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12화-진실 공방 (1)
“하? 반대?”
누군가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진다.
아니, 제까짓 게 반대해서 뭐 어쩔 건데?
그런 속내가 담긴 그 한마디에 서하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역시 이건 무리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서하영이 한껏 위축돼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설천위는 배천문의 앞에 도착했다.
“분명 산적 두목은 나랑 철백이 잡았는데, 왜 포상은 너만 받냐?”
“뭐라는 거냐, 이 버러지가.”
“이상하잖아. 누구는 겁먹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어도 승급하고, 누구는 피 터지게 싸워도 제자리고.”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는 살짝 상체를 옆으로 꺾어 배천문의 등 너머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학관장님.”
도발적인 그 질문에 부학관장은 가만히 설천위를 바라봤다.
당돌한 버러지 놈.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속으로 숨긴 부학관장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류에 해당하는 이들이 합공으로 일류 수준의 산적 두목을 잡은 것, 계급(癸級)인 녀석들 둘이서 일류 고수를 잡은 것.”
잠시 말을 멈춘 부학관장은 주위를 쓱 둘러보곤 다시 설천위와 눈을 마주쳤다.
“너는 우리가 어떤 진실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의 지금 행동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
그 물음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떤 진실이라뇨? 진실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부학관장님.”
“맞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직한 진실을 믿었을 뿐이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면 바꾸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설천위의 질문에 부학관장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자신이 진실이라는, 순수한 믿음만이 담긴 눈빛.
버러지 주제에 강단은 있구나.
부학관장이 침묵하자 배천문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바꾸는 것이 도리?
모두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이 진실인 것이다.
이 버러지의 부질없는 발악은 이쯤에서…….
“서로 의견이 부딪힐 때 해결책은 여러 개 있겠으나, 그것이 무력으로 인한 것이라면 방법은 하나지요.”
부드러운,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목소리에 배천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대체 왜?
저 여자가 지금 왜?
하얀 경장(輕裝)을 입은 여인, 유예린은 빙긋 웃었다.
“비무(比武). 이것이 무(武)를 논할 때의 해결책이 아닌가요?”
유예린의 말에 배천문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멍청한 년.
꼴에 약혼자라고 챙겨 주려는 모양인데, 제대로 헛발을 짚었구나.
아니, 약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깨부수려는 속셈인가?
뭐가 됐든 좋다.
배천문이 고개를 돌리자 부학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일류인 산적 두목을 둘이서 이겼다면, 이류인 배천문과 일대일로 싸워도 이길 수 있겠지.”
부학관장의 긍정에 배천문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철백이든 설천위든 일대일이라면 절대로 안 진다.
저 머저리들에게 내가 질 리가 없지 않은가?
배천문은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진실을 위한 일에 어찌 수고를 아끼겠습니까?”
자신만만한 대답.
그 대답에 부학관장은 설천위를 바라봤다.
“둘 중 누가 싸울 테냐?”
“제가 싸우겠습니다. 그 산적 놈을 마무리한 게 저였으니.”
“천위!”
“미안, 이번에는 내가 싸울게.”
싸울 마음이 하늘을 찌르던 철백을 대충 달랜 설천위는 다시 부학관장을 바라봤다.
“만약 저희가 진실이라면 어찌해 주시겠습니까?”
“이 학관 내에서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상식의 범주 내에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
이거 하나 이겼다고 무리한 승급은 어림도 없다는 소리다.
그 대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조건이 좋네.
살짝 웃은 설천위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자 부학관장은 주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사흘 뒤 오시(午時), 이곳에서 진실을 가르는 비무를 행하도록 하겠다.”
* * *
“천위! 대체 왜…….”
“막타는 내가 쳤으니 마무리도 내가 해야지.”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다. 그냥 내가 처리할게.”
설천위의 대답에 한숨을 내쉰 철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 녀석이라면 확실하게 두들겨 패 주겠지.
산적 두목과의 싸움으로 설천위의 실력에 믿음을 갖게 된 철백이다.
“그나저나, 아까 은검(隱劍)은 왜 도와준 걸까요?”
“아, 걔 내 약혼자야.”
“아하. ……예?!”
나도 설정상으로밖에 모르지만.
담담한 설천위의 대답에 오히려 놀란 건 철백과 서하영이었다.
“아니, 진짜 약혼자예요? 왜요? 왜 파혼 안 당했어요?”
“거, 말이 참 섭섭하네. 서 매(妹).”
“어우! 그 호칭은 좀!”
“철백은 그렇게 부르잖아?”
“그건……. 아우.”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히는 서하영의 모습에 설천위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놀리는 맛이 있네.
가끔씩 이렇게 불러야지.
설천위의 웃음에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하영은 한껏 볼을 부풀렸다.
“이 누이는 파혼 당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눈을 치켜뜨는 서하영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나 계(癸)로 떨어지고 의견을 물어봤는데, 파혼 안 한다고 했대.”
……라고 설정에 적혀 있었지.
뭐, 사실은 대충 안다.
은검, 유예린과 설천위는 소꿉친구 사이다.
어린 시절엔 약했던 유예린을 설천위가 챙겨 줬다는 느낌?
뭐 설정상 구해 줬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어떤 사건이었는지 자세히는 기억 안 난다.
애초에 유예린은 몇 안 되는 절대 공략 불가의 여캐 중 하나였으니까.
캐릭터는 엄청 매력적인데, 공략이 아예 안 되니 불만이 꽤 있었지.
그래서 좋은 거라고 외치던 놈들도 많았지만.
문제는 아까 유예린이 입을 열었을 때의 상태다.
‘가슴 한번 벌렁벌렁하네.’
무슨 첫사랑을 하는 소녀도 아니고.
빙긋 웃는 유예린과 마주한 순간, 그냥 살이 떨릴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이 몸의 영향인가.
그러고 보면 설천위가 유일하게 악역으로 떨어지는 조건이 유예린의 죽음이었지.
악역으로 떨어진 설천위는 더럽게 끈질기고 강해서 말도 안 되는 밸런스라고 욕하던 녀석들도 많았고.
[끌끌, 심장이 두근거려서 말을 붙이기 전에 그렇게 허겁지겁 나온 것이냐?]
뭐래.
천마의 웃음을 무시한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수련하러 가야지. 사흘이나 남았는데.”
“같이 가자. 상대라도 해 줄게.”
“아, 괜찮아. 이번엔 나도 초식 연습 위주로 할 거라서.”
“대련 안 해도 되겠어?”
실전 감각을 올리는 건 비무를 위한 수련의 기본인데?
철백의 질문에 설천위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 * *
“아우, 저 남자는 무슨, 도와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대요? 아니, 근데 이거 도와준 거 맞나?”
친한 동생, 홍유화의 투덜거림에 유예린은 잔잔하게 웃었다.
“부끄러웠나 보지.”
“부끄러워요? 언니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화를 내는 홍유화를 보며 유예린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음? 그럴까나? 나는 꽤나 부끄러울 것 같은데.”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런 게 있단다.”
고개를 갸웃하는 홍유화를 두고 걸어가는 유예린.
그 뒤를 따르는 홍유화는 가벼운 유예린의 걸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거야?
뭐, 그래도 언니가 기분이 좋으면 다행…….
“거, 말이 참 섭섭하네. 서 매(妹).”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고 느꼈다.
아니, 진짜 얼어붙은 걸지도.
“어, 언니?”
꿀꺽, 마른침을 삼킨 홍유화는 조심스럽게 유예린을 불렀다.
기분 좋던 발걸음은 멈춘 지 오래.
그 눈은 목소리가 들린 벽을 향한다.
“언니, 안 돼요!”
단숨에 달려든 홍유화가 유예린의 팔을 붙잡으려는 그 순간.
“가자.”
차분히 가라앉은 유예린의 목소리에 홍유화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당장에라도 벽을 베어 버릴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저래?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홍유화를 뒤로한 채 걸어가는 유예린.
그녀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 * *
“나 죽어!!”
[흐하하하! 안 죽는다! 거참, 훌륭한 능력이구나!]
“죽는다고, 이 할배야!”
[껄껄껄! 내, 이 수련을 하다 죽은 사람은 세 명 정도밖에 보지 못 했느니라!]
“충분히 많잖아!!”
천마의 웃음에 설천위는 악을 쓰며 몸을 움직였다.
[쯧쯧, 초식 하나 제대로 익히는 데 며칠이나 걸리는 놈에겐 이것조차 과분한 훈련이거늘.]
“그, 상황을, 좀! 고려하라고!”
[어허, 말이 짧구나?]
“지금, 안 짧게 생겼어요?!”
여유로운 천마, 그리고 다급한 설천위.
천마는 기다란 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유자재,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봉.
천마의 드넓은 무술 분야를 알려 주는 좋은 움직임이지만…….
그걸 받아 내야 하는 설천위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방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라. 내 조언이 언제까지나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정한 초인이라 불리는 초절정, 화경까지 갈 것도 없다.
절정만 되어도 천마의 조언이 설천위에게 닿기 전에 설천위를 짓밟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일류도 상성에 따라선 버거운 싸움이 되겠지.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다.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창이자 방패이니라.]
“으오오오오!!”
느긋한 천마의 목소리와 달리 봉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진다.
피하고 맞고.
쳐 내고 맞고.
맞고 또 맞고.
공격의 반절 이상 맞고 있지만, 이것조차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처음 연습에선 그야말로 미친 듯이 맞았으니까.
그나마 이것도 회복 덕에 엄청난 속도로 수련을 해서 이 정도로 성장한 것이란 게 천마의 의견이지만.
‘거참, 신기한 능력이구나.’
이리저리 피하는 설천위를 보며 천마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가 됐든, 이 아이는 성장할 수 있다는 가망성이 엿보인다.
어쩌면 그때 봤던 혈패황의 뒤를 이을지도?
……역시 이건 무리겠지?
피식 웃은 천마는 봉을 휘두르는 손에 힘을 더해 설천위를 더욱 압박했다.
그리고 그 압박에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수련에서 죽은 사람이 셋.
그럼 맞아 죽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뒈질 순 없지.
“안 죽어! 안 죽는다고!”
[흐하하하! 훌륭한 자세다!]
* * *
대련 당일.
시간에 맞춰 연병장에 나온 부학관장은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오셨습니까.”
“음, 상황은?”
“일단 주변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습니다.”
“내가 느끼기에도 별 이상은 없다.”
고개를 끄덕인 부학관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연병장을 바라봤다.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이게 된 이유.
그 이유가 지금 들어오고 있었다.
“휘유우~.”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
그 소리에 부학관장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대련이라곤 해도 결국 전투.
어느 정도의 고양감은 젊은이라면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다.
그 정도는 이해의 범주 내다.
그렇게 부학관장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어느새 대련장 한가운데에 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이번 대련은 어디까지나 친선 대련. 서로의 급소를 공격하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심판을 맡은 화영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규칙을 인지했음을 확인한 화영은 세 걸음 정도 물러나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시작!”
화영의 팔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작된 대련.
계급(癸級)인 설천위가 상대이지만 배천문은 방심하지 않았다.
저 녀석이 한 수를 숨기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반쯤 정신을 놓았던 그 순간에 볼 수 있었던 그 일격.
그 신속의 일격만 조심하면 된다.
그렇기에 배천문이 거리를 벌리려는 그 순간.
설천위의 몸은 어느새 배천문의 코앞까지 파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