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05화
“녀석의 예정지를 예측할 수 있겠소?”
적제가 그에게 물어 왔다.
그는 벌써 며칠째 잠도 자지 않고 지도를 바라보고 또 보았다.
막사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탁자 위에는 대륙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기저기 바늘이 박혀 있었고 바늘과 바늘 사이에는 색색의 실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입니다.”
“오 부련주.”
“네?”
“난 애매모호한 거 싫어하니 쉽게 얘기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 대답한 그는 지도 위의 바늘들을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다.
적제는 눈가를 꿈틀대긴 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이윽고 모든 바늘과 실들이 사라지자, 그는 탁자 위에 있는 통에서 새로운 바늘들을 꺼내어 지도에 꽂기 시작했다.
그는 열 개의 바늘을 꽂고 나서야 손을 멈추었는데, 바늘들은 각각 사천과 귀주의 특정 지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게 뭐요?”
“……저희가 한때 거두었던 마인들 중 강력한 자들의 거처입니다.”
“음…….”
“구대호법신마보다는 못하나, 그래도 상위 마공을 익힌 실력자들이지요. 제가 볼 때 천강시는 상급의 마인들만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힘을 불리려는 의도겠지요.”
“지금쯤 꽤 많이 잡아먹었을 테니 더 강해졌겠군.”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마정을 흡수하면 할수록 강해질 테니까요.”
“음.”
갓 완성되었을 때도 무지막지한 마물이었다.
장왕, 금마, 귀면호리, 셋이 덤벼도 유유히 빠져나갔으니까.
한데 지금은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만큼 강해졌다면 도망 다닐 이유가 없을 텐데도 아직 토벌군과 정면 승부는 벌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제가 오일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소. 많은 도움이 되었소. 하나 토벌군은 분산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구려.”
천강시 하나를 잡기 위해 천하 각지에서 십만여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출몰 지점이 여럿으로 나뉘어져 있기에 토벌군 또한 여럿으로 나누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천강시는 홀로 수만의 병력을 감당할 수 있는 마물 중의 마물. 흩어지면 오히려 희생만 커질 수 있었다.
오일상 또한 그것을 짐작하였는지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적제와 오일상의 근심은 곧 풀어졌다.
“뭘 그리 고심하십니까?”
막사의 천을 걷으며 들어온 것은 외팔이에 애꾸눈의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마영으로, 직책은 패도맹의 대총사이다.
아쉽게도 얼마 전 천강시의 등장 때 한쪽 팔과 눈을 잃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본래는 이번 토벌군에 따라와서는 안 되었지만, 본단에서 쉬라는 적제의 명령도 거부하고 직접 말을 타고 쫓아와 적제의 인상을 구겨진 종잇장처럼 만들어버린 인물이기도 했다.
“자넨 여기 웬일인가?”
“명색이 패도맹 대총사 아닙니까.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야지요.”
“내가 바늘인가?”
“그럼 실이겠습니까?”
“의원들 곁에서 쉬라니까.”
“엉덩이가 쑤십니다.”
“쯧.”
그의 팔의 절단 부위는 아직 다 아물지도 않아서 매일 붕대를 갈아 줘야 했다.
그러니 마영을 몹시 아끼는 적제로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영은 막사 안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탁자로 다가가더니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건 뭡니까?”
그가 적제와 오일상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오일상이 먼저 답했다.
“천강시의 출몰 예상 지역입니다.”
“음, 토벌군을 분산해야겠군요.”
“위험하니 문제지요.”
오일상의 답답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마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나 남은 눈의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짧은 시간으로, 그저 호흡 서너 번 할 정도에 불과했다.
고심을 끝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근심을 한순간에 날려 보내 주었다.
“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
“왜 분산하겠습니까, 분산했다간 그 괴물에게 각개격파당할 게 뻔한데.”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하지만 이 열 곳 중 어디에서 출몰할지 알 수 없으니…….”
오일상이 말끝을 흐리자 마영은 좀 전에 오일상이 꽂아 놓은 바늘들을 하나하나 뽑아버렸다.
그러곤 모든 바늘들을 토벌군이 있는 위치에 꽂기 시작했다.
오일상이나 적제나 바보가 아니었다. 모두 한 세력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자.
그들은 마영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 묘안이오!”
오일상이 엄지를 들이밀며 감탄했다.
칭찬을 즐기는 마영은 도도한 표정으로 그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적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때론 단순한 게 정답이로군.”
“뭐든 기본을 잊으면 안 되지요.”
마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의 제안은 단순했다.
토벌군을 나눌 필요 없이, 천강시가 토벌군 쪽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사냥 중인 상급의 마인들을 토벌군 측에서 먼저 확보한다면 천강시는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작전이 수립되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절대고수들을 총동원해 마인들을 사냥하기로 한 것이다.
* * *
이미 패도맹의 천하나 마찬가지였기에 마인들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는 천상련의 부련주인 오일상 덕분이기도 했다.
그가 마인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정보를 수집하는 비선들의 행동은 훨씬 수월했다.
오일상이 상위 마공을 익혔다고 인정한 열 명의 마인.
그중 셋은 이미 천강시에게 잡아먹힌 뒤였지만, 다행히도 일곱은 살아 있었다.
올해 아흔을 바라보는 평요(坪嶢)는 색색마공(色色魔功)을 익힌 마인으로, 색공을 익힌 자답게 엄청난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상련에 등록된 마인이기는 했지만 충성하지는 않았다.
마인에게 충성심이 있을 리도 없지만, 무엇보다 그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이용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색(色).
마인화되면 보통 인격이 파괴된다지만, 그의 뚜렷한 인생의 목적은 마공의 성향과 비슷해서 인격 파괴의 부작용이 덜했다.
그는 내공이 부족해지면 여인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한 후 죽였고, 내공이 부족하지 않을 때는 그냥 강간만 했다.
이런 때려죽일 개잡놈이 여태껏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천상련이라는 거대 세력의 비호 덕분이었다.
하나 그런 천상련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 뒤로는 그 또한 조용히 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겁간이나 간살은 최대한 줄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유곽의 창기들과 함께 보냈다.
벌어 놓은 돈도 꽤 있는데다, 유곽이란 곳은 주먹 센 기둥서방을 환영하는 터라 은거하며 시간 보내기엔 좋았다.
오늘도 그는 두 명의 벌거벗은 기녀들 곁에서 눈을 떴다. 한데 느낌이 이상했다.
유곽의 아침은 본래 분주하다.
지난 새벽의 더러움을 말끔히 청소해야 새로운 밤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그 분주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너무 조용하군.’
그는 침상에서 내려와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색공을 통해 얻은 고절한 내공으로 바깥의 기척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마치 유곽 안의 모든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옷을 다 걸친 그는 조심스레 창가로 다가가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창문을 열었다.
“음…….”
역시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곽에 머무는 고용인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곽이란 곳은 본래 기방 수십여 개가 모인 곳이다. 어지간한 마을보다 인구가 더 많다.
한데 바깥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벌거벗은 기녀…….
“응? 죽은 듯이?”
그는 급히 누워 있는 기녀들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녀들은 그냥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혈이 점해져 있었다.
“헉!”
깜짝 놀란 평요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녀들의 수혈이 점해져 있다는 것은 그가 자고 있는 동안 불청객이 다녀갔음을 뜻한다.
이는 불청객이 자신의 목숨쯤은 언제든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한 채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던 그는 문득 다시 침상을 바라보았다.
“더헉!!”
놀랍게도 기녀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들에게서 눈을 뗀 건 불과 몇 호흡도 되지 않은 찰나다. 더구나 좁은 방 안에는 그녀들과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가 두 명이나 되는 기녀들을 데려갔단 말인가!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누구요! 누구이기에 나를 농락하는 것이오! 어느 고인인지 모습을 드러내시…….”
“시끄럽다, 색마 놈아.”
“헉!”
그는 자신의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에 몸이 굳어버렸다.
마혈이 점해진 것도 아닌데 공포심이 그를 그리 만들었다.
불청객의 차가운 숨결이 그의 귓가를 건드렸다.
“알고 있나? 다른 때 같으면 넌 이미 죽었을 거다. 천검단의 규율…… 아니, 이젠 천검각이로군. 우리 천검각의 규율에 따르면 색마는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자살할 때까지 회를 떠버리니까. 물론 자살은 못하도록 삼 교대로 감시하지.”
꿀꺽-!
살벌한 소리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천검각.
패도맹의 제일 돌격부대라 소문난 정의에 미친 광자(狂者)들.
악에 대한 잔혹한 처결은 마인들조차 질리게 할 정도로 유명하다.
“조용히 따라와라. 회 떠지기 싫거들랑.”
평요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문득 노린내가 방 안 가득히 퍼졌다.
“썅, 마인 주제에 쌌냐? 상위 마공 익혔다며.”
“너무 무서워서…….”
“너 이 새끼, 두고 보자.”
“…….”
* * *
목인마공(木人魔功)의 마인, 오초(吳草)는 머물던 마을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패도맹의 세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은거하기로 한 것은 자신의 인생 중 마공을 익히기로 한 것 이후 가장 잘한 선택이라 믿고 있었다.
잘 숨어 살다가 몸이 허하다 싶으면 몰래 양민 하나 잡아다 정기를 흡수하고 땅에 묻어버리면 된다.
어차피 자주 먹지도 않을 테고, 무공도 함부로 펼치지 않을 생각이다.
겨우 양민 한둘 실종되었다고 조사를 나올 리도 없으니, 잘만 숨어 산다면 또 좋은 세상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숨긴 채 홀로 독한 화주를 들이키며 키득거리던 오초였다.
그렇게 한밤중까지 술을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작은 마을의 주루인지라 사람이 가뜩이나 없었는데, 주인 또한 계산대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열 명의 사내들이 주루에 들어왔다.
오초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경계했지만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보부상 같았고, 수상한 행동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루의 탁자를 몇 개 붙여 앉아 술을 시켰고, 곧 주루의 주인은 비싼 죽엽청을 몇 동이나 가져왔다.
그 모습에 오초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꽤 방탕하게 살아왔기에 은거하는 중에도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