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향-209화 (209/217)

검향 209화

누워 있던 초운의 육신에서 회색의 빛이 솟아올랐다.

빛은 바로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곽호에게로 흡수되었다가 다시 초운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악휘구가 소리치자 유기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의 대법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곧 초운의 의식은 내면 세계에 갇히고 말겠지.”

“말도 안 돼! 유기 사형! 사형은 인도자라면서. 그냥 초운을 선계로 보내 버리는 것 아니었어?”

“우화등선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몸은 소멸한다. 진선의 선체는 하계에서도 쓸 수 있는 고귀한 것, 그런 것을 소멸시킬 순 없는 노릇이지…….”

“큭…….”

악휘구는 자신을 감싼 촉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소용없다. 그것은 절대고수 백 명도 막을 수 있는 비술. 너의 실력으론 멀었다.”

“젠자아앙!!”

七章

“와아아! 소소 사형이다! 소소 사형!”

언제나 웃는다 해서 어린 사제들이 붙여 준 별명.

자신에게 달려가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반기는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던 초운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웠다.

기억할 순 없지만 그리움이란 감정이 가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보아라, 넌 저들을 지킬 수 없었다.”

아이들과의 즐거운 일과는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울음소리로 변해 있었다.

* * *

“앙앙앙! 소소 사형, 소소 사혀어엉.”

“으아아아앙!”

“소소 사혀어엉.”

귓가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삼자의 관점임에도 그는 결코 태연할 수가 없었다.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돌아온 기억은 운명의 그날을 정확히 떠올리고 있었다.

일검쟁패.

그 거대한 비무대 위에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서 있었다.

초운은 문득 자신을 보고 싶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인에게 짓눌린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청년이 보였다. 바로 자신이었다.

“흐흐흑. 이거 놔, 이거 놔아!! 흑!! 이거 놓으란 말이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으며 앞으로 나가려 했다.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의 살들이 찢어져 뭉그러질 정도로 노력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운은 무력하게 바둥거리는 과거의 자기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과거 속 곽호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첫 아이는 누구로 할까?”

비무대 위에선 곽호가 즐거운 장난감을 고르듯 아이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래, 너로 해야겠군.”

“아아앙…… 놔 주세요. 으아아앙, 소소 사형! 소소 사형!!”

초운의 이름을 부르며 길게 울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다 갑자기 툭 끊겼다.

현재의 초운은 눈을 감았고, 과거의 자신은 절규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시간이 다시 멈추었다.

초운은 고개를 돌려 곽호를 바라보았다. 붕대로 감싸인 그의 얼굴은 과거의 모습과 전혀 겹쳐지지 않았다.

“즐거운가요?”

“그럴 리가 있나? 나도 괴로웠다고, 저 당시엔.”

“지금이 즐겁냐는 물음이었어요.”

“…….”

“그렇게 망가지고, 마음이 부서진 채로 괜찮은가요?”

“기억이 돌아온 거냐?”

초운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식뿐이던 그의 몸이 완벽하게 돌아왔다.

곽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너는 이미 갇혔어. 빠져나오지 못할 괴로운 기억 속에서 영원히 떠돌거라.

그는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 초운의 육신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초운은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그때의 풍경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다 곧 눈을 감고 허공의 한 부분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오거라, 벗이여……. 나의 검(劍)이여…….”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금이 그어지더니 기다란 검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오래전 부러져 버린 처로의 형상과도 같은 그것은 초운의 양신이었다.

검의 형상의 양신이 초운의 손에 붙잡혔다.

그러자…….

쨍---! 째재쟁---!

그의 마음을 빌려 곽호가 만들어 낸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 * *

곽호는 차분했다. 초운의 몸의 통제권을 대부분 가져왔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차분함이었다.

이 육신만 있다면 그는 좀 더 수월하게, 그리고 빠르게 천하를 전복할 수 있으리라.

하늘의 일을, 선계의 일을 모조리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들과 선을 그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예정이었다.

자신 있었다, 그들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자신이.

아무 슬픔도 증오도 없는 그런 세상을 반드시 만들고야 말 것이다.

“당신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곽호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 청년이 남청색의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검은 한눈에 보아도 보통 검이 아니었다.

곽호 또한 오랜 시간 마도를 걸어온 수행자. 그는 검의 정체를 단박에 깨달았다.

“양신이구나!”

초운은 부정하지 않았다.

곽호는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양신과 합일하였다면 이미 볼 것도 없다.

이번 일은 실패였다. 합일 전에 몸을 빼앗았다면 모를까, 합일한 이상 방도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곽호가 단호히 말했다.

“그래, 실패다. 인정하지. 이번 승부는 네가 이겼다.”

“…….”

“하지만 진짜 승리일까?”

“무슨 말입니까?”

곽호의 입에선 놀라운 진실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너라는 존재는 내 계획에 없었다.”

“…….”

“웬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나 싶었지. 그렇게 얻기 힘들었던 신선의 육신이 코앞에 있었으니까 말이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는 내가 들어갈 그릇을 만드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그리고…….”

곽호의 형상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가 초운의 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릇은 이미 완성되었다.”

사라지는 곽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쿨럭---!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곽호가 피를 토하며 깨어났다.

유기는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실패했군.”

“헉…… 헉…… 헉!!”

곽호는 말할 기운도 없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선계에 오를 텐가? 너는 아직 자격이 있다.”

인도자로서의 제안이었다. 하나 곽호는 분노했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긁어모아 외쳤다.

“어림없는 소리! 선계에 드느니 명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는 게 낫다.”

“나와의 약속은 지키지 않을 텐가?”

“죽여 달라는 약속 말이냐? 그것은 내가 선체를 얻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신선의 힘을 하계에서 행사하지 못하면 약속의 이행은 불가능해.”

“그래…… 그런가.”

곽호는 몸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깨닫고 무공이 아닌 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 인도자 유기는 위험한 존재.

자칫 잘못했다가 강제로 인도당하면 선계에 들게 된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초운이 곧 깨어날 테니 그럼 그때 부탁해 보아라.”

그 말만을 남기며 곽호의 신형은 북쪽 하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털썩---

절망 어린 눈빛의 유기가 무릎을 꿇었다.

* * *

-가 볼래?

달콤한 유혹과도 같은 목소리. 이는 그의 양신이 내는 소리였다.

그는 스스로가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선계에 오른다 해서 신선이 될 거라 여기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는 수많은 환생을 거쳐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던 존재였다.

예전엔 그저 꿈일 뿐이라 여겼지만, 그 생생한 인생의 기억들은 결코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 기억들을 동화시키지 못했다면 그는 곽호가 보여준 기억들 속에서 무너져 버렸을 테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수많은 전생의 기억들, 그 기억들 중에는 지금의 초운보다 훨씬 불행한 경우가 많았기에 현재의 과거를 보다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자신의 본질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초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자 검의 형상을 한 양신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거대한 문이 내려왔다. 언젠가 심상 세계에서 보았던 문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대한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문(門)이란 그저 그의 심상이 만들어 낸 형상. 실제로 열고 닫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을 만지는 순간 몸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가장 먼저 본 것은 꿈에서 보았던 그 하늘이었다.

한참을 올랐지만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저 하늘만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하루…… 이틀…… 나흘…….

언젠가부터 날짜를 세지 않았다. 시간이란 것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그저 예측을 위한 도구.

하계에선 시간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나, 선계에선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단 깨닫자 지루함은 사라졌다.

시간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니 다음 경유지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늘을 올랐는데 도착한 곳은 명부였다. 수천만의 인간들이 염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흉측한 외모의 수라와 나찰이 죄인들을 관리했다.

초운이 문득 그들 옆을 지나치자 수라와 나찰은 황공하다는 얼굴로 오체투지하였다.

다시 경관이 바뀌려 하자 돌아보니 멀리서 태산만 한 크기의 염왕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초운은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경관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달콤한 향기의 복숭아로 가득한 세계가 나오기도 하였고, 명부에서 사악한 자를 보낸다는 지옥이 나오기도 했다.

지루하면서도 흥미로운 여행은 아쉽게도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구름 위로 거대한 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초운은 그곳에 안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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