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04화
곽호는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알았다.
보름, 앞으로 보름이면 모든 것이 완성되리라.
그는 드디어 진선의 선체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한 방 먹일 기회를 잡고 말았다.
툭, 투툭…….
선계의 섭리를 거역한 대가는 가혹하다.
그의 남아 있던 팔이 떨어져 나가더니 모래로 변했다. 다리 또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몹시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는 낄낄대며 웃기 바빴다.
“큭큭큭큭, 이제 똥줄이 탔나 보지? 강도가 더 심해진 것을 보면. 하나 멀었다. 너희들의 세상을 뒤집어엎을 때까지 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크흐흐흐.”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고통은 가중되었다.
신경이 조각조각 나고 타들어 가는 느낌이 매시 쉬지 않고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참는 데 익숙했다.
이빨이 부러질 만큼 악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는 의지였다. 하늘에 굴복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킥킥…… 너희들은 진정한 고통을 모를 테지. 잊으라고? 세속의 것은 부질없다고? 삼생을 미리 보는 신선? 개소리 말라고 그래. 그따위 것이 돼 줄 것 같으냐! 인간성을 포기할 것 같으냐? 큽…….”
육지를 삼키는 거대한 해일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순간 곽호의 몸이 활처럼 팽팽하게 휘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피가 터져 나왔다.
“결코 지지 않겠다. 선체를 얻는다 해도 마음만은 끝까지 인간인 채로 너흴 상대할 것이야. 너희가 개미 보듯 관조하는 인간이 얼마나 똘아이가 될 수 있는지,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 알량한 하늘에서 잘 지켜보아라.”
그는 끝까지 하늘을, 선계를 저주했다.
그의 고통은 계속 이어졌고, 점점 더 심해졌다.
五章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은 크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먼저 패도맹은 진천군을 받아들여 거대 세력으로 화했다.
적제의 손에 의해 송산이 죽자, 진천군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당연했다.
원래는 해체가 맞겠지만, 그들은 패도맹주의 야망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더불어 반천련의 남은 세력도 패도맹의 휘하에 들었다.
의외인 것은 천상련이었다.
그들은 진천군을 치기 위하여 패도맹과 연합까지 했었다.
한데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에 갑자기 자신들의 본진으로 귀환해 버렸다.
그 이유도 황당한 것이, 실종되었던 천상련주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패도맹과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천하는 패도맹의 것이 되었고, 그들 또한 적제의 야망에 지지를 보낸다.
다만 휘하에 들지는 않겠다는 뜻을 확실히 하였을 뿐이다.
그 후 천상련주는 새로운 후계를 천명했고, 놀랍게도 그것은 부련주인 오일상이 아닌 의문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하나 그러한 천상련의 공표도 한 사건으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흉신이라 불리는 전설의 재림.
전설 속 천마(天魔)의 최종 결전 병기(最終決戰兵機), 천강시의 등장 때문이었다.
마인의 원형, 마공의 근원이라 불리는 이 요괴는 죽음을 뿌리고 다니는 자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공포의 존재였다.
수많은 술사들이 천마의 사후 이 천강시를 부활시키려 노력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성공한 자가 없었는데, 무려 오백여 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새롭게 재림한 천강시는 그 전설에 걸맞은 능력을 선보였다.
귀면호리와 장왕, 금마 등의 초고수들의 연수합격에도 크게 밀리지 않고, 되려 귀면호리와 금마에게 중상을 입힌 채 유유히 빠져나간 것이다.
그 후 천강시는 천하가 좁다는 듯 마구 날뛰었다.
마인을 찾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가 하면, 죽음의 안개를 뿌리며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의 안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살려 두는 법이 없었다.
벌써 도시 몇 개가 시신으로 뒤덮였고, 그 희생자만도 수만이었다.
패도맹은 오랜 숙원인 국가 선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 재앙 덩어리를 토벌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 * *
초운은 처음의 목표대로 동쪽을 향해 하염없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의 도움을 받아 경공을 펼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주변 경관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움직였다.
무엇보다 바람을 느끼는 것이 즐거웠다.
과거에는 그저 이물감뿐이었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이해할 필요도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바람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졌고, 그것은 곧 속삭임과도 같았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젠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자신을 부른 존재의 기운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었고, 초운은 그것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무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사흘 전부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나가는 표국의 표사들 정도는 보였지만, 고절한 무사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패도맹에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무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초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울리기 힘든 자들이 사부인 적제의 깃발 아래 모였다. 감당하기 힘든 공통의 적의 존재는, 결속을 하루빨리 이끌어 낼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이 같은 추측을 하지 않았을 것이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고 다양한 정보들이 그의 머리에 쌓여 갔다.
세상에 바람이 통하는 한 풍령은 존재하고, 풍령은 그에게 지식을 건넨다.
아직 완전한 개문(開門)을 이루진 않았으나, 양신이 완성된 터라 이 같은 이능도 가능한 것이다.
정보가 쌓이는 만큼 초운의 추론 능력은 올라갔고, 그만큼 현명해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부르는 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다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선 아직 몰랐다.
“유기 사형…….”
초운은 과거 자신과 검을 맞대던 백발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늘 자신을 걱정하고 위해 주던 소중한 가족.
그의 실체가 노회한 고수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가 보고 싶었다.
* * *
“왔느냐…… 초운.”
새롭게 천상련의 련주가 된 백발의 청년이 권좌에 비스듬히 앉아 중얼거렸다.
천상련의 본진에는 현재 련주를 지킬 호위대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강시의 토벌에 전 무림이 사활을 걸었다.
과거 천강시로 인해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간 것을 떠올린다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단순히 마인들의 발호나 마교와의 싸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하의 명운을 건 대결전이 될 것이다.
하나 이는 모두 누군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음모.
모든 것은 며칠 뒤면 이곳에 도착할 초운을 위해 안배된 것들이었다.
“후후…… 왜? 이제 와 후회되나?”
대전의 어둠 속에서 전신을 붕대로 감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양팔의 소매가 헐렁한 것이 팔이 없는 듯했다.
그의 비웃음에도 백발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백 년간 수많은 이별을 반복해 온 내게 사형제 간의 정리는 의미 없다.”
“그랬겠지. 네게 있어서 인연이란 유희 중에 필요한 양념 정도였을 테니. 인간의 정리가 무언지 알 리가 있나.”
붕대 사내의 독설에 청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라고 정을 모를 리가 없다.
정 때문에 상처받으면서도 늘 다시 갈구하기에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세상에 나서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내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영생을 살아가는 반선에 비해 인간의 삶은 찰나와도 같다.
때문에 청년은 늘 사랑하는 자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마음에 새겨진 흉터는 채 낫기도 전에 다시 이별의 고통으로 난도질당했고, 불사자인 그의 마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황폐해져만 갔다.
아니, 서서히 미쳐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정에 굶주려 있기에 인간의 온기를 그리워하던 그였지만, 그만큼 상처받기도 원치 않아 늘 먼저 도망쳤다.
하나 그런 그가 이렇게 다시 천상련으로 돌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불사자로서는 영원한 안식과도 같은, 죽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기적이다. 더없이 이기적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이제 질렸다.
이별의 슬픔에 아파하는 것도 지겹다.
그에게는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
“경고다. 만약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면, 네놈이 제아무리 곽성의 아들이라 해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내 모든 비술을 다 동원해서라도 널 지옥의 구렁텅이에 처박아 주마.”
“내가 바라는 세상에 너 같은 존재는 필요치 않아. 말하지 않아도 널 죽여 버릴 생각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유기.”
피고름이 묻어 나오는 지저분한 붕대 사이로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은 사내, 곽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권좌에 앉아 있던 청년, 유기는 한숨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얼마 후 텅 빈 대전 안으로 거구의 청년이 들어왔다.
“사형.”
“초운은 어디까지 온 건가?”
“사흘에서 나흘 정도 거리입니다.”
유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시작해 주게…….”
“괜찮겠습니까? 곽호에게 들키지는…….”
“애초에 놈은 날 믿지 않으니 들키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네. 난 내게 확실한 죽음을 내릴 자를 원하는 것뿐. 그게 초운이든 곽호든 별 상관이 없어. 하나 굳이 고른다면 초운의 손이 더 나을 테지.”
그는 죽음이라는 안식을 위해 곽호를 돕고 있지만, 사실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상관은 없었다.
곽호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그는, 초운에게 그 의도를 전해 줄 생각이었다.
초운이 그의 악의를 이겨 낸다면 그건 그것으로 다행이었고, 이겨 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조금 괴로워질 테지만, 그에겐 안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 * *
하룻밤에 천 리를 움직이고 검은색의 죽음을 뿌리는 자.
천강시에 대해 언급된 모든 문헌이나 전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문장이다.
하나 천강시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표현한 것이었다.
천강시는 전설 속 그대로의 존재였다. 과거의 무인들이 어떻게 잡은 건지 의문일 정도랄까.
벌써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생겼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천강시로 인해 전 강호는 공포에 빠졌다.
차라리 특정 집단이 행하는 학살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몰려다니는 만큼 찾기도 쉽고 토벌도 쉬웠을 테니까.
천강시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철저히 홀로 다닌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늘을 날 정도로 기동력이 뛰어난 터라 동쪽에서 사고를 치고 다음 날 북쪽에서 나타나는 등 골치가 아팠다.
다행인 것은 토벌군의 수뇌부에서 천강시의 특성을 알아내었단 것인데, 그것은 강력한 마기의 흐름을 좇아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마인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인 듯했다.
죄 없는 양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은 천강시에게 있어서는 부수적인 피해에 불과하다.
그저 마인이 있는 곳에 양민들이 있기에 벌레 밟듯 밟아버렸던 것이다.
하나 단순히 부수적인 피해라 하기엔 그 피해가 너무 컸다.
대략 집계된 희생자만 7만이다.
도시 세 개가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천강시는 살육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패도맹주 적제는 고심 가득한 얼굴로 오일상을 바라보았다.
천상련의 부련주인 오일상은 새로 취임한 련주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천상련의 정예들을 이끌고 와 토벌군에 합류했다.
천강시가 마기(魔氣)의 흐름을 좇는다는 것도 오일상이 찾아낸 것이었다.
실제로는 련주가 귀띔해준 것이지만 오일상은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공연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