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20화-혈사련 (1)
무너진 망루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저 무식한 쉑히.
“이건……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황당함이 담긴 유예린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무식한 놈이 일을 너무 거창하게 벌여 놨다.
“예? 계획을 바꿔요?”
“저렇게 화려하게 부숴 버리면 본채 쪽에서도 눈치를 채고 움직일 테니까요.”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애초에 이 망루를 공격하는 이유가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잖아?
당연히 이쪽으로 지원을 올 텐데, 그러면 이득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는 서하영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 소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파는 냉정하거든요.”
“예?”
“지금 망루가 무너졌으니 여기로 지원 병력이 올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면 문제없는 거 아니냐고.”
“네.”
어떻게 알았대.
서하영의 눈이 동그래지자 그 귀여움에 미소 지은 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사파는 할 만할 때만 움직이고 적이 강하게 나오면 움츠리거든요.”
“아…….”
서하영도 멍청해서 계급(癸級)인 것이 아니다.
유예린의 말에 상황 파악이 끝난 서하영은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철백을 바라봤다.
자신도 이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철백도 거기까진 생각 못 했을 터.
“동료가 위험에 빠지면 구하러 온다. 우리에겐 당연한 사고방식이지만 사파에선 아니란 말이죠.”
그런 서하영의 모습에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유예린은 아직도 날뛰고 있는 철백을 바라봤다.
“철 소협의 잘못이 아니에요. 경험이 부족한데 그걸 감안하지 않고 설명을 전부 하지 않은 제 탓이죠.”
“그런…….”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서하영의 어깨에서 손을 뗀 유예린은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설공자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요?”
“바로 돌진?”
“완전히 뭉치기 전에 치자는 건가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설천위의 대답에 유예린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고민했다.
설천위의 말도 일리는 있다.
이런 정보가 적은 상황에서의 병법은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작업.
최악(最惡)을 피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최악은 뭘까?
‘나를 뺀 인원이 최고수와 맞붙는 것.’
설마 이 짧은 시간 안에 사천맹(邪天盟)이 초절정급의 고수를 보냈을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절정 정도가 최선이겠지.
문제는 절정만 되어도 이 세 사람은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 정도?
그렇다고 이 세 사람이 나머지 산적들을 전부 이길 수 있느냐?
그것도 아마 무리다.
그게 가능했다면 적당히 적진을 정찰해서 바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최악을 면할 수 있을까.
유예린이 곰곰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하나 남은 인원까지 전부 기절시킨 철백이 돌아왔다.
“왜 안 오는 거야?”
“너 때문에 일이 꼬였다.”
“응?”
잘 모르겠다는 철백의 표정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가 이유를 설명해 줬다.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표정이 변하는 철백.
그가 유예린에게 사과하려는 그 순간.
“정했어요.”
“응?”
고개를 숙이던 철백의 말을 끊고, 유예린의 눈이 반짝인다.
찾았다.
이 방법이라면, 할 수 있다.
“바로 적들이 뭉쳐 있는 곳으로 가죠.”
* * *
“망루가 쓰러져?”
“예.”
“그 어린 괴물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군.”
부하의 보고에 장철은 미간을 찡그렸다.
며칠 전,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망루에 올라가 확인했다.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멀리서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압도적인 살기.
그렇게 먼 거리였음에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를 정도로, 그리고 전신이 떨릴 정도의 살기를 느꼈다.
그런 살기를 뿜어내는 녀석이랑 정면 대결?
어림도 없는 소리다.
자살하겠다고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거랑 별다를 게 없는 판단이다.
그래서 바로 도움을 요청했다.
저런 녀석들이 이 산에 들어올 이유야 뻔하니까.
거기에 마을에 미리 심어 놓은 녀석들 덕에 정체도 파악하고 상황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며칠은 안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움직이다니.
상당히 급한가 보군.
뭐, 문제는 없다.
이쪽도 준비는 거의 끝났으니까.
“묵아!”
“예, 형님.”
“조사는 어떻게 돼 가고 있다더냐?”
“이제 슬슬 절벽 아래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쯧, 찾으면 포상을 넉넉하게 줄 테니 더 열심히 찾으라고 독촉 좀 해라.”
“예, 형님.”
“그리고 영이는?”
“또 애들 괴롭히고 있습니다.”
“쯧, 그 녀석 취미 한번 고약하게 들여 가지고…….”
동생의 소식에 혀를 찬 장철은 막냇동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도 이렇게 듬직한 막내가 있으니 셋이서 산채를 차릴 생각을 했지.
영이 그 녀석도 똘똘해서 여러모로 쓸 만하고.
그 사람들이랑 이어 준 것도 영이니까.
“그나저나, 애들한테 준비하라고 해라.”
“예?”
“그 마을에 있던 놈들이 이쪽을 치고 있다더라.”
“알겠습니다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장묵을 보던 장철은 이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일단…… 바로 오진 않겠지?
“청아! 들어와라!”
좀 즐기고 있자.
* * *
본채가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접근한 네 사람은 먼저 숨어서 상황을 살폈다.
“그래서 계획은?”
“계획이요?”
“어, 무슨 계획이 있어서 바로 여기로 오자고 한 거잖아.”
설천위의 말에 작게 웃은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산채 내부 지도야?”
“예. 이런 값싼 지도는 푼돈이면 충분하니까요.”
돈으로 구워삶았다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지도를 자세히 살폈다.
“이 위에 적혀 있는 건 인원수인가?”
“예. 대략적인 정보로 경지에 따라 나눠 놨어요.”
일류가 둘, 이류가 열하나, 나머지는 전부 삼류인가.
모두 합쳐 봐야 쉰을 조금 넘는 숫자.
“생각보다 적군.”
“이 정도라도 상당한 규모예요.”
“그런가?”
“예. 산채라는 게 생각보다 더 먹고살기 쉽지 않은 일이라 이렇게 많은 인원수를 거느리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철백의 말에 대답한 유예린은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제가 이곳으로 넘어갈 수 있어요.”
“음.”
그렇군.
그래서?
질문이 담긴 설천위의 표정에 유예린은 빙긋 웃었다.
“제가 안에 들어가서 문을 엽니다. 그리고 세 분이 들어와서 싸우고 끝!”
“……계획이라며?”
“역시 이게 가장 안전하고 좋더라고요!”
뭘 해맑게 말하냐, 이 아가씨야.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인 설천위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대충 무슨 생각인지는 이해가 간다.
아예 기습적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약한 녀석들의 숫자를 확 줄여 놓겠다는 생각이겠지.
그러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문을 열고 나머지 세 사람이 정리.
유예린은 가장 강한 녀석들을 정리한다.
이런 계획이겠지.
짜증 나는 건 이 계획이 정말 가장 그럴듯하다는 거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저 혼자 안으로 보내는 건…….”
설천위가 이성적으로 고민할 때 감성으로 움직이는 철백이 먼저 불만을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진이다.
유예린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한 사람만 안에 들어가는 위험한 역할을 맡길 순 없다.
심지어 지금은 사천맹의 조력자가 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거절의 의사가 담긴 세 사람의 시선에 유예린은 그저 빙긋 웃었다.
‘좋은 사람들이네.’
점수를 쉽게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현실은 현실.
이 방법이 가장…….
“불 지르자.”
“……예?”
“불 지르자고.”
“……불을요?”
산에서?
어쩌자고?
목재 수급의 주가 되는 산은 어느 정도 보호를 해야 한다.
당연히 고의적인 방화는 중범죄.
지역에 따라선 나라에서 목재를 채취할 수 있는 양까지 제어하는데 당연한 말이다.
그러니 불을 지른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어야 하는데…….
뭐 이리 당당하단 말인가.
“듣자 하니 저 산채에는 포로들도 없다며?”
“예……. 녹림에 들면서 포로 전부를 상층부에 바쳤다고 하니까요.”
일반인은 있어 봤자 두목의 애첩 정도가 끝일 거다.
유예린의 긍정에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은 저쪽에서 꺼 줄 거야.”
“……그렇죠?”
“여기, 식량 창고랑 가까운 이쯤에 불을 지르고 정면 돌파. 이걸로 가자.”
“불로 인원을 분산시키자는 말인가요?”
“우리 넷이 동시다발적으로 불을 지피면 반드시 혼란에 빠지고 인원이 과도하게 그쪽으로 쏠릴 거야.”
거기에.
“밤에 지르면, 우리의 시야도 트이겠지.”
저 큼지막한 산채가 타오르면 꽤나 크고 오래 타오를 거다.
싸우는 동안 시야를 충분히 밝혀 줄 수 있을 만큼.
* * *
“조용하군.”
“으응~. 그러게?”
밤.
장철의 방엔 이 산채를 관리하는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장철, 장영, 장묵.
피로 이어진 이들 셋이 이 산채를 만들고 관리하는 자들이다.
모인 이유는 당연히 회의 때문.
“섬서유가의 그 아가씨라면 바로 돌진해 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
장영의 말에 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초절정.
정파 무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후기지수다.
이런 산채 따위 정면 승부가 아니면 수치라 여길 만한 나이와 경지다.
그런데도 바로 공격해 오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역시 우리 쪽에 그분들이 있다는 걸 경계하는 건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 일이 조금 복잡해지네~.”
고개를 끄덕인 장영이 문을 바라봤다.
지금 와 있는 사람은 임시로 온 것뿐,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다.
며칠이면 떠나야 하는 사람.
반면, 유예린과 그 일당들은 며칠이고 기다릴 수 있다.
그들은 방학 중에 찾아온 거니까.
“아예 끌어들일까?”
“끌어들여? 어떻게?”
“그 뭐냐, 같이 온 녀석들은 삼류라며? 하나 정도 몰래 빼돌리면…….”
“그랬다가 정말로 섬서유가에서 지원을 와 버리면?”
“음, 그 전에 튀어야겠지?”
“무리다. 그 물건을 찾을 때까진 절대 도망 못 가.”
굳건한 장철의 태도에 장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이쪽도 동감이다.
그 물건 없이 떠나면 또 얼마나 빈궁한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확실하게 한몫 챙겨서 떠나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긴 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유예린이라는 여자는 뇌물도 안 통할 텐데.
장영이 고민에 빠진 그 순간.
“불이다! 불이야!!”
“뭐?”
밖에서 들리는 외침에 장영이 벌떡 일어서 문을 박찼다.
그리고 빠르게 화재가 일어난 곳의 위치를 확인한 장영은 얼굴을 구겼다.
“오빠!”
“무슨 일이냐?”
“당장 그분을 부르러 가!”
“벌써?”
“벌써는 무슨! 이미 늦었어!”
아마 소수의 인원이 기름과 부싯돌을 챙겨 가 불을 피운 거겠지.
문제는 위치다.
산채 안쪽, 식량 창고와 근접한 장소에 불을 붙였다.
천천히 불을 끈다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장소다.
당장 저기가 불타면 수색 작업 자체를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온다.
저들이 자신들에게 일을 맡긴 이유가 뭔가.
쓸데없는 움직임 없이 이 정도 숫자를 부릴 수 있으니 일을 맡긴 거다.
입술을 깨문 장영은 표독스럽게 눈을 뜬 채 몸을 돌렸다.
불이 안쪽에 났다는 소리는…….
쾅!!
기다렸다는 듯이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나가는 문짝.
일부러 마차도 넉넉하게 드나들 수 있게끔 거대하게 만든 문짝이 단번에 떨어져 나갔다.
화재로 인해 밝아진 산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한.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셋.
확실하다.
불을 지른 건 저 넷이다.
입술을 깨문 장영이 산적들을 지휘하려는 그 순간.
“흐하하하! 간다!”
거친 돌진과 함께 철백이 사람들을 날려 버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