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06화
때문에 그가 마실 수 있는 것은 싸구려 화주뿐이었다.
‘확 죽여 버리고 뺏어버릴까?’
순간 살기가 번뜩였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은거하기로 결정한 이상 사고를 쳐선 안 된다.
양민 한둘도 아니고 저만한 인원의 상인들이 죽게 되면 바로 조사가 나올 것이다.
천강시니 뭐니 시국이 좀 복잡하다 해서 함부로 날뛰었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는 죽엽청에 대한 유혹을 이겨 내고 다시 화주를 들이부었다.
그때였다. 보부상 일행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어이, 형장. 형장도 이곳에 와 한 잔 받으시구랴?”
“……나를 아시오?”
오초는 경계심이 일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한 채로 물었다.
그러자 그를 부른 상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았소. 우린 다른 지역에서 와 이곳 사정을 잘 모르니, 술 한잔하며 소문이나 좀 들어 봅시다. 탁자도 넓으니 의자 하나에 잔 하나만 더 두면 되는 것 아니겠소? 어이, 주인장!”
그리 말한 그가 말끝에 주인장을 불렀다. 그러자 주방에 있던 주인장이 달려 나왔다.
“저 형장과 자리를 합칠 것이니 잔이나 하나 더 가져다주시오.”
주인장이 다시 주방으로 뛰어들어가자 오초는 조금 경계심을 유지한 채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자리에 앉자 다들 환영해 주었다.
얼마 후 주인이 새로운 술잔을 가져다주었고, 술자리는 무르익어 갔다.
오랜만에 마시는 죽엽청은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인지 경계심도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술자리였던 터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들 중 염소수염에 왜소한 체구의 한 사내가 눈을 빛내며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 보시오, 다들 그 소문 들어 보셨소?”
“무슨 소문 말이오?”
“이제 패도맹의 천하가 되지 않았겠소.”
“그렇지요.”
“그로 인해 마인들이 모두 숨어버렸다는 소문이오. 천상련에서도 더 이상 보호해 주지 않는다더군.”
“아무래도 패도맹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 할 테니 당연한 것 아니오.”
오초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도 천상련에 버림받은 터라 남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여튼 이번 천강시 사냥이 끝나면 대대적인 토벌로 이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 말이오.”
“오, 세상이 좀 살 만해지겠구려. 역시 패도맹주님은 멋진 분이시오.”
“하지만 마인들도 귀가 있으니 그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오. 다들 더 깊이 숨어버리고 있다더군.”
“음.”
오초는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자신은 저런 소문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조금 번화한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할까? 마인 사냥이 시작되면 정보를 얻을 곳이 필요하니…….’
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염소수염 사내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오. 패도맹이 어떤 곳이오, 마인들의 총본산이라는 천상련을 무릎 꿇린 곳이 아니겠소? 패도맹주께서는 마공을 익힌 마인을 찾아내는 법을 친히 공표해 주셨소.”
“오오오! 그게 어떤 방법이오?”
모두 염소수염 사내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초도 마찬가지였다.
염소수염 사내는 오초부터 시작하여 함께 온 다른 상인들과 눈을 한 번씩 다 마주친 후 씩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일 먼저 코를 봐야 한다고 하더이다.”
“코?”
“마공을 익힌 마인의 코는 늘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음…….”
오초는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매만졌다. 그러자 염소수염이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형장?”
“아…… 아니오, 계속하시오. 아주 재밌소이다.”
“하하하, 다행이오. 내 말재주가 아직 녹슬지 않았나 보구려.”
염소수염의 너스레에 다들 크게 한바탕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두 번째로는 손가락을 봐야 한다고 했소.”
“손가락?”
“마인들은 대체적으로 오른쪽 검지가 다른 손가락에 비해 길어 보인다오.”
“말도 안 돼!”
오초였다. 염소수염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만 것이다.
“왜 그러시오, 형장?”
염소수염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아, 아니오. 겨우 그런 이유로 마인을 구별할 수 있다니, 조금 믿겨지지가 않아서.”
“뭐랏! 지금 당신, 감히 패도맹주님의 말이 거짓이란 얘기요?”
“그게 아니라…….”
오초는 열불이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참자, 참자…….’
염소수염의 망언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오초는 발끈할 뻔했지만 잘 참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패도맹주께선 말씀하시었소! 마인들은 모두 고자라고!”
“크아! 도저히 못 참겠다!”
오초는 목인마공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은거고 뭐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을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목기(木氣)가 나무줄기처럼 튀어나오더니, 열 명의 상인들의 몸을 휘감았다.
“특히 너, 염소수염! 네놈 거시기를 잘라 입에 처넣어주마!”
그는 염소수염의 사내를 향해 다가가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염소수염의 사내는 겁을 먹기는커녕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씩 웃고 있었다.
그러곤 말했다.
“목인마공이 맞군. 네가 오초 맞지?”
“잉?”
염소수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초는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그의 마혈을 점한 것이다.
눈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니, 그의 목기에 포박당해 있어야 할 상인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실실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네놈드을? 누구냐아?”
염소수염이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따라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놀란 오초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바꾸었다.
“누구세요…….”
“우린 패도맹에서 왔지. 이름은 들어 봤냐? 귀천대라고.”
“컥헉!”
귀천대라면 패도맹의 섬멸 부대 아니던가. 오초는 자신의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염소수염은 한마디 할 때마다 그의 미간을 검지로 밀며 말했다.
“목인마공은 마기를 숨기는 데 탁월해서 말이야.”
툭---
“우리도 긴가민가했거든…….”
툭---
“근데 시간은 없고…….”
툭---
“응? 우리가 어쨌어야 했겠냐. 응? 응? 응?”
툭툭툭---
염소수염은 고생한 게 마치 오초 탓인 양 그의 머리를 계속 밀어젖혔다.
오초는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죽음의 공포로 인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염소수염은 놈의 아혈까지 점하고는 동료에게 물었다.
“다음은 어디야?”
* * *
사천과 귀주 곳곳에 숨어 있던 상위 마인들은 순조롭게 잡혀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을 사냥하러 간 무사들 중 부상을 당한 자는 없었다. 제아무리 상위 마공일지라도 절대고수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태가 급박한 터라 패도맹 측에선 마인 하나에 절대고수 열 명을 파견했다.
평소라면 과했겠지만 쓸데없는 반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도였다.
그리고 그만큼 효과도 있었다.
모두가 절대고수인 터라 경공도 그만큼 빨라서 토벌군에 금방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금 제일의 마물 사냥은 차근차근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 * *
초운이 사부의 품을 떠난 지도 벌써 보름.
천강시를 토벌하기 위해 천하 각지의 방파들이 토벌군에 합류했고, 그로 인해 무려 십만의 무사들이 토벌군에 모여들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초운이 지나치던 각 도시와 성에선 무사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는 초운의 흔적을 잠시나마 지워 주는 역할을 했다.
천하의 모든 시선이 천강시와 토벌군으로 향해 있던 터라 당연한 결과였다.
초운은 거대한 성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십 장 높이의 거대한 철문 위에는 ‘천상련’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행히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내부에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성안에는 수많은 전각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고, 길도 잘 닦여 있었다.
한참을 걷자 어느 순간 거대한 광장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는 무인들이 도열하기 위한 곳인 듯했다.
그리고 광장의 중앙에서 초운은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악 사형.”
“왔구나, 초운.”
악휘구가 씁쓸한 미소로 초운을 반겼다.
六章
천상련에서 가장 높은 전각의 꼭대기.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사내, 곽호는 광장을 내려다보며 키득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진선(眞仙)의 선체(仙體)가 내 손에 들어온다.”
그는 유기가 있는 대전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는 거부할 수 없다. 이번이 아니면 네 소망은 이룰 수 없을 테니까, 유기.”
* * *
대전의 권좌에 앉아 턱을 괸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유기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내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것은 그대뿐만이 아니다, 곽호여.”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산의 멸문 사건 이후 초운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당시 기억이 봉인되었던 터라 불가피하게 둘로 나뉘었던 인격은 다시 흡수된 지 오래.
때문에 그는 화산 제자인 유기이기도 하며, 수백 년을 살아온 반선 유기이기도 했다.
그는 사제인 초운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럼 사형제 간의 감동적인 해후를 시작해볼까?”
* * *
악휘구는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초운의 분위기에 당혹해 하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강했던 사제였다. 그 풍마와 일전을 벌일 정도였으니 두말 할 것도 없는 강자였다.
한데 지금의 분위기는 달랐다. 뭔가…….
‘인간이 아닌 것 같아…….’
그런 그의 마음을 짐작하였는지 초운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나 지금은 변해 버린 분위기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그 나름의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잘 들어, 초운아.”
“네, 사형.”
“이곳이 함정인 건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자신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놀라는 것도 아니다. 너무도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모습에 악휘구는 조금 힘이 빠졌다.
“이곳에 곽호 아저씨도 있는 것, 알고 있냐?”
“……네, 조금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