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19화-하계 과제 (5)
“……정말 이게 맞아요?”
“반응이 없다면 사다리의 길이를 더 늘이면 될 걸세.”
“알겠어요.”
늦은 밤.
철백의 말대로 줄사다리를 준비해 절벽에 도착한 유예린은 철백과 함께 천천히 사다리를 내렸다.
“유 소저, 제가 할게요!”
“아뇨.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서하영의 만류를 뿌리치며 유예린은 사다리를 계속해서 내렸다.
그렇게 내리고 내리던 그 순간.
“왔군!”
사다리가 묵직해진 것을 느낀 철백이 입꼬리를 올렸고, 유예린은 떨리는 손으로 사다리를 당기기 시작했다.
한 칸, 한 칸.
사다리가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한 사람 분의 무게가 느껴져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 나이스 센스!”
“그건 또 무슨 헛소린가?”
“아니, 좋은 선택이라고.”
어색하게 웃는 설천위를 확인한 순간, 유예린은 그대로 사다리를 놓쳤다.
그리고 동시에 흘러내리는 눈물.
“유, 유 소저 울어요?”
그 모습에 당황한 설천위가 다가와 물었지만, 유예린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울어요.”
회색으로 변했던 세상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 *
[허, 생각보다 더 성공한 놈이구나.]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네놈 같은 녀석에게 그렇게 어여쁜 약혼자가 있을 줄이야…….]
“에헤이, 그게 무슨 소릴까? 섭섭해지려고 하네?”
늦은 밤, 객잔 뒤에 있는 공터로 나온 설천위는 새롭게 합류한 암영의적과 얘기하며 몸을 풀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맞아요?”
[암! 속도에 있어선 내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가 최고다!]
자신만만한 대답에 설천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인이 생각하기엔 그럴 수도 있지.
[암영의적의 말대로다. 속도만 놓고 본다면 섬뢰풍영보는 보법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보법이니.]
음, 천마 할배의 보증이면 또 믿을 만하지.
천천히 자세를 잡은 설천위의 앞에 선 암영의적이 그의 자세를 보곤 미간을 찡그렸다.
[네 녀석은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는 거냐?]
“……이게 최선을 다한 건데요?”
[그런데 어떻게 아까 가르쳐 주기 전이란 똑같을 수 있느냐!]
[허허,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천위의 재능은 자네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라고.]
[선배,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한숨을 내쉰 암영의적은 다시 설천위를 바라봤다.
재능은 더럽게 없는 놈이지만, 뭐 방법은 있다.
[먼저, 다리는 이 각도로!]
“악!”
[허리는 조금 뒤로!]
“억!”
암영의적의 손과 발이 내질러질 때마다 악 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자세가 틀어진다.
혼원패공의 능력으로 설천위와 이어진 암영의적은 천마보다 더 확실하게 설천위에게 개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통도 배 이상.
암영의적의 손이 닿을 때마다 설천위의 앓는 소리가 커졌다.
“아오! 좀 잘 좀 알려 줘 봐요!”
[이놈아! 이 이상 어떻게 더 잘 알려 주란 말이냐?]
“더럽게 아프기만 하잖아요!”
[네 녀석이 더럽게 못하는 걸 어쩌란 말이냐?]
그야말로 하나하나.
모든 것에 손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오질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프다며 투덜대는 설천위의 몸을 쉼 없이 때리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길 반 시진(약 한 시간).
연결되는 동작 몇 개를 대충 해결했다고 느낀 암영의적은 손을 뗐다.
[이 정도면 1초식 정도는 가능하겠구나. 해 봐라.]
“음…….”
암영의적의 말에 설천위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력이 높은 만큼 말해 준 것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대체 왜 못할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그러니 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묘한 자신감에 차오른 설천위가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발에 흐르는 내공의 힘으로 인한 가속.
한 걸음, 한 걸음.
여태보다 빠른 속도라 느낀 설천위가 기뻐하며 뒤를 돌아본 순간.
[……섬뢰(閃雷)가 아니라 완운(頑雲)이로구나.]
아주 그냥 큼지막해서 천천히 기어가는 구름이랑 비슷하네.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암영의적의 목소리에 천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일관성 있는 아이야. 재능 하나는 끔찍하게 없구나.]
* * *
“……크흠, 그래서 같이 다니자는 말이야?”
“예. 또 다른 사람이 설 공자를 노리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유예린의 모습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철백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네.
“나는 상관없네.”
“저도 괜찮아요.”
철백과 서하영의 동의에 설천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약을 자연스럽게 찾은 시점에서 굳이 유예린과 떨어질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행동할 때 조금 조심해야 하는 게 문제지만.
그 정도 귀찮음은 감수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아예 빠르게 정리하고 학관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예? 오늘부터 바로요?”
“응. 영약 때문에 몸은 멀쩡하니까…….”
“안 돼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유예린.
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오늘 하루는 절대안정이에요. 지금부터 방에서 운기조식을 하면서 쉬세요.”
“……응.”
거절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그 눈빛에 설천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뭔가 무서워.
그렇게 설천위가 방으로 올라가자, 유예린은 남은 두 사람을 보며 지도를 꺼냈다.
“일단 대충 조사는 끝났어요.”
“음, 빠르군.”
“설 공자를 찾기 위해 불러들였던 인원 모두를 조사에 투입했으니까요.”
인원.
그 말에 서하영은 가만히 유예린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유 소저는 섬서유가(陝西妞家) 출신이지.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섬서성에서 대문파의 반열까지 올라선 가문.
신흥삼가(新興三家)라 불리는 이 시대의 주류 중 하나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권세와 맞먹는 위치에 오른 이들.
그런 가문의 차기 가주 1순위가 바로 유예린이다.
‘……엄청 대단한 사람이랑 같이 있었던 거네.’
유가에 비하면 자신의 가문은…… 작디작지.
뭔가 살짝 위축된 서하영이 풀 죽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하하! 이 정도면 문제없겠군.”
철백의 호탕한 목소리가 서하영의 생각을 깼다.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
가문도, 재능도 없이 홀로 정한 길을 걸어가는 남자.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서하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철 소협도 하는데 내가 못 할 건 없지!
서하영이 철백의 자신감에 희망을 얻는 순간, 유예린은 어이없음을 얻고 있었다.
“……얘기는 잘 들은 건가요?”
“음, 아마 예상하기 힘든 적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까지는 이해했소!”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문제없다고 하나요?”
“지금이라면 일류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소.”
아니, 그러니까 왜 그것만으로 자신감을 느끼느냐고.
작게 한숨을 내쉰 유예린은 지도에 표시된 곳을 몇 군데 가리켰다.
“먼저 내일부터 이 지점들을 공격할 거예요.”
“여긴?”
“본채 주변에 세워진 망루들이에요.”
“아하.”
산적 주제에 꽤나 정성 들여 경계를 서는구먼.
철백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유예린은 다른 지점을 짚었다.
“문제는 여기예요.”
“그곳은?”
“아마 산적들이 찾는 무언가는 이쯤에 있을 것 같아요.”
점점 그쪽으로 인원이 모여들고 있으니 아마 확실할 거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는 게 무엇일까?
“뭘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아마 보물일 확률이 높겠죠?”
보물.
그 단어에 철백의 눈이 반짝였다.
호탕하고 소탈한 철백이지만, 돈의 부족함은 언제나 아쉬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서하영과 함께하는 여행에서 돈을 쩨쩨하게 쓰고 싶지도 않고.
철백과 서하영의 눈이 반짝이자, 유예린은 피식 웃으며 지도를 접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내일 출발합니다. 설 공자에겐 내일 또 설명할 거예요.”
“지금 설명해 주면 몰래 나갈 수도 있는 녀석이지.”
철백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유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는 뭐,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 두 분 모두 푹 쉬세요.”
저도 오늘은 조금 쉴 테니까.
* * *
“철백, 이 녀석 안 들어오네.”
방 안.
혼자 팔굽혀펴기를 하던 설천위는 슬슬 힘이 부족한 게 느껴지는 팔을 주물렀다.
조금 있다가 들어올 것처럼 하더니, 철백 이 자식 데이트라도 나갔나.
살짝 배알이 꼴리는 것 같은 기분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이놈! 또 딴짓이더냐!]
“에헤이, 거참, 이것도 수련이라니까요?”
[상체의 근력을 기르는 것은 좋다만, 네 녀석은 하체가 최우선이다.]
“예입.”
암영의적의 질책에 설천위는 다시 기마 자세를 취했다.
어찌 됐든 먼저 갔던 선인들의 조언이니 따르는 게 맞겠지.
뭐, 이 몸뚱이로 무공에 관해서 고집을 피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고.
[천위.]
한참 기마 자세를 이어 가던 설천위는 자신을 부르는 천마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이름만 딱 부르는 이 방식.
다른 사람이 접근했음을 알리는 거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금물.
입을 다문 채 타들어 가는 듯한 근육의 통증을 견디는 그 순간.
“공자, 마실 걸 가져왔어요. 문 앞에 두고 갈게요.”
응? 안 들어오고?
유예린의 목소리와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설천위는 천천히 기마 자세를 풀었다.
뭐가 됐든, 일단 확인해 보면 알겠지.
방문을 연 설천위는 쟁반 위에 놓인 주전자와 찻잔을 확인하곤 그걸 들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왔다.
“……왜?”
뭐 방으로 들어와서 단둘이 차나 마시자고 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당황스러웠겠지만…….
대체 이게 무슨 행동일까?
잠시 고민하던 설천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쉬라고 배려해 주는 건가 보지.
수련이나 마저 하자.
설천위가 다시 수련에 들어가는 그때, 방문 앞.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유예린은 작게 웃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경계심이란 건 조금씩 무너트려야 하는 법이다.
* * *
“그래서 저기를 정리하는 게 오늘 목표라고?”
“음, 그렇다고 하더군.”
“그러면 굳이 이렇게 같이 다닐 필요 있나? 한 세 군데는 공격해야 한다며.”
그럼 차라리 떨어져서 동시에 공격하는 게 낫지 않나?
설천위의 질문에 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여기엔 그냥 산적만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사파, 음 그러니까 녹림 말고 사천맹(邪天盟)의 개입이 있는 것 같다는 소리예요.”
“……사천맹?”
그놈들이 여기서 왜 나와?
아니, 그런데 대체 왜…….
“아.”
“이제 이해했죠?”
유예린의 질문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예린이 뭉쳐 다니자고 주장하는 이유.
간단했다.
며칠 전의 사건으로 유예린이 이곳에 있는 걸 들켰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상당히 거칠게 싸워서 산적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했던가.
즉, 유예린 수준의 강자가 있다는 소리가 되니 사천맹 측에서도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요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에 얼마나 제대로 된 무인을 보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상황을 이해한 설천위는 바뀐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모를 고수가 있다면 경계를…….
“으랴아압!”
저, 무식한 쉑히.
단숨에 달려드는 철백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싸워 볼까.
“쏴라!”
철백의 난입에 당황한 산적들의 고성과 함께 철백의 몸이 망루의 아래와 충돌한다.
우지끈!
“뭐, 뭐야!”
그러게 뭐냐, 그게.
강렬한 충격과 함께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는 망루의 모습에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린 순간.
“우오오오!”
불끈거리는 근육을 뽐내며 철백이 기어코 망루를 꺾어 버렸다.
왜 영약을 먹으라고 했더니 도핑약을 처먹고 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