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15화-하계 과제 (1)
네 과목 중 세 과목이 떨어졌다.
기초 내공학(內功學)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낙제했다.
이유는 뭐, 하나다.
시험을 전부 망쳤으니까.
천마가 가르쳐 주는 무공 하나조차 습득하기 벅찬 설천위가 다른 세 과목의 무예를 흡수하는 건 무리였다.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낙제는 당연한 결과다.
[끌끌끌, 이젠 자타공인 낙제생이구나.]
“타인은 몰라도 자신은 아니거든요?”
[허, 인정이 느린 녀석이구나.]
천마의 놀림을 콧방귀와 함께 넘긴 설천위는 다시금 수련에 집중했다.
준비는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지 않으니까.
이번에 토벌하려는 산적은 후에 서브 스토리로 나오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산채가 형성되기 좋은 위치인 거겠지.
설천위가 알고 있는 스토리의 시작점까지 남은 시간은 약 9개월.
지금이라면 그 지역엔 그 녀석들이 없다.
이 무림의 제1 흑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녀석들.
사혈천(瀉血天).
피에 미친 광인들.
이 녀석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이 세상을 피로 씻는 것.
뭐, 혈교의 사촌쯤 되는 놈들이다.
여하튼, 이 녀석들의 손이 닿은 산채를 토벌하는 게 게임에서 나온 서브 퀘스트다.
보상도 꽤 좋고, 사혈천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기에 대부분의 유저들이 하는 퀘스트.
그런데, 또 여기에 히든 피스가 하나 숨어 있다.
무협의 꽃!
영약!
내공 스탯을 상승시켜 주는, 그 영약이 이 산채 주변에 잠들어 있다.
그것도 상당히 상급의 녀석으로.
이것만 먹어도 성장 속도를 크게 올릴 수 있을 터.
무조건 챙길 필요가 있다.
마침 적당한 구실도 있겠다.
실전을 통해 경험치를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정확한 측정도 할 겸, 하기 딱 좋은 임무다.
영약이라는 보상 외에도 할 이유가 충분한 임무니까.
이제 남은 건 영약을 어떻게 찾느냐인데…….
게임 속에선 생각보다 강한 적의 수준에 놀라 도망치다가 발견한다.
뭐 그런 흐름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딱!
[어허, 또 잡생각이 길어지는구나.]
“커흑!”
[잡생각을 많은 것은 상당히 좋지 못한 버릇이다. 사고의 속도가 빠른 건 좋으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니라.]
천마의 지적에 설천위는 얌전히 이마를 문질렀다.
맞는 말이니까.
[어허, 손이 놀고 있구나.]
“예입.”
날카로워지는 천마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다시 초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흠, 배우는 게 날로 빨라지는구나.’
특히, 자신이 두드려 패면 습득 속도가 더 빨라진다.
혼에 직접 고통을 주는 충격요법이 잘 통하리란 건 짐작했는데, 예상보다 더 잘 먹힌다.
거기에, 그 일류 산적 놈을 쓰러트린 뒤로는 견뎌 내는 훈련의 강도도 높아졌다.
옛날이라면 한 번 더 못 했을 걸, 진짜 억지로 쥐어짜서라도 한 번 더 해내는 차이.
그 한 번의 차이가 성과의 차이를 만든다.
성장.
어린 후기지수의 성장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이 녀석은 뭔가 달랐다.
마치 재능 자체가 성장하고 있는 느낌?
거기에 그 기묘한 회복술도 있고.
술법 계열의 능력 같은데, 이 녀석은 딱히 제대로 된 술법을 익힌 적 없으니 아마 선천적인 것일 터.
여태껏 쓰지 않았던 것은 익숙하지 않아 제대로 쓰지 못하던 것일 확률이 높다.
아마 저번 전투에서 사용법을 깨달은 것이겠지.
‘영적인 재능이 이렇게 무(武)로 이어지다니.’
혈패황 그 괴물이 그렇게 강했던 것도 나름 납득은 가는군.
무의 수준은 자신보다 낮았지만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거란 장담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혈패황.
아마 몇 년만 더 살았어도 진짜 신(神)에 닿는 괴물이 되었을 거다.
혼원패공이라는 특이한 무공의 효과인가, 아니면 그저 그들 본인의 재능인가.
잠깐 고민하던 천마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냈다.
아직까진 모인 정보가 부족하다.
아마 설천위가 성장한다면 확인할 수 있겠지.
‘……이번에는 나도 자리를 잡아야 하나.’
혈패황을 따라갔던, 자신의 후손을 떠올린 천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됐든, 이 녀석으로 인해 자신의 혼생(魂生)이 상당히 재미있어지리란 건 확실했다.
* * *
“끄으어어어! 시원하구먼!”
이른 아침, 짐을 챙겨 학관을 나온 철백은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너도 전부 낙제라며?”
“하하하! 내공 없인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
설천위의 질문에 호쾌하게 웃은 철백은 고개를 돌려 서하영을 바라봤다.
“서 매는?”
“저도 다 낙제예요…….”
“내공도 있고, 신체 능력도 좋은데 대체 왜 낙제하는 거냐.”
풀죽은 서하영의 대답에 혀를 차는 설천위.
그 모습에 천마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권법엔 재능이 없나 보구나.]
정도가 심하잖아요.
아무리 권법에 재능이 없어도 그렇지, 짧은 삶이라도 평생을 권법만 연마했는데 저 정도 수준이라는 게 말이 되나?
설천위의 눈빛에 그 속내를 읽은 천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능이 없기는 하구나. 하지만 사람의 재능이란 건 모르는 법이다. 너 같은 녀석도 영적인 재능이 있으니까.]
너 같은 녀석이라니, 표현이 좀 섭섭하네.
천마의 말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다시 서하영을 바라봤다.
선이 부드러운 귀여운 외모.
반대로 키는 조금 커서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170cm는 넘겠지.
거기에 신체 능력에 걸맞게 잘 단련된 탄탄한 팔다리.
무술을 하기엔 정말 축복받은 육체…….
“응?”
“뭐 하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설천위는 철백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니, 설마.
에이, 아니겠지.
머릿속에 떠오른 한 줄기 상상을 부정하며, 설천위는 걸음을 뗐다.
‘……혹시 모르니까 실험 한번 해 볼까.’
* * *
“후, 생각보다 꽤 멀군.”
“가는 데만 최소 나흘이니까.”
첫날 저녁.
상당한 거리를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한 설천위 일행은 객잔에 방을 잡았다.
그리고 1층에서 식사.
오는 내내 떠들고서도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아 있는 서하영의 수다를 들으며 만두를 집었던 설천위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왜, 왜요?”
“응?”
“뭘 그렇게 갑자기 빤히 보는 거예요?”
게슴츠레해진 서하영의 눈.
그 모습에 설천위는 어색하게 웃으며 철백을 바라봤다.
아예 관심도 없는지 철백은 신나게 입에 음식을 욱여넣고 있다.
그래, 뭔 상관이냐.
작게 결심을 한 설천위는 서하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 다른 무기는 쥐어 본 적 있어?”
[흐음, 그건 흥미로운 발상이구나.]
천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권법엔 처참하리만큼 재능이 없지만 다른 분야에는 재능이 있을 수도 있다.
뭐, 검법이든 권법이든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 두 가지 사이에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한 법.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순 없다.
“예? 다른 무기요? 당연히 없죠! 저희 가문은 권법 하나로 우뚝 선 집안인데!”
그렇게 유명한 무가도 아니잖아.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한 번 삼킨 설천위는 다시 서하영을 바라봤다.
역시, 닮았다.
게임 내에 등장했던 것과 헤어스타일이 달라서 처음엔 몰랐는데.
그 캐릭터랑 닮았다.
창절(槍絶).
이름은 모른다.
설정상 가문을 나오며 이름을 버린 캐릭터였으니까.
무력은 뭐, 말할 것도 없다.
학관 편에서는 절정(絶頂)에 도달한 서브 보스 중 하나이고.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선 최저 수준이 초절정(超絶頂)으로 나온다.
조건에 따라 화경(化境)에 도달하기도 하고.
그리고 주력은 별호에 나와 있듯 창이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인.
그 공략의 까다로움은 말로 하기도 힘들다.
서브 보스인 만큼 뉴비들은 아예 안 잡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
이쪽도 딱히 동료로 들이거나 히로인으로 공략할 수 없어서 큰 관심은 못 받는 캐릭터인데…….
아무리 봐도 닮았단 말이지.
이 헤실헤실 웃는 여자랑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만 있던 그 캐릭터랑.
“아니, 왜요. 갑자기?”
“아, 별건 아니고 다른 무기에는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에이! 놀리지 말아요! 권법에 이렇게 재능이 없는데 다른 무기라고 있으려고요?”
“그 말, 스스로 하면 너무 아프지 않냐.”
“……조금요.”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이 그 냉혈한 같은 창절일 리가 없지.
학관 편의 라스트 보스에 붙어서 사람들 몸에 수천 개의 바람구멍을 만들어 내는 캐릭턴데.
하지만 혹시라는 건 있지.
“뭐, 정말 막히면 다른 무기라도 한번 써 봐. 창이라든가.”
“창이요?”
“너, 거리 감각이 개판이잖아. 오히려 긴 무기를 들면 잘할지도?”
“에이! 거리 감각이 개판이면 더 안 되죠. ……그리고 개판 아니거든요!”
삐졌다는 듯이 입술을 삐쭉이는 서하영을 보며 웃은 설천위는 다시 만두를 집었다.
밥이나 먹자.
* * *
“생각보다 이동속도가 빠르군.”
한 객잔. 평범한 무복을 입은 중년 남성은 미간을 찡그리며 서신을 바라봤다.
이 정도 속도라면 이쪽도 조금 더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다.
뭐, 돈은 충분히 되니까 상관없지만.
“쥐뿔도 없는 것들이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덕분에 먹고살 수 있으니 이쪽이야 좋지만.
서신을 접어 품에 넣은 남성은 의뢰 내용을 떠올렸다.
“사람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법이지.”
목표를 떠올리는 남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깃들었다.
* * *
나흘째.
정말 열심히 걸은 세 사람은 나흘째에 정확하게 산채 근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상당히 늦은 저녁이라 해가 다 진 뒤였기에 세 사람은 급히 객잔을 찾았다.
“아우, 역시 조금 더 여유 있게 올 걸 그랬어요.”
“하루라도 일정을 줄여야 돈을 아끼지.”
서하영이 있어서 그나마 방을 두 개 잡지, 만약 남자만 셋이었다면 무조건 방을 하나 잡았을 거다.
이 중에서 가문에 제대로 된 지원을 받는 건 서하영뿐이니까.
나머지 둘은 진짜 거의 빈털터리다.
저번 임무에서 산적을 잡은 포상금이 없었다면 아마 학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정도로.
마을에 있는 객잔은 하나.
설천위 일행은 곧바로 그 객잔으로 향했다.
엄청나게 허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다.
적당한 수준에서 숙박비를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만족한 설천위가 문을 여는 순간.
“어머?”
설천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객잔 전체가 화사하다고 느낄 정도로 멍해지는 머리.
눈은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꽂힌다.
“……유 소저.”
순간, 유예린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설천위는 눈치채지 못했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바빴으니까.
힘겹게 유예린과 마주하고 있는 설천위 뒤로 철백과 서하영이 들어왔다.
“……은검(隱劍)?!”
“이런, 세 분이서 오신 건가요?”
서하영과 철백의 등장에 유예린은 아쉽다는 듯 세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 이 객잔에는 빈방이 하나밖에 없어서요.”
“예?! 정말로요?!”
“예. 마침 이 마을을 찾는 상인들이 왔다고 하더군요.”
유예린의 대답에 그제야 주변을 시야에 담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 몇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마 약초나 가죽 따위를 사기 위해 온 이들이겠지.
“이런……. 어쩔 수 없이 나랑 천위는 노숙이군.”
철백의 아쉽다는 목소리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서 매, 방을 잡아. 나랑 천위는 밖으로…….”
“저랑 같이 자면 되죠.”
순간 말을 멈추는 철백.
세 사람의 시선은 단숨에 유예린에게 꽂혔다.
자신들의 청력을 의심하는 듯한 그 모습에 유예린은 설천위를 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저랑 같이 자면 되죠.”
“에?!”
서하영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