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13화-진실 공방 (2)
‘이런, 미친!’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 것을 인지한 배천문은 그 즉시 몸을 비틀었다.
생각보다 더 빠르긴 하지만, 그래 봤자 계(癸)의 버러지다.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이쪽이 밀릴 이유가 없다.
몸을 비틀며 검을 뽑은 배천문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최단 거리의 견제 공격.
인간인 이상, 이 공격을 피하려면 한 번 뒤로 빠지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배천문 자신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흠?”
한 교관의 목소리와 함께 어느새 한층 더 자세를 낮춘 설천위가 배천문을 노려봤다.
검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검의 품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올라오는 배천문의 팔을 중간에서 막는다.
동시에 남은 한 손은 배천문의 가슴을 노리고 뻗어 낸다.
그야말로 완벽한 공방일체(攻防一體)의 돌격.
허나.
“큭!”
배천문 또한 설천위의 주먹을 받아 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공격이었지만, 애초에 신체 능력의 급이 다르다.
설천위가 무공으로 끌어올린 최대 속도는, 배천문의 속도보다 조금 빠른 정도일 뿐이니까.
“생각보다 더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는데?”
한 번의 공방이 끝나고, 일전에 화영과 함께 설천위의 대련을 봤던 백주훈은 입꼬리를 올렸다.
대련장 위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화영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죽도록 단련하더니, 어느새 신체 능력이 상당히 좋아졌다.
그래 봤자 조금 단련한 일반인 수준이지만…….
‘무언가 계기가 있었다는 건 확실하네요.’
십 년이 넘게 정체되어 있던 성취가 두세 달 만에 이루어진 건 분명 그만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일 터.
그렇기에 궁금했다.
재능의 부족이라는 이유로 정파에서 버림당하다시피 한 아이를 이렇게까지 끌어올린 사람이 대체 누굴까.
어지간히 재능이 없지 않는 이상, 계(癸)로 떨어질 일은 없다.
거기는 진짜로 후에 맹에 들어와도 짐밖에 되지 않을 이들을 모아 놓은 곳이니까.
어떤 의미론 정파의 자비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에 전장에 나가 무의미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아 주는 거니까.
물론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 그 마지막 자비를 무자비한 지옥으로 바꿔 놓긴 했지만.
순간, 쓸데없는 생각이 길었다는 것을 깨달은 화영은 다시 대련에 집중했다.
배천문이 설천위의 공격을 어떻게든 받아 내긴 했지만, 거기까지다.
애초에 전투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설천위에게 공격당하는 것 자체를 치욕으로 여겨 철저하게 안전만을 생각하는 배천문.
설령 조금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확실하게 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설천위.
진짜 어지간히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승자는 확실하다.
“이, 이런!”
그렇기에 검을 붙잡힌 배천문의 모습에 교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싸늘해졌다.
무기를 들고 있으며, 계급조차 높다.
심지어 연차도 더 많다.
그런데, 결과는?
패배다.
그것도 오만함이 불러온 패배.
아마 나름의 각오를 세우고 싸웠다면 설천위도 이렇게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을 터.
무인으로서 최악의 패배다.
검사가 검을 붙잡혔다.
이건 권사가 손발이 묶인 거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이어질 결과는?
뻔하다.
설천위의 주먹이 배천문의 몸을 노린다.
규칙대로 급소가 아닌, 적당히 고통을 주는 부위들.
이 주먹이 작렬하면 그 순간 교관들은 승패를 결정지을 것이다.
‘안 된다! 안 돼!’
그렇기에 배천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지면, 살아갈 수 없다.
고작해야 계급(癸級) 따위에게 졌다는 오명을 남길 순 없다.
절박함이 이성을 뛰어넘는 순간, 배천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암경(暗勁).
은밀함을 무기로 한 살수(殺手).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사용하는 꼼수다.
설령 급소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코 친선 대련에서 쓸 만한 수법은 아니다.
한데 배천문은 망설임 없이 급소를 노렸다.
검을 놓지 않고 있던 오른손의 손목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바늘.
그 바늘이 설천위의 눈을 노리고 날아간다.
그 바늘이 쏘아진 순간, 배천문은 현실을 인지하고 살짝 눈동자가 흐려졌다.
암경이라니 이런 기술을 쓰면…….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들키지 않으면 돼!!’
배천문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승리 후에 바늘만 잘 회수하면 된다.
그럼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발려 있는 독이라고 해 봤자 가벼운 마비독 정도다.
안 걸릴 수 있다.
그래.
승자는 나다.
네 녀석은 잃어버린 시력을 품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라.
나에게 덤빈 것을, 감히 버러지 주제에 위로 고개를 치켜든 것을.
배천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지어진 그 순간.
[속행이다.]
바늘을 쳐 내려던 화영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손길을 멈췄다.
부학관장의 전음이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이를 악문 화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만약, 설천위의 몸에 장애가 남는다면 부학관장을 붙잡고 교관직에서 물러나리라.
그러한 각오와 함께 화영이 온 신경을 바늘에 집중한 그 순간.
[쓰레기로구나.]
나지막한 천마의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는 몸을 비틀고 있었다.
설천위는 상당히 화가 난 상태다.
이번 대련 내내 천마의 조언은 받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여 결과를 내놓고 있었던 거다.
무려 이류(二流).
현대로 따지면, 거의 웬만한 프로 이상의 전투력이다.
그런 이류를 혼자 힘으로 잡아내고 있던 것이다.
그 짜릿함.
그 쾌감.
게이머의 본성이 이 전투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도전에 이딴 방해를 해?
천마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바늘에 그대로 당했을 거다.
그렇기에.
“마, 말도 안…….”
한 끗 차이로 바늘을 피해 낸 설천위는 바늘이 관통해 따끔해진 귀의 통증을 무시하며 배천문을 노려봤다.
“뒈졌다고 복창해라.”
당황해하는 배천문의 안면에 아까까지 설천위가 내지르던 주먹이 꽂힌다.
허나, 한번 궤도가 흐트러진 주먹질은 그리 큰 위력이 없었다.
설천위의 재능은 정말 혼에 새긴 동작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설천위는 움직였다.
몸을 흔들고, 거리를 벌리며, 팔을 움직인다.
왼팔로는 배천문의 검을 쥔 손을 붙잡고 있으니 그리 멀리 떨어질 순 없다.
하지만 최대한 초식을 펼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때린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린다.
전부 안면을 향해.
천마의 봉을 막고 공격하기 위해 빨라진 손이 배천문의 안면에 작렬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화영이 끼어들어 멈추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승자! 설천위!”
* * *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련이 끝난 순간, 분노로 가득 찬 철백이 대련장 위로 뛰어들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것은 화영.
교관을 향해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내며 철백은 기절한 채 누워 있는 배천문을 가리켰다.
“분명 마지막에 암경을 쓰지 않았습니까! 친선 대련에서 암경은 명백한 규칙 위반입니다!”
철백의 분노에 암경을 봤던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암경이 나온 시점에서 화영은 대련을 멈췄어야 했다.
물론 본인은 그러려고 했던 것 같지만.
상황을 인지한 교관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화영이 대련을 멈추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내가 막지 못하게 막았다.”
부학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할 법도 한데, 철백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그를 노려봤다.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전 무림의 동포들이 우리의 정의를 비웃을 것입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
허나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부학관장은 담담했다.
그의 기준에서 철백의 분노는 묶여 있는 개가 짖는 것보다 못하니까.
허나,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대련이 성립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간단하게 처리해도 될 일을 교관들까지 나서며 크게 벌인 이유가 있다.
“배천문의 거짓은 확인되었으나, 한 가지 의혹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거짓이 확인되었다니?
그럼 이 대련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철백은 물론 모두가 그리 생각할 때 부학관장은 담담한 눈으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대련 중 혹은 시험 중에 타인의 조언을 받은 적이 있느냐?”
“지금 갑자기 그게 무슨…….”
“조용.”
철백의 항의를 단 한마디로 막은 부학관장은 천천히 그들을 굽어봤다.
아니, 굽어본다고 철백과 설천위는 느꼈다.
압도적인 기세.
초절정의 끝, 화경의 문턱 바로 앞까지 도달한 부학관장의 기세는 일개 학생이 받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내공조차 없다면 더더욱.
서서히 꺾이기 시작하는 철백의 무릎.
어느새 그의 옆에 서서 그를 받친 설천위는 두 눈을 똑바로 뜨며 부학관장을 바라봤다.
중하(中下)라는, 나이치고는 상당히 높은 정신력 스탯.
그리고 천마라는 존재의 든든함.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도 아닌, 그저 압박을 위한 기세로는 설천위를 꺾을 수 없다.
“예. 없습니다.”
천마 할배는 타인이 아니니까.
[허, 그럼 내가 무슨 가족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할아버지면 가족이죠.’
천마의 웃음 섞인 물음에 눈빛으로 대답한 설천위는 부학관장을 바라봤다.
“오로지 제 능력입니다.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부학관장은 천천히 기세를 거두었다.
“좋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부학관장은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마지막 암경은 분명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누군가의 조언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런데도 피해 냈는데, 이 인근에는 그럴 만한 고수가 없다.
학관장의 전음이 없는 게 그 증거다.
현경급 고수가 아닌 이상, 학관장의 눈을 속일 수 없다.
그리고 현경급의 고수라면 맹의 정보망이 놓쳤을 리가 없고.
하나하나가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최중요 감시 대상들이니까.
즉, 믿기 힘들지만 지금은 설천위가 자력으로 해냈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배천문과 그의 계획에 동조했던 3인은 퇴학이다.”
“자, 잠깐……!”
부학관장의 말에 군중에 있던 누군가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배천문에게 동조했던 신급(辛級)의 하나.
허나 그가 항의를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그 순간.
“갈(喝)!!”
우렁찬 목소리가 연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한다.
“이 이상, 네 자신과 네 가문을 욕보이지 마라.”
분노마저 담긴 그 목소리에 항의하려던 이는 고개를 떨궜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정파의 수치 같은 놈들.”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배천문을 바라본 남성은 성큼성큼 걸어 설천위의 앞에 섰다.
거대한 덩치.
얼굴에 새겨진 기다란 상흔.
허리춤에 찬 큼지막한 도(刀).
그 모습에 설천위는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도왕(刀王) 팽후(彭厚).
무림학관의 학관장이자 완숙한 화경에 오른 괴물.
그의 깊은 눈동자가 설천위를 바라본다.
“흐음.”
덥수룩한 턱수염을 긁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팽후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이니,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예? 뭘요?”
“뭐긴.”
입꼬리를 올린 팽후가 그와 철백을 가리켰다.
“너희들의 포상을 정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