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14화-진실 공방 (3)
“그래서, 원하는 건 있나?”
학관장실.
널찍한 방엔 상당히 호화로운 가구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화려하게 꾸며진 가구들 속에서 유일하게 팽후의 책상만이 검소했다.
“아, 나머지는 부학관장이 넣어 둔 거다. 내 물건은 이 책상뿐이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웃은 팽후는 자신의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서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뭔지 슬슬 듣고 싶은데.”
입꼬리를 올린 팽후를 보며 설천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원이요.”
“지원? 그건 등급을 올려 달라는 소린가?”
“아뇨. 등급에는 딱히 불만 없습니다.”
계(癸)가 얼마나 개꿀인데.
숙소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빼곤 별 불만이 없다.
시간도 자유롭고.
이쪽에 필요한 건 훈련을 위한 지원이다.
성장에는 필요한 게 많으니까.
“수련을 위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수련을 위한 장소? 연병장을 쓰면 될 텐데?”
“그게, 이 녀석 때문에 무거운 무게의 철과 바위를 둘 공간이 필요합니다.”
설천위는 철백의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흠.”
설천위의 대답에 팽후는 철백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한눈에 그의 상태를 파악한 팽후는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옥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문제없습니다.”
즉답.
그 담담한 대답에 팽후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너처럼 단단한 녀석은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현실은 별개지만.”
가볍게 손뼉을 친 팽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적당한 장소에 하나 마련해 주마.”
“진짜 됩니까?”
“그럼. 넘치는 게 땅이니까. 적당한 훈련장 하나 마련해 주는 건 일도 아니지.”
하긴 무림학관이 겁나 크긴 하지.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를 가만히 바라보던 팽후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럼, 이만 가 봐. 설마 바라는 게 더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설천위와 철백은 그대로 학관장실을 나갔다.
그렇게 홀로 남은 팽후.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정파의 미래가 그렇게까지 어두운 건 또 아니란 말이지…….”
* * *
“우와! 이걸 벌써 이렇게 만들어 줘요?!”
사흘.
약속한 훈련장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공식적으로 설천위와 철백이 허락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는 훈련장.
그곳을 방문한 서하영은 이곳저곳을 살폈다.
“으음……. 대단하네요. 이걸 진짜 들어요?”
“그렇지 않으면 훈련이 안 되니까.”
철봉과 바위를 연결한 운동기구를 살피는 두 사람에게서 떨어진 설천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이 정도면 됐죠?”
[음, 충분하다. 이제 슬슬 초식을 익히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던 차였으니.]
임시로 쓰던 그 공터는 이제 너무 좁았다.
속도를 중시하는 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선 꽤나 널찍한 공간이 필요하다.
만족스러운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뭐가 됐든, 일단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게 좋겠네.
적당히 가꾸기만 하면 기숙사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승급시켜 달라고 하지 않은 거예요? 저였으면 무조건 승급시켜 달라고 했을 텐데.”
“필요 없으니까.”
어느새 다가온 서하영의 질문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승급은 이쪽이 실력을 증명하면 자연스럽게 오르겠지만 부학관장이 직접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건 흔치 않잖아?”
여러모로 시험하기 위해 출혈을 감수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런 혜택은 다시는 못 받을 거다.
“아, 그리고 너도 여기서 수련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예? 정말요?!”
“그래, 너도 계급(癸級)이라 어디 적당한 데 숨어서 연습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그런 데보단 여기가 훨씬 낫지.”
“고맙습니다!”
서하영의 감사 인사를 대충 손을 저으며 받은 설천위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대신, 너도 기초 훈련은 같이하는 거다.”
“예?”
“나랑 철백은 기초 훈련을 같이하거든. 너도 거기에 합류다.”
“아하, 옙! 알겠습니다!”
차렷 자세로 대답하는 서하영.
그 모습에 설천위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맺히고, 철백은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 *
훈련장이 신설되고 약 이틀 뒤.
설천위는 오늘도 달리고 있었다.
“뭐 해요? 안 뛰어요?”
“너, 너 왜 이렇게 잘 뛰어!”
“그야 체력은 무인의 기본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체력의 서하영과 함께.
그러고 보니 서하영 얘, 그 산적들이랑 싸울 때도 숨 하나 안 흐트러졌었지?
그땐 아예 생각도 못 했었는데, 이 녀석…….
[껄껄껄, 재능의 질이 다르구나!]
천마의 목소리가 설천위의 짐작에 못을 박는다.
재능.
그렇다. 서하영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설천위나 철백에겐 없는, 무(武)의 기본적인 재능을.
“자자! 뛰어요!”
“으아아아아!!”
엄청난 수준의 기초 체력.
내공을 기반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근력.
그 모든 걸 갖춘 서하영은 기초 체력 훈련에선 설천위와 철백을 압도했다.
그런데.
“아악!”
“몇 번을 말해! 그렇게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
“하지만…… 충분히 될 것 같았는데요.”
“안 됐잖아!”
“우으.”
전투에 대한 감각이 너무 없다.
일단, 주먹을 쓰는 게 서툴다.
서툴러도 너무 서툴다.
이렇게 서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툴다.
아니, 거의 한평생을 권법만 익힌 사람이 대체 어떻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그 의문에 천마도 유심히 서하영을 살피는 사이.
어느새 학기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 되겠군요.”
화경(化勁)의 기초 수업에 들어온 설천위는 화영의 눈길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뭔가 죄인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수업 내내 다른 훈련만 해 놓고 낙제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런 설천위의 모습에 살포시 웃은 화영은 이내 시선을 돌려 다른 학생들을 바라봤다.
“먼저 고생했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네요.”
“아닙니다!”
“후후, 대답이 좋군요. 아직 살 만한가 보네요.”
학기의 막바지가 되면 온갖 시험들에 치인 학생들은 점점 산송장처럼 변한다.
이 화경의 기초 수업은 그나마 빨리 끝나는 편이라 아직 학생들이 쌩쌩했다.
화영의 웃음소리에 학생들이 차마 따라 웃지 못하고 있는 사이, 화영의 조수가 학생들에게 종이를 하나씩 나눠 줬다.
“먼저 이번 학기의 시험 내용입니다. 적혀 있는 대로 그날 시험을 볼 테니 준비해 오세요.”
“예!”
이렇게 친절할 수가.
화영의 꿀 같은 배려에 학생들이 기쁨의 눈물을 삼키는 사이,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나도 모르겠네.’
[하나도 모르겠지?]
아 씨.
천마의 도발에 미간을 팍 찡그린 설천위는 낄낄거리고 있는 천마를 노려봤다.
배천문을 쓰러트린 뒤로 노골적인 시비는 없지만, 설천위는 아직도 계(癸)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다.
당연히 주위의 시선도 상당히 곱지 못한 상황.
눈에 띄기 싫어서 대답하지 않다 보니 이렇게 일방적으로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끌끌끌, 하지만 걱정 말아라. 이 학관도 그렇게까지 무정한 놈들은 아니거든.]
‘정말요?’
[암, 낙제생들의 부족한 학점을 메울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지.]
설천위의 눈빛을 읽은 천마의 대답에 설천위는 잊고 있던 기억 중 하나를 꺼냈다.
‘여름 과제!’
갑(甲)을 노리는 유저들이 필수적으로 피하는 퀘스트!
이유는 당연히 학점을 꽤나 넉넉히 주기 때문에 졸업이 빨라져서이다.
보상이 꽤 쏠쏠하지만 졸업이 빨라지는 만큼 갑을 달긴 힘들어지니 어쩔 수 없이 피하는 느낌?
여하튼, 이 여름 과제는 좋다.
부족한 학점도 채울 수 있고, 수련도 할 수 있고, 보상도 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
[음? 뭐냐, 알고 있는 거냐?]
갑자기 바뀐 설천위의 눈빛에 천마가 재미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 녀석은 모르는 것도 엄청 많은 주제에 이상한 건 또 많이 알고 있단 말이지.
천마가 작게 혀를 차는 사이, 설천위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여름 과제.
이걸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성장의 가속도가 달라질 테니까.
* * *
“그래서, 이 임무를 하자고?”
“응.”
저녁 시간.
훈련장에 모인 철백과 서하영은 설천위가 가져온 종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여기 이미 녹림에 들어갔다고 소문난 산채 아니야?”
“응. 맞을걸? 그러니까 여름 과제로 나왔겠지?”
“위험하지 않아요? 녹림에 들어갈 정도면 일류 고수가 최소 셋은 있다는 소린데.”
“에이, 그 정도는 아니래. 다 산적 놈들이 퍼트린 헛소문이지.”
천마의 보증이다.
아마 이 산채에도 많아 봤자 둘 정도일 터.
거기에.
“우리는 정면 돌파를 하려는 게 아니야. 야금야금 괴롭히려는 거지.”
“그런 것도 임무 완수로 쳐줘요?”
“아니, 그렇게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빈틈이 보이면 물어뜯어야지.”
“그럼 결국 정면 대결이잖아요!”
“에이, 이거 우리만 하겠어? 다른 애들도 꽤 할 텐데?”
여름 과제라는 게 그렇다.
임무라는 이름으로 공표된 만큼 공통의 목표가 된다.
당연히, 설천위는 그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온 거다.
너무 사람이 많이 몰리진 않겠지만, 한둘 정도는 시도해 볼 만한 임무.
“아마 상위를 노리는 녀석 중에 한두 녀석 정도는 여기로 갈걸?”
“그 틈을 타서 우리도 숟가락을 얹어 보자?”
“정답!”
설천위의 대답에 철백은 미간을 찡그렸다.
영 찝찝한 탓이다.
그의 마음을 읽어 낸 설천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야. 우리는 딱 우리가 한 만큼의 공적만 인정받으면 돼.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솔직히 실전 경험이잖아?”
“음.”
“우리랑 겹치는 쪽도 위험이 줄어드니 좋고, 우리도 조금 더 안정적인 상황에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좋고. 둘 다 좋은 거라고.”
“으음.”
“자, 쓸데없는 고민은 그만하자. 갈 거지?”
설천위의 확인에 잠깐 망설이던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찜찜하긴 해도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이런 식으로 경쟁하라고 만들어 놓은 제도일 테니 이용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하지만 이 아쉬움도 자신의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다.
강하다면 이런 아쉬움 따위 만들 일 없이 싸웠겠지.
철백이 어느새 자기반성에 빠진 사이,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리며 종이를 바라봤다.
이 산채가 있는 곳.
그곳에 설천위가 노리는 것도 있다.
* * *
“흐음? 여름 과제요?”
홀로 있는 방 안.
유예린은 허공을 향해 물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그런 유예린의 질문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예. 아무래도 실전 경험을 위해 다른 사람이 노릴 만한 임무를 고른 것 같습니다.”
“흠흠, 그건 좋네요.”
작게 웃은 유예린은 찻잔을 내려놨다.
“저도 그 임무에 참여합니다.”
“……정말로 가실 겁니까?”
“예.”
“아가씨께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임무입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충언에 유예린은 잔잔히 웃으며 그저 찻잔을 어루만졌다.
그 모습이 답답해진 부하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입에 담았다.
“고작, 그런 쓸모없는 남자 때문에 아가씨께서…….”
털썩.
순간, 바닥에 떨어진 부하는 떨리는 손발을 억지로 바닥에 눌러 고정시켰다.
분노와 함께 미약한 살기가 담긴 그 싸늘한 눈빛에 부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입조심하세요.”
나지막이 말한 유예린이 찻잔을 드는 순간, 부하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진다.
그 순간, 다시 천장의 어둠으로 몸을 숨기는 부하.
자신의 실력은 일류 끝자락.
그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제압한 아가씨의 모습에 부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병(丙) 등급의 힘…….’
후기지수라는 탈을 벗어난, 진짜 괴물들의 전당에 발을 들인 상위 등급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