 대열을 갖춘다.

그 모습에 유예린은 눈을 반짝이며 상황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통솔이 잘되어 있군요.’

상당한 규모이긴 하지만, 이런 시골 산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두목과 부두목이 일류라는 건 정보로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핵심은 저 여자였나 보네.

일단 저 여자부터 처리할까?

유예린이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려는 그 순간.

“이런.”

날카로운 기세가 그녀의 발을 묶었다.

“이건 예상보다 더 위험하네요.”

설천위의 말대로 정말 혼자 달려들었으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돌린 유예린은 한 방향을 바라봤다.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년인.

허리에는 외날의 도를 차고 있고, 복장은 품이 넓은 녹색 무복 차림이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등에서 바람에 흐트러진다.

상당히 인상적인 외모지만……. 그것보다 더 인상적인 건 공기다.

살기(殺氣)와 혈향(血香).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살기와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이 사내에게서 풍겨 왔다.

“피를 뿌리기에 좋은 밤이군.”

입꼬리를 올린 사내는 한 손을 도 위에 얹으며 유예린을 바라봤다.

“거기에다 이리도 좋은 먹잇감이라니.”

천천히 도를 뽑는 사내를 보며 유예린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누가 먹이가 될까요?”

캉!!

날카로운 파공음.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뒤로 날아간다.

“역시 명불허전이군! 은검(隱劍)!!”

입꼬리를 올린 채 도로 자신의 정면을 막은 사내는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낙법.

아직까지 설천위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걸 공중에서 보법만으로 행하려는 사내에게 모두의 시선이 고정된 그 순간.

“과한 칭찬이군요.”

가벼운 웃음이 담긴 대답과 함께 또다시 날카로운 파공음이 사내를 덮친다.

그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어떻게?

[호오? 어린 처자가 참 대단한 검술을 쓰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제 눈으로도 전부를 파악하기 힘들군요.]

사람이 아닌 두 존재는 알아챘지만.

“뭔데요?”

그렇기에 혼란을 틈타 설천위는 즉각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 설천위의 질문에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은신(隱身)의 극의(極意)다.]

“은신이요?”

[저 아이의 검법엔 한 획, 한 획 모두에 은신의 묘리가 담겨 있다.]

……그런 게 가능해?

[이치를 벗어난 존재가 만든 검법은 대체로 이치를 벗어나는 법이지.]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거 아닌가 싶은데요.”

[애초에 익히는 것조차 힘든 검법이다. 저 나이에 저 정도 수준으로 익혔다는 것 자체가 역사에 기록돼도 좋을 정도의 놀라운 업적이지.]

그 정도야?

천마의 설명에 설천위는 가만히 유예린을 바라봤다.

게임에서도 겁나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사기적인 스킬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새삼 유예린의 대단함이 한층 더 다가오는 느낌이다.

무공을 직접 익혀 본 결과, 일류 무공도 말도 안 되게 힘든데 그것 이상이란 소리 아닌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느새 사내가 접근에 성공해서 유예린도 검을 뽑고 싸우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검을 휘두르는 동작조차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설천위가 유예린의 대단함에 탄복하는 그 순간.

[천위! 정신 차려라!]

천마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

천마가 머리를 눌렀기에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자세를 낮춰 무언가를 피했다.

“네놈?”

회심의 기습이 빗나간 장철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걸 피하다니.

이 녀석은 뒤에도 눈이 달려 있나?

허나 시간을 되돌릴 순 없는 법.

상대가 피했다면 다음 수를 펼칠 뿐이다.

“크합!”

옆으로 빠진 도를 다시금 움켜쥔 장철이 강렬한 기합성과 함께 도를 휘두른다.

그야말로 근육을 쥐어짠 일격.

거기에 내공의 힘까지 담겨 있으니 그 속도는 말할 것도 없다.

[영각(靈覺)]

망설임 없이 스킬을 발동시킨 설천위의 몸이 단숨에 땅을 박차 거리를 벌린다.

순식간에 멀어진 설천위가 다시 자세를 고쳐 잡는 순간.

“어리숙하구나!”

그 틈을 파고든 장철의 도가 다시금 설천위를 위협했다.

하나하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서운 공격.

그렇기에 설천위도 이를 악물고 공격을 피하는 사이, 전황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예린이라는 대항 불가능의 적을 그에 맞는 강자가 맡아 준 상황이다.

그녀와 싸우고 있는 사내의 경지를 알고 있는 산적들은 그를 믿고 나머지 놈들을 상대한다.

장철과 장묵이 각각 설천위와 철백을 맡는다.

이 둘이 일류이기에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준 철백과 그나마 싸우기 위해 달려들었던 설천위를 막은 것이다.

그렇게 위험 요소를 제거한 다음, 장영이 나머지 산적들을 통솔한다.

숫자는 고작해야 열이 조금 넘는다.

상당한 인원을 불을 끄는 데 보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 경지가 이류인 병력들.

즉.

“꺅!”

서하영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대들이라는 소리다.

“서 매!!”

서하영의 비명에 장묵과 싸우던 철백의 시선이 돌아가자, 그 틈을 장묵이 파고든다.

단단한 배에 꽂히는 묵직한 주먹.

장묵과 난투전을 벌이던 철백은 이를 악물고 몸을 폈다.

고통에 신음을 흘릴 틈?

없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서하영이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철백이 장묵의 공격을 받아 내며 서하영에게 다가가려 하자, 장영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머? 괜찮으려나? 그렇게 다가오면 이 여자가 상당히 처참한 꼴로 변할 텐데?”

“……뭐?”

“이런 장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머저리를 데려왔으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

그 장난기만큼이나 가득 찬 비열함에 철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인질.

유예린이 있는 이상 최악의 상황만은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떠올리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렇게 한순간에 상황이 뒤바뀌다니.

완전한 포위.

그 순간, 이를 악문 설천위는 자신의 상대를 바라봤다.

만족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꼬라지가 딱 봐도 이 상황을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꼴이다.

그렇다면 그 틈을 찔러 주는 게 인지상정.

‘최고 속도로 가면 벗어날 수 있다.’

해야 할 건 단숨에 저 틈으로 파고들어 서하영을 데리고 나와 철백과 합류하는 것.

셋이 뭉치면 어떻게든 포위당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망 다닐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유예린이 적을 쓰러트리면?

이쪽의 승리다.

그 전에 이쪽에서 저 일류급들 두목만 박살 내도 되고.

대충 계획을 세운 설천위가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몸을 꿈틀거리는 순간.

[하지 말거라.]

“에?”

[좋은 기회다. 마침내 싹이 피어날 때가 된 것 같구나.]

천마의 웃음에 설천위는 다시금 서하영을 바라봤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인 모습.

지척에서 창과 도를 들이민 산적들은 그녀의 몸을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아무리 봐도 위기에 빠져 희롱까지 당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렇게 설천위의 표정이 기묘해지는 사이, 서하영은 그야말로 분노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자신의 나약함.

몇 년을 무(武)에 몸담았으면서 이제야 얻은 동료들, 친구들의 짐이나 되는 꼬라지라니.

이게, 이게 내가 바라던 무인인가?

아니다.

아니야.

차라리 이럴 바엔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다.

죽음의 각오를 다진 서하영이 마지막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그 고개를 천천히 드는 순간.

그녀의 눈에 색다른 것이 보였다.

‘뭐, 정말 막히면 다른 무기라도 한번 써 봐. 창이라든가.’

이번 여행을 오면서 설천위가 했던 말.

권이 안 된다면 다른 무기라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죽음을 각오했는데 가문의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친우의 짐이 되어 발목을 잡고 있는데, 그 명예가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던 창을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은 서하영은 그대로 창을 잡아당겼다.

“어어?”

삼류의 산적 따위는 결코 버틸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단련해 온 정통 무인의 근력.

단숨에 창을 빼앗은 서하영이 창을 세게 쥐는 순간.

서하영의 세계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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