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4화-낙제생 (4)
경(庚) 계급의 양아치, 가두호와 대련 약속을 한 저녁.
설천위는 준비해 놓은 모든 재료를 가지고 공터에 서 있었다.
“이거 맞아요?”
[암, 완벽하다.]
이상하게 그려진 피의 선들.
독특하게 배치된 돌과 나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공간 한가운데에서 설천위는 가부좌를 틀었다.
[명심해야 할 건 딱 하나다. 절대로 의식을 잃지 말거라.]
“예.”
[그럼 시작하자꾸나.]
천마의 신호에 눈을 감은 설천위는 미리 들은 대로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조악한 재능 때문에 좁쌀만 한 내공밖에 없지만…….
우웅!
그 내공에 진법은 훌륭하게 반응했다.
공기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앞에 천마가 섰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손을 올리는 천마.
반투명한 그의 손은 설천위를 만질 수 없다.
그렇기에 조금 그의 손과 설천위의 머리가 겹쳐진다.
아주 자그마한 겹침.
그 작은 통로가 천마의 존재를 설천위와 이었다.
그 순간, 설천위는 터져 나오려는 숨을 겨우 참았다.
짓눌린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
그저 조금 닿았을 뿐인데.
전신이 바위에 깔린 것 같은 무거운 존재감이 그의 머리를 짓누른다.
[정신을 붙잡아라.]
천마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를 악문 설천위는 더욱더 내공을 돌렸다.
너무나 조잡한 내공밖에 없었기에, 별문제 없이 천마가 알려 준 심법을 배울 수 있었다.
천마가 알려 준 그 심법을 최선을 다해 운기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를 악물고 내공을 돌리는 설천위의 모습에 천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몸은 정말 쓰레기 수준이지만, 정신력 하나만큼은 봐줄 만한 수준이다.
이거라도 없으면 아무리 자신을 볼 수 있다고 한들 포기했겠지.
작은 만족과 함께 천마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의식이 끝나도 완성되는 건 1할이 안 되는 수준의 미약한 연결.
하지만, 혼과 혼의 연결이다.
무려 자신과의 연결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감당하지 못하고 짓눌려 폐인이 될 터.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버틸 거다.
혼의 강도가 다르다.
겉으로 유약해 보여도.
무공에 재능이 없어도.
혼이 강한 사람은 있다.
눈앞에 있는 설천위가 바로 그런 경우의 인간이다.
그러니 이 연결은 성공할 것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천마가 아주 조금 무책임한 생각을 하는 사이, 설천위는 죽을 맛이었다.
이 존재감.
이 압박감.
도망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설천위는 꿋꿋하게 버텼다.
버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뒤에 어떤 시련들이 있는지 아니까.
이런 의식도 연결 못 하고 살아남는다?
무리다.
그러니 버틴다.
살아남는다.
돌아가는 걸 생각하기 이전에, 일단 살아남는다.
그게 먼저니까.
이를 악문 설천위가 어떻게든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는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돌리던 내공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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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원패공(魂元覇功)(最上)을 습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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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순간, 알림창이 뜨는 소리에 눈을 떴던 설천위는 믿지 못할 문구에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잠깐, 최상(最上)?
맞아? 확실해?
몸을 짓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약해졌다고 느낄 정도의 충격.
그리고 그런 충격으로 불신에 빠진 설천위에게 알림창이 재차 증명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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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최초로 최상급 무공을 습득하였습니다.
습득한 무공에 맞춰 스탯이 추가됩니다.
스탯, 패기(覇氣)를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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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쉣.
진짜잖아?
최상급(最上級) 무공.
이게 어떤 것인가.
육도(六道) 게임 내에서 단 다섯 개만 존재한다는 신공(神功)의 바로 아래 등급의 무공이다.
그런 무공을 이렇게 초반부터?
숙련도 쌓기 더럽게 힘든 게 가장 큰 문제인 최상급 무공을?
대박이다.
설천위가 그런 생각에 환호성을 지르려는 그 순간.
[성공이다.]
천마의 목소리가 그 기쁨을 가로막았다.
성공? 뭐가?
천마의 목소리에 그제야 다시 상황을 인식한 설천위는 고개를 들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마.
“……끝났어요?”
[그래, 끝났다. 의식이 완전히 완료됐어. 거기에 네가 따로 얻은 것도 있는 모양이구나.]
“예. 배운 무공이 1성에 도달한 것 같아요.”
[오, 생각보다 빠르군. 의식이 도움이 된 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천마는 입꼬리를 비틀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래, 뭔가 또 바뀐 건 없느냐?]
“에…… 예. 뭐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패기 스탯이랑 스킬은 있다가 확인해 봐야지.
기분이 좋아진 설천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층 더 웃는 천마.
[기뻐 보이니 좋구나. 그럼 이번 의식의 성과를 말해 주마.]
“옙.”
그러고 보니 수련에 도움이 된다고만 했지 정확하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못 들었네.
생각해 보니 상당히 안일한 대처였다.
‘……다음엔 경계하자.’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르는 세계니까.
자기반성과 함께 설천위가 고개를 들어 천마를 바라보는 그 순간.
빡!
“억!”
강렬한 꿀밤과 함께 설천위의 고개가 다시 땅으로 향했다.
[이게 바로 효과이니라.]
“아니, 이게 무슨……!”
혹 났겠다!
가라앉은 지 얼마 안 된 이마를 또 때리다니!
뒤통수가 아니라 앞통수를 맞았네!
설천위가 분노를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자, 천마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나는 네 혼에 간섭하는 형태로 너를 만질 수 있게 됐느니라.]
“그게 수련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엄청난 상관이 있다. 자고로 무공이란.]
말을 끊은 천마는 반항적인 설천위의 눈빛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순간, 또다시 작렬하는 핵꿀밤.
빡!
“아악!”
[맞으면서 배우는 것이니라.]
* * *
[어허! 틀렸다!]
불호령과 함께 떨어지는 주먹.
미묘하게 틀어졌던 어깨가 주먹 한 방에 제자리를 찾는다.
정말로 섬세한 힘 조절이지만.
“아파요!”
[아프라고 때리는 것이다. 아프지 않으면 몸이 기억하지 못하니까.]
설천위의 반항에 또다시 주먹을 드는 천마.
하지만 천마의 표정엔 불쾌감은 없었다.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만 있을 뿐.
‘이렇게 근성 있는 녀석은 오랜만이구나.’
원래 이렇게 맞으면 다 고분고분해지는 법인데.
[내가 네 녀석에게 주는 고통은 혼의 고통! 육체와 혼 둘 모두의 고통으로 움직임을 새기는 좋은 수련이니라!]
“악!”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강철의 꿀밤이 설천위의 이마를 강타한다.
이번엔 참지 못한 설천위가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려 하자, 천마의 손이 귀신같이 움직였다.
‘아, 귀신 맞지.’
시답잖은 생각과 함께 앞으로 밀려올 고통에 대비하는 설천위.
하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음, 생각보다 성취가 빠르구나.]
“예?”
[방금 내 공격을 감지한 건 아주 좋았다.]
“……그래요?”
[암, 네 처참한 재능치고는 습득이 빠르구나.]
처참한 재능치고는, 이라니.
그럼 보통을 기준으론 느린 편이란 소리 아니야.
설천위가 미간을 찡그리자, 허허 웃은 천마는 손을 내밀었다.
[뭐,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고, 그럼 내일 있을 대련을 준비하자꾸나.]
천마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시간대이지만, 대책은 세워야지.
“뭐, 빙의 같은 거라도 해 주실 건가요?”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그게 최곤데.
게임에서도 설천위가 강령술을 익히면 빙의가 주력 스킬이고.
상황에 맞게 혼을 선택해 꽤나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했지.
살짝 기대감이 담긴 설천위의 질문에 천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내가 지금 너한테 빙의했다간, 네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망가질 거다.]
“……그 정도예요?”
[그나마 봐줄 만한 정신력도 내 혼을 감당할 그릇이 안 되거늘, 그 처참한 육체로 내 무공을 펼치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게 기적일 게다.]
……그 정도야?
확신이 담긴 천마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혼에도 급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천마를 빙의시켜서 싸우는 건 너무 치트키지.
아쉬움을 삼킨 설천위는 다시 본론을 꺼냈다.
“그럼 내일 있을 대련은 어떻게 이길 건데요?”
[그런 반푼이도 안 되는 버러지를 잡을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입꼬리를 비튼 천마는 천천히, 하나의 자세를 취했다.
[너는, 이 초식 하나만 익히면 된다.]
“예? 하룻밤 만에요?”
그게 되면 내가 설천위가 아니지.
말도 안 된다는 설천위의 반응에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네 처참한 재능이라면 하룻밤 만에 이걸 익히는 건 무리일 게다.]
“그렇죠? 아니, 그런데 그럼…….”
[하지만!]
설천위의 말을 끊은 천마는 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설천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걸 가능케 해 주는 것이 고통이니라.]
싸늘하다.
그렇게 느낀 설천위는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깨는 붙잡혀 있고, 천마는 코앞에 있었으니.
[뼈와 근육에 새기고, 혼에 새겨라! 하룻밤 만에 내가 그것을 가능케 해 주마!!]
* * *
“진짜야? 그 녀석, 미친 거 아니야?”
“몰라. 박치기하면서 맛까지 가 버렸나 보지.”
공용 연무장.
말이 연무장이지, 개인적인 무공을 연마하는 무인들이 많은 이 학관에선 대련장으로 주로 쓰이는 장소다.
학생들끼리의 사적인 결투에 쓰이는 장소.
거기에 구경꾼들이 있을 만한 자리도 충분한 넓은 면적.
‘버러지가…….’
그 중심에 선 가두호는 이리저리 목을 비틀며 몸을 풀었다.
그런 버러지가 감히 내게 덤벼?
가문에서도 버림받은 쓰레기가?
어림도 없는 소리.
운 좋게 신급(辛級)을 이겼다곤 하지만, 그뿐이다.
만약 제대로 된 실력으로 이긴 거라면 그 자리에 있던 교관이 바로 승급을 진행시켰을 테니까.
그러니 확실하다.
설천위 그 버러지는 아직도 계급(癸級)의 실력이다.
즉, 패배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싸움이라는 소리.
“철저하게 짓밟아 주지.”
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 어느새 분노로 변해 가두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순간.
“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무장 입구로 향했다.
드디어 등장한 주인공에게 구경꾼들의 시선이 단숨에 모였다.
하지만 이내 구경꾼들은 미간을 찡그리고 혀를 찼다.
힘이 빠진, 터덜터덜한 걸음걸이.
핼쑥해진 안색.
제대로 묶지 못한 머리.
하지만 그 와중에 다친 곳은 안 보인다.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아마 밤샘의 영향일 터.
설천위는 체력이 약하기로 유명하니 긴장감에 밤을 새워서 저 몰골이 된 거겠지.
모두가 실망감에 기대를 접는 그 순간.
“흐음?”
대련장의 외벽 위, 상황을 지켜보던 여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설천위가 듣는 화경의 기초를 강의하는 교관, 화영(和盈).
그녀의 경지는 초절정.
초인 중 초인이라 불리는 화경의 전 단계에 위치한 무인.
그녀의 눈에는 학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재미있군요. 한계의 한계까지 끌어낸 상태라…….’
몸의 긴장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
문제는 저런 상태는 혼자 도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누군가 상대가 있어 줘야 하는데…….
설천위에겐 그럴 만한 인맥이 없을 텐데?
이어지기 시작한 잡생각을 끊어 낸 화영은 다시 웃으며 설천위에게 집중했다.
뭐가 됐든, 저 아이가 보여 주는 것엔 기대가 된다.
재미 삼아 나들이를 나온 교관들도 좀 있어 보이고.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그때 보여 줬던 그 박치기가 운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 줄까?
밑바닥을 찍었던 낙제생이 다시금 위를 향해 걸어갈 수 있을까?
이윽고 대련이 시작되고.
“……말도 안 돼.”
화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대체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