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17화 (17/624)

제17화

16화-하계 과제 (2)

순간, 어색하게 식어 버린 공기에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할 때, 유예린이 작게 웃으며 서하영을 가리켰다.

“서 소저랑 저랑 함께 자면 문제없지 않나요? 마침 방은 2인실이니까.”

“아…….”

그런 말이었구먼.

어색하게 웃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군. 고맙소.”

눈이 나를 향해 있길래 설마 했네.

이렇게 떨리는 심장으로 유예린이랑 한방을 쓴다?

아마 심부전으로 죽을 거다.

설천위의 대답에 유예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서 소저, 저랑 같이 잠깐 올라갈까요? 방을 알려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서하영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는 유예린.

그 뒷모습을 잠시 보던 설천위는 객잔의 주인에게 다가가 방값을 지불했다.

“좋은 처자군.”

“뭐가?”

“유 소저 말이다. 저런 소저가 약혼자라니, 완전히 축복받았구먼.”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차는 철백.

그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서 소저한테 이를 거다.”

“뭐, 뭘?”

“뭐가 될진 너도 알 텐데?”

어린놈들이 발랑 까져서 말이야.

산적과의 전투 이후 자주 붙어 있는 철백과 서하영을 떠올린 설천위는 입술을 비틀었다.

생각해 보니까 띠겁네.

“아, 서 소저!”

그 순간, 계단에서 내려오는 서하영을 발견한 설천위는 즉각 그녀를 불렀다.

“어머, 자꾸 서 소저만 찾으시나요?”

문제는 그 등 뒤에서 나타난 유예린의 질문에 입이 막혀 버렸다는 거지만.

순간 말문이 막혀 꼼짝도 못 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철백이 흐흐, 하며 웃었다.

“천위, 아주 그냥 쑥맥이구먼?”

“……뭐라는 거냐.”

[껄껄껄!]

이 할배는 왜 자꾸 웃고만 있는 거야.

철백의 도발에 정신을 차린 설천위는 심호흡을 하며 유예린을 바라봤다.

어느새 서하영과 자리에 앉은 유예린.

철백과 함께 합석한 설천위는 자신만을 빤히 바라보는 유예린의 시선에 눈을 깔았다.

‘아 씨, 이거 왜 이러는데.’

게임을 할 때도 유예린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심장이 영 진정이 되질 않는다.

하긴, 생각해 보면 서하영도 상당한 미녀인데 딱히 여자로 보인 적은 없었다.

이 몸뚱이는 유예린 외에는 여자로 안 보는 건가?

그래서 오히려 유예린을 볼 때 이렇게 맛탱이가 가는 건가?

설천위의 사고가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유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 공자, 저는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요?”

“예?”

“왜 자꾸 서 소저만 찾는지요. 저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장난기가 섞인 미소.

그것조차 너무도 매력적이기에 설천위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멍청하게 버벅거릴 것 같으니까.

짧은 침묵의 시간.

말을 삼켜 위기를 넘긴 설천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단지, 아까 전엔 할 말이 있었던 것뿐이오.”

“흐음, 정말요?”

“물론…….”

“그런데 왜, 말투가 그러신가요? 원래 하던 대로 편하게 해 주세요.”

……원래 하던 대로가 뭔데?

설천위의 기억이 없는 설천위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설천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게임에서 설천위가 유예린과 만났을 때 어떻게 대화했더라?

이 둘은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이벤트상으로 만날 일이 너무 적어서 기억이 잘…….

필사적으로 기억을 쥐어짜던 설천위는 이내 한 장면을 떠올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그럼 편하게 할게. 유 매(妹).”

“음, 좋네요.”

환하게 웃는 유예린.

그 모습에 서하영은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진짜?

진짜로 좋아하는 거야?

매(妹)라는 호칭이 친한 여성에게 붙이는 것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것 가지고 이렇게 좋아한다고?

유예린의 미소가 진짜배기 미소임을 알아챈 서하영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 유예린이 시켰던 음식들이 나왔다.

“마침 잘됐네요. 휴식을 위해서 조금 사치를 부렸었거든요.”

상 위를 가득 채우는 음식들.

결코 1인분이 아니다.

최소 5, 6인분은 되는 양.

그 많은 음식을 앞에 두고, 유예린은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긴 여행의 보람은 먹을거리지요. 마음껏 드세요.”

* * *

식사가 끝나고, 일행은 간단히 차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어머, 역시 그 산적 토벌 때문에 오신 건가요?”

“예. 그렇죠. 천위가 이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음, 나쁘지 않은 선택이죠. 실제로 저도 이렇게 왔으니까요.”

유예린의 대답에 철백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예린의 강함은 유명하니 이 산적 토벌 자체는 큰 문제 없이 끝낼 수 있을 터.

상당한 호재라 볼 수 있다.

“그럼, 같이 다닐까요?”

그리고 기다리던 질문이 나와 철백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아니, 유 매는 서 소저랑 따로 움직이는 게 좋겠어.”

“왜죠?”

“유 매는 너무 강하니까. 우리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안 돼.”

단호한 대답.

어느새 상당히 긴 시간 유예린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게 된 설천위는 최대한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나랑 철백은 웬만한 산적 상대로 도망칠 수 있는 실력이 있으니까.”

“서 소저랑 제가 함께하는 건요?”

“서 소저를 네가 맡아 주면 우리가 좀 더 위험을 감수하며 싸울 수 있어.”

“천위.”

서하영을 마치 짐처럼 취급하는 그 말에 철백이 설천위를 보다 이내 서하영을 바라봤다.

설천위의 말을 부정하지도 못하고 풀이 죽은 서하영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

철백은 이런 순간에 착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둥근 남자가 아니었다.

입술을 깨문 철백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유예린을 바라봤다.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길입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서 소저의 의견을 들어 보고 난 뒤에 결정하죠.”

고개를 돌려 서하영을 바라본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럼 공자, 서 소저는 제가 맡을게요. 단, 저도 함께 산적들을 공략할 겁니다.”

“응, 그래 주면 우리야 좋지. 우리에게 올 적이 줄어들면 부담도 줄어드니까.”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물론이지. 이쪽도 목숨이 최우선이거든.”

고작 산적 따위에게 당할 순 없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유예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나저나, 세 분이 친해지신 계기가 궁금하네요.”

* * *

“천위, 이게 맞았을까?”

다음 날 아침, 유예린, 서하영과 떨어진 채 산에 들어온 철백은 영 찜찜하다는 듯이 설천위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랑 함께 왔는데 이렇게 보자마자 맡기고 그런 건…….”

“아니, 차라리 이게 낫지. 우리랑 긴 여행을 하면서 여러모로 불편했을 테니까.”

여행이란 게 낭만이 가득한 단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생리현상은 말할 것도 없고 타인, 그것도 이성이 함께라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기서 며칠이나 수색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차라리 유 매랑 함께하는 게 편할걸?”

“……그것도 그런가?”

일리가 있는 말이네.

철백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설천위는 연신 눈을 돌리고 있었다.

굳이 유예린을 떼어 놓고 온 이유.

당연히 영약의 수색 때문이다.

철백과 서하영이라면 몰라도 유예린은 이상한 점을 분명 눈치챌 테니까.

유예린이 설천위의 약점이듯, 설천위도 유예린의 약점이다.

속 안의 내용물이 바뀌었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가늠도 되질 않는다.

몸의 반응도 그렇고, 유예린과는 최대한 접촉을 피하는 게 맞겠지.

[네 녀석……. 뭔가 찾고 있구나?]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어색하게 웃었다.

감도 좋은 영감탱이.

[흠…….]

대체 뭘 찾고 있는 것인가.

천마가 그런 고민에 빠지는 그 순간.

“천위!”

“응?”

“찾았어. 사람의 흔적이야.”

아니, 벌써?

산적 놈들 좀 은밀히 다닐 것이지…….

유예린까지 와 있는 상황이다.

산적 토벌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터.

최대한 접촉이라도 미뤘어야 했는데.

하지만 여기서 빠지는 것만큼 이상한 것도 없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영약에 대한 욕심을 잠시 접었다.

앞으로 펼쳐질 실전에서 영약을 생각하다가 죽을 순 없으니까.

“어느 쪽이야?”

“저쪽.”

“좋아.”

철백은 무식하게 수련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내공이 없이도 할 수 있는, 지식의 습득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약초학에다 식생학, 추적술까지.

이렇게 쓸모 있는 녀석은 흔치 않다.

철백의 대답에 설천위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일단, 흔적 자체는 시간이 꽤 지난 듯하다.

대충 칼로 쳐낸 가지에 수분이 상당히 말라 있었으니까.

문제는.

“뭔가 찾고 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설천위의 말에 철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다니던 길이라면 칼로 나뭇가지를 쳐낼 필요가 없다.

굳이 길이 아닌 곳으로 다닐 만한 이유.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무언가를 찾을 때다.

“사냥을 나왔을 수도 있겠어. 일단 흔적을 따라가 보자.”

“그래.”

설천위의 말에 철백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상당히 느렸지만, 다행히 흔적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추적을 이어 나가던 순간.

“철백.”

“음, 확인했다.”

두 사람은 앞서가는 무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활과 도로 무장한 무리들.

숫자는 다섯.

어느 정도 발달한 육체는 저들이 몸으로 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라는 것을 증명해 줬다.

“수준은?”

[이류 이하, 삼류 이상이다.]

“아마도 이류 이하, 삼류 이상.”

“할 만하겠군.”

철백의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이 없는 철백은 통상적인 무인의 기준으로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천마의 말로는 상성만 괜찮다면 이류 끝자락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반면 자신은 아직도 무공의 경지로는 삼류다.

몇 번이나 되는 강자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천마의 조력 덕분이다.

합당한 지시, 최적의 훈련.

이것들이 어우러져 적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뿐.

하지만.

“후우.”

이젠 다르다.

배천문과의 싸움에서 얻은 보상은 훈련장이 끝이 아니니까.

[허 참, 다시 봐도 신기하구나.]

설천위가 자신 있게 하계 과제를 수행하기로 결심한 첫 번째 근거.

[영각(靈覺)]

잠들어 있던 혼을 깨운다.

그 결과 얻는 것은 하나.

“간다.”

“오냐.”

철백에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설천위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간다.

엄청난 속도.

“뭐, 뭐냐!”

달려오는 설천위에게 반응한 산적들이 제대로 무기를 꺼내 들기도 전에 설천위는 이미 그들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본래의 설천위라면 절대 낼 수 없었던 속도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영각(靈覺)].

혼에 새겨진 것을 백 퍼센트로 끌어내는 스킬.

즉, 천마와의 수련으로 얻은 것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다는 소리다.

[섬벽권(閃霹拳) 제1초 일벽(一霹)]

일류의 빈틈조차 찌를 수 있었던 신속의 일격이 설천위의 재능을 뛰어넘어 발휘된다.

그의 육체가 죽여 버리던 기술의 위력을 혼이 되살린다.

“컥!”

단숨에 안면이 부서진 산적 하나가 쓰러지고, 그의 곁에 있던 다른 산적이 다급하게 도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설천위에겐 느렸다.

설천위의 혼은 이미 천마의 수행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다급히 휘두르는 어설픈 도를 피하며 설천위의 주먹이 다시금 산적의 안면에 꽂혔다.

이윽고 철백까지 도착하고, 산적들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너무도 쉬운 전투에 두 사람이 숨을 고르는 그 순간.

“생각보다 더 강하구나.”

섬뜩한 살기가 두 사람을 덮쳤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