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201화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 천마의 휘하에서 십대선인으로 활약하던 그때.
그는 천마가 시해선의 유해로 장난을 쳐 저것과 같은 마물을 만드는 것을 목도했다.
물론 그때의 마물과 완벽하게 똑같진 않지만, 저것은 분명…….
“천강시로군…….”
유기가 경악하는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천강시는 천마 전설에 등장하는 마물 중의 마물.
하룻밤에 천 리를 날며, 죽음의 기운을 뿌린다는 요괴였다.
단 한 마리뿐이었지만, 무려 이십만의 인간을 죽인 치명적인 마물.
저 천강시 하나를 잡기 위해 당시 무림 전체가 들고일어나야 했고, 그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귀면호리였다.
오히려 전설이 다 표현 못한 부분까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죽지 않는 반선이지만 시해선의 유해를 어찌해볼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었고, 이대로 싸운다면 결국 살해당해 5년쯤 뒤에나 부활하게 되리라.
“곽호, 이 새끼가…… 저런 마물을 대체 왜…….”
그는 친우인 유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곧 흠칫하고 말았다. 유기의 표정이 전에 없이 담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 설마…… 알고 있었냐?”
“…….”
유기가 그의 눈을 피하자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 줄 알아? 저 마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느냐고!”
그의 외침에도 유기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대답은 그가 아닌 천강시가 했으니까.
“애당초 시해선의 유해를 누가 주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제아무리 스승님이라 하더라도 신선의 시신을 구하기란 어려우셨지요. 그런 그에게 도움을 주신 게 바로 선연(仙緣)의 인도자(引導者), 유기님이십니다.”
인도자는 선근을 지닌 수행자가 신선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 임무.
때문에 시해선의 유해를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시해선이 몸을 떠나 등선할 때까지 기다리는 끈기와 시간뿐.
귀면호리가 유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강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뭔 줄 알아? 우리 같은 반쪽짜리 신선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신선 그 자체다. 신선이 육신을 가지고 하계를 활보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천마조차 저걸 제어할 수 없어서 우리의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
“그런데 저 마물을 만드는 걸 네가 도왔다고?”
두 친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러는 동안에도 추연희를 둘러싼 천강시의 기운은 침식을 계속했다. 하나 그녀를 지키는 마지막 결계는 귀면호리의 평생 정화와도 마찬가지인지라 쉽게 뚫리진 않고 있었다.
“저기……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절 구해 줘야 하지 않나요?”
추연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귀면호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답했다.
“미안,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 마정이 네 몸에서 튀어나온다면 살 테지만, 튀어나오기 전에 저 강시 놈의 침식이 완료된다면 죽을 거다.”
“악! 그냥 운에 맡기라는 거예요, 지금?”
“그래! 의지로 버텨 봐!”
“악! 그놈의 의지! 당신! 왕따시켜 버릴 거야!”
천강시가 마정을 노리는 것은 등선한 선인의 영체를 보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마정의 씨앗 자체보다는 마정을 품고 있는 마인을 직접 흡수하는 것이 효율적인 면에서 좋다.
천강시가 마정을 얻을 수 있음에도 추연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천강시는 침식을 멈추지 않고 귀면호리를 향해 말했다.
“당신을 죽인다 해도 이 결계는 사라지지 않겠지?”
“그래, 지금도 계속 힘을 붓고 있는 데다, 내가 죽기라도 하면 전 공력을 결계에 쏟아부을 생각이다.”
결계 안에 있던 추연희가 그 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나 그것은 너무 이른 안심이었다.
천강시가 검지와 중지를 붙여 검결지를 만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푸욱!
추연희를 중심으로 반경 오 장여의 공간이 지반째로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흙장난을 하는 아이가 흙을 손에 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 지금 무얼…….”
귀면호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강시를 바라보았다.
천강시가 예의 그 퇴폐적인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결계의 주체인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멀리 떨어지면 될 일.”
그가 검결지를 북쪽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추연희를 감싼 무형의 기운이 북쪽으로 ‘던져졌다’!
결계를 침식하기가 쉽지 않자, 결계째로 주변 지반을 들어 올려 던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천강시가 뒤따랐다.
귀면호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익!! 시체 주제에!! 잔머리를!”
결계의 주체는 자신이다. 힘을 보내는 당사자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결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천강시는 그것을 간파하여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귀면호리가 급히 천강시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리전성을 통해 유기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이 새끼, 넌 이따 좀 보자!
그의 전음을 들은 유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천강시가 사라진 덕분에 안전해진 악휘구가 결계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형, 천강시를 만들도록 도운 것이 정말 사형입니까?”
“그래, 그랬지.”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유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나는 신선이 되고 싶었다.”
“예?”
“나 또한 수행자였느니라.”
“…….”
악휘구에게 얘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넋두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저 한 가지가 부족했다. 선체가 아니었지…….”
악휘구는 어린 시절 도문인 화산에서 수학한 터라, 선체가 선근이나 선골을 뜻하는 것이며 그것이 수행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선체가 아니면 신선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수행자로선 억울할 만도 하였다. 아마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타협한 것이 바로 반선이었고, 하늘과 타협한 것이 인도자의 길이었다.”
그리 말하던 그는 어느새 손을 뻗어 하늘을 움켜잡는 시늉을 하였다.
“많은 일을 했다. 매화검선이란 별호로 매화검류를 보완하여 많은 수행자들을 선연으로 인도했지.”
“헙!”
악휘구는 너무 놀란 나머지 헛바람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매화검선은 화산의 전설적인 고수로, 본래 하나인 매화검류를 십사수매화검과 이십사수매화검으로 나눈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존재가 눈앞의 사내였다니,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리라.
유기가 하늘에서 눈을 떼고 그런 악휘구를 바라보았다.
“놀랐느냐?”
“……당연합니다. 화산의 토대를 만드신 분 아닙니까.”
“아니, 난 옛 선인의 가르침을 해석하여 쉽게 풀어 놓은 것뿐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했을 일이야.”
“…….”
“화산에서와 같은 일을 다른 곳에서도 많이 벌였다. 수백 년간 많은 수행자들을 선연으로 이끌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하늘엔 나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어땠을 것 같으냐?”
“……열받았겠지요.”
“하하하.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말이다…… 그리 화가 나진 않더구나.”
“예?”
“오래 살다 보니 화를 내는 대신 체념하는 법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악휘구로선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선 수긍이 가기도 했다.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선 어느 누구라도 체념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반선은 죽을 수도 없다. 자신이라면 미쳐도 골백번은 미쳤을 것이다.
유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지쳤다는 것을…….”
“…….”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진 불사자. 이미 인간이라 볼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였지만 지칠 수밖에 없었다. 종종 행하던 유희조차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곽호가 보내오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죽게 해주겠소.”
그 한마디. 그 한마디는 그가 수백 년간 살아오며 들어 본 가장 달콤한 한마디였다.
그래서 그는 곽호를 위해 시해선의 유해를 가져다주었고, 제갈세가의 천명비고에 대해 알려 주었다.
천명비고에 남아 있는 천강시의 제조법.
그것은 그의 친우인 귀면호리가 제갈세가에 직접 봉인을 맡긴 것.
그것의 위치까지 알려준 것은, 친우를 배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산에서는 청명자를 강제로 인도하여 등선시켜 버리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일은 화산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청명자가 사라지자 곽호의 복수행에 탄력이 붙었기 때문이다.
모든 비사를 다 들은 악휘구는 분노하면서도 그를 동정했다.
삶에는 의미가 필요하다. 목적 또한 필요하다.
크든 작든 인간은 그것을 원동력으로 삶을 이어 간다.
하나 유기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없이 사는, 그저 숨만 붙어 있는 인생.
남들이 염원하는 불사자였건만, 그의 인생은 지루하고 불행했다.
그래서 이어진 유기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날 도와주겠나? 어쩌면 내가 저지른 일을 수습할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네.”
“……일단 들어나 보지요.”
* * *
마왕급의 마인이 내뿜은 기운에 무너져 버린 화산의 일각.
형체도 찾아보기 힘든 옛 화산파의 터를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초운! 초운아! 사부가 왔다!”
그는 제자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는 중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적제. 한때 화산의 일대 제자로 적오자라는 도명을 지니기도 하였으나, 참담한 사문의 옛 모습에 분노하기보다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제자를 찾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초운아! 초운아, 이놈아!”
* * *
얼마나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꿈속에서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
창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로웠고, 나비처럼 아름다웠다.
하늘 저편의 선계도, 인간의 터전인 하계도 그에겐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더 시간이 흘러 그에게도 자아와 의식이란 것이 생겼다.
그리고 수많은 세계를 오가며 때론 돌이 되기도, 나무가 되기도,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하였다.
언젠가부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모든 기억은 지워지고 생의 희로애락을 맛보며 업을 쌓기도 풀기도 하였지만…… 즐거웠다. 슬펐다. 아팠다. 분노했다.
때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굶어 죽었고, 때론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을 호령했다.
마적 떼에게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소년이었던 적도 있으며, 어린 나이에 징용되어 나라를 위해 싸우기도 했다.
수행자가 되어 신선이 된 적도 있었다.
하나 여느 신선처럼 선계에 묶이지 않았다.
신선이 되는 순간 풍령으로서의 근본을 각성하였고, 신선이라는 냉엄한 관조자의 지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누구보다 자유롭던 풍신(風神)은 자유를 잃은 대신 인간을 좋아하기로 했다.
유희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신이 되기 위해 수행한다면 그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환생을 거쳐 그는 마침내 신격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하여……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일까.
과연 이게 꿈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