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1화-낙제생 (1)
곧바로 기숙사로 돌아온 천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설천위.
육도(六道)에서 동료로 영입할 수 있는 NPC 중 하나.
별명은 뉴비 학살자.
동료로 삼은 뉴비를 죽인다고 해서 뉴비 학살자.
동료를 껴서 난이도는 올라가는데 아무런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이 악물고 키우면 강하냐?
“씁. 그것도 아니잖아.”
스탯에서도 나타나듯 설천위는 무인 쪽엔 재능이 없다.
설천위가 재능을 발휘하는 부분 중 하나는 도술.
문제는 이 도술이 게임 중반부는 가야 제대로 된 걸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 전에 있는 미션들 대부분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뜻.
그렇게 되면 당연히 데리고 다니지 않을 테고, 데리고 안 다니면?
퀘스트를 깨며 달성하는 업적으로 얻는 보너스 스탯, 스킬 등 모든 것이 부족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중반부 보스와 몬스터들을 이제 막 익힌 스킬로 잡는다?
피똥 싸는 노가다를 해도 힘들다.
진짜 억지로 노가다를 반복해서 키우고 키우면 0.8인분 정도는 할 순 있지만…….
‘그 전에 보통 포기하지.’
실제로 게임에서 설천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쓴 사람은 별로 없다.
……그 소수에 내가 들어가고.
설마, 이게 내가 빙의한 이유는 아니겠지?
아니, 이름도 비슷하고 마침 고난도 플레이 영상 좀 찍어 보려고 해서 한 건데…….
왜 하필 이런 똥캐를……!
갑자기 억울해진 천희는 한숨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설천위의 히든 피스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거 영상으로 올릴 생각에 진짜 들떴었는데…….
‘마지막에 찾았던 루트.’
설천위의 두 번째 재능.
강령술.
혼 혹은 요괴를 다루는 데 설천위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을 잘 살리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게임 초반에도 유령 NPC나 몬스터는 꽤 나오는 편이고.
마지막 플레이에서 상당히 늦게 발견했음에도 도술을 익혔을 때보다 더 편하게 엔딩을 봤었다.
물론 이걸 알게 된 계기는 난이도에 비해 실력이 부족해 설천위를 방패로 쓰다가 알게 된 거지만…….
그래도 강해질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거기다가 빠르게 익힌다면?
게임 중후반부에나 익혔던 강령술을 더 빠르게, 거의 초반부에 익히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다른 주인공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정한 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학관 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모으자.
정보를 모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일단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안 믿기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순 없다.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진짜 억울해서 미친다.
“일단…… 내일 일정이라도 알아야 하는데.”
같은 방에 있는 녀석이 방을 드나드는 걸 보면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애초에 무림학관이라는 배경답게 수업도 잘 이루어지니까.
문제는 현대의 대학 같은 느낌이라 시간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짤 수 있다는 점?
원주인이 적어 놓지 않았다면 이번 학기는 전부 낙제 확정이다.
뭘 들어야 할지 알아야 듣지.
한숨과 함께 짐을 뒤적이기 시작한 천희.
애초에 몇 개 안 되는 짐인지라 생각보다 원했던 목표물은 금방 찾았다.
“이야, 널널하네.”
낙제생들에게 주어지는 불이익.
들을 수 있는 수업의 개수가 줄어든다.
뭐,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이 설정을 봤을 땐 대충 만들었다고 욕했지…….
지금은 감사해야 할 처지이지만.
원하는 걸 찾으려면 시간은 여유로울수록 좋다.
“자, 그럼…….”
오늘이 며칠인지부터 알아볼까.
* * *
돌아온 기숙사 동기에게 물어서 날짜를 확인한 천희는 곧바로 수업에 참석했다.
여러 가지 물어본 결과, 동기의 눈빛이 이상해졌지만 뭐……. 그건 감내해야지.
“나는 설천위다. 나는 설천위다.”
연무장 구석에 쪼그린 천희, 아니 설천위는 자기암시에 들어갔다.
현실을 인정했으니 이젠 설천위로 살아야 한다.
살아남을 때까지, 본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 천희라는 이름은 가슴에 묻어 두자.
승부욕 하나로 설천위를 끼고 엔딩까지 봤다.
설천위로 살아남는 거? 까짓것 해 주겠다, 이 말이야.
심호흡과 함께 설천위가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수업이 시작됐다.
“먼저 이번에 배울 화경(化勁)에 대해 복습해 보도록 하죠.”
부드러운 인상의 여인이 학도들을 쓱 둘러봤다.
시범의 대상이 될 사람을 찾는 그 눈빛에 모두가 시선을 회피했다.
나가면 약하긴 해도 맞을 텐데, 자진해서 맞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래의 경쟁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모두가 시선을 회피하는 사이, 결심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던 설천위와 여인의 눈이 딱 마주쳤다.
“좋네요. 학생 앞으로 나오세요. 누군지 말 안 해도 알겠죠?”
부드러운 미소.
일순 교관의 시선 끝에 다른 학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리고 작게 터져 나오는 비웃음.
그 비웃음에 교관이 가리킨 대상이 자신이란 걸 확인한 설천위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버텨서 좋을 게 없으니까.
“흐음?”
설천위가 앞으로 나서자,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깨달은 교관은 흥미롭게 그를 바라봤다.
‘눈빛이 살아 있군요.’
이 정도로 멸시를 당하면서 살면 보통 기가 죽게 마련이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몸은 절로 움츠러들게 되고 당연히 몸으로 해야 하는 전투의 성적은 더욱 나빠진다.
악순환의 고리.
그 고리를 끊어 낸 건가? 스스로?
학관 내에서도 유명한 낙제생의 변화에 교관은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이번에는 화경의 기초 중 기초인 상대의 공격을 흘려 내고, 반격하는 것을 배울 겁니다.”
손바닥이 설천위의 얼굴 쪽을 향하게 뻗은 교관은 설천위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 순간에나 공격하세요. 제가 설명하고 있는 순간에도 괜찮습니다.]
“먼저 화경의 기본은 부드러운 천을 흉내 내는 것에 있습니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전음에 움찔했던 설천위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교관이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그에 맞춰서 해 주면 되겠지.
설마 교관이나 돼서 괴롭히겠어?
작게 호흡을 고른 설천위는 구태여 자세를 잡지 않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운동을 해 본 적도 없으니 자세를 잡는다고 해서 다를 것도 없다.
굳이 시작한다고 알려 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즉, 상대의 공격에 맞추어 아주 섬세하게 힘의 방향을 트는 것…….”
순간, 교관의 말 사이로 설천위의 주먹이 파고든다.
정확하게 안면을 노리는 주먹.
아무리 육체 능력이 낮다곤 해도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이다.
상당한 속도의 주먹이 안면에 닿으려는 그 순간.
쿵!
“컥!”
설천위의 등이 땅과 맞닿았다.
제대로 된 낙법도 하지 못해 막힌 숨을 토해 내는 설천위.
그 모습에 교관은 작게 미간을 찡그리곤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섬세함이 극에 이르면 이렇게 큰 동작도 가능하지요.”
다시 표정을 펴고 설천위에게서 시선을 거둔 교관은 다른 학생들을 보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먼저, 기초가 되는 무공인 설화수(雪化手)의 1초식부터 배우도록 하죠.”
* * *
‘더럽게 어렵네.’
수업 막바지.
교관에게 배운 설화수를 연습하던 설천위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분명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왜 몸으로 하면 안 되지?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라는 게 이렇게 답답했던가.
무(武)에 대한 재능이 아예 없다는 설정의 무서움이 절절히 느껴진다.
진짜 더럽게 못하는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뭐가 됐든, 일단 연습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무림학관 졸업은 스토리 진행상 필수 요소다.
퀘스트나 사냥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상태창이 있는 걸 봐선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퀘스트나 사냥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아무래도 무림맹의 무사로 입맹하는 것.
대충 적당한 수준의 무력대만 들어가도 성장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러니 최대한 학점을 따서 승급할 필요가 있다.
계급에 따라 졸업 후에 들어갈 수 있는 단의 수준이 달라지니까.
무엇보다 이 무림학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초 무공들은 전부 대성하는 게 좋다.
입수 난이도와 숙련도를 쌓는 난이도에 비해 대성했을 때의 보너스가 상당히 크니까.
현실에서 그 보너스가 어떻게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물론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틀겠지만.
작게 호흡을 고르고 다시 연습을 시작하는 설천위.
제대로 된 동작조차 하지 못하는 설천위는 다른 학도들과 달리 혼자서 동작만을 연습하고 있었다.
허공에 하는 손짓.
이게 바로 뻘짓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자꾸 생겨나려는 것을 짓밟으며 연습을 이어 나가는 그때.
“야, 혼자서 연습이 되겠냐?”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
조롱과 멸시를 품은 눈빛.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설천위는 직감했다.
이 새끼, 괴롭히러 왔구나.
이런 녀석에게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처 방법은 무시다.
완전히 무시하면, 조금 괴롭히다가 재미없어서 그냥 가는 경우가 많다.
아예 무반응.
무시로 일관하자.
설천위가 그렇게 정하고 다시 동작 연습을 시작하자, 무시당한 녀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대놓고 보고 있진 않지만 주위에 있는 녀석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낙제생에게 무시를 당하다니.
이런 개쪽이 있나.
“야, 무시하냐?”
아예 설천위의 앞에 선 남자, 규도는 연습 중인 설천위의 팔 사이로 손을 뻗었다.
단숨에 막히는 설천위의 팔.
기술도 부족한데, 힘에서 완전히 밀리니 멈추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도 약한 저항에 피식 웃은 규도는 양팔을 앞으로 내밀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연습 상대를 해 줄게. 자자, 막아 보라고.”
빡!
망설임 없이 파고든 규도의 주먹이 설천위의 안면을 때린다.
꽤나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
치아가 나가거나 하진 않았지만, 입안이 터진 건 확실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꺾인 고개.
그 모습에 더욱 입꼬리를 올린 규도가 연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안면만이 아니다.
가슴과 복부.
발차기를 통한 하체까지.
그야말로 전신을 골고루 두드려 팬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교관은 끼어들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 규도가 급소를 공격하지 않고 있어서.
둘, 이곳은 애들을 돌봐 주는 탁아소가 아니니까.
무인을 양성하는, 일종의 군사 시설이다.
대련을 빙자한 괴롭힘?
힘을 길러 오롯이 맞선다면 해결될 일이다.
맞기 싫다면, 맞지 않고 때리면 된다.
힘의 논리.
아무리 정파의 길을 걷고 있다곤 해도, 무림의 원초적인 근본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정파이기에 그 힘의 논리가 통하는 범위가 조금 더 좁을 뿐.
그렇기에 지켜야 할 선이 있다.
한참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설천위의 모습에 교관이 나서려는 그 순간.
‘음?’
설천위의 두 눈을 확인한 교관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는 교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강렬한 소리.
빠각!!
뼈와 뼈가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방심한 채 박치기를 당한 규도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늦게, 중지를 들어 올린 채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가 넘어간다.
기절한 두 사람을 보며 교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화경은 화경이네요.”
상대의 힘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규도가 공격하는 흐름을 읽고 예상하기 힘든 순간에 머리를 들이밀어 박치기로 마무리.
규도는 자신이 들어가던 힘 그대로 머리에 맞고 기절.
그 충격을 온전히 해소 못 한 설천위도 그 뒤를 따라 기절.
‘……재미있네요.’
아무래도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학생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