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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200화 (200/217)

검향 200화

“어쩌면 조금…… 진행이 된 걸지도 모르겠군. 뭐, 어쨌든 몸 안의 마정만 해결하면 될 것 같네.”

그러자 귀면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했다.

“음, 그래? 마정을 빼내는 건 나도 할 수 있지만 부작용 없이는 힘들어. 그러니…….”

“알았네, 나보고 해 달라는 얘기지?”

유기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추연희에게 가부좌를 틀게 하였다.

얼마 후 추연희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붉은 빛이 떠올랐고, 빛들은 곧 결계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그 안에서 움직이지 마시오, 소저. 마정을 빨아내는 비술이니…….”

“너, 이 일로 생색낼 생각 말아라. 곽호 놈에게 마정을 정제하는 비술을 가르쳐 준 건 바로 너였으니까. 니가 싼 똥 니가 치운다고 생각해.”

귀면호리가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치며 말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불로불사의 반선들은 서로 간에 도움을 받는 것 자체가 일종의 빚이었다.

때문에 그가 유기를 향해 생색내지 말라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에 가까웠다.

유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편히 좀 살라고 가르쳤지. 그렇게 일생을 괴로워할 줄은 몰랐지만.”

“확 등선시켜 버리지 그랬어?”

“등선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의지로 버티더군. 그래서 포기했다.”

“그놈의 의지, 참 대단하군, 대단해. ‘인도자(引導者)’의 강제 인도마저 버티다니.”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악휘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왜?”

“인도자가 무엇입니까?”

“하. 그걸 몰라?”

귀면호리가 조금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악휘구는 정말 몰랐기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액면가로는 귀면호리가 더 어려 보였지만 이미 둘 사이의 대화로 인해 그들이 최소한 반로환동한 노고수들임을 깨달은 악휘구는, 그저 난감한 기색을 보일 뿐 평소의 거친 성정을 드러내진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유기가 말했다.

“인도자는 하계에서 선근을 지닌 이들의 등선을 돕는 존재. 일종의 지선(地仙)이지. 하지만 진짜 신선은 아니고, 실체는 저기 귀면과 같은 반선이다.”

그의 설명이 조금 부족했다고 여겼는지 귀면호리가 말을 이었다.

“등선이 코앞인데도 깨달음의 계기가 없는 이에겐 기연을 가장하여 계기를 마련해 주고, 등선하기 싫어서 하계에 알짱거리는 놈은 강제로 올려 보내기도 하고…… 인도자의 임무란 바로 그런 거다. 유기, 저놈은 선계와 거래해서 인도자가 되었지.”

그의 부연설명에 유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족한 이들에게 선연이 닿도록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인도자의 존재 이유였으나, 그의 친구 귀면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

“자넨 여전히 비틀어 보는구만.”

“흥. 밴댕이 천선(天仙)들과 거래라니? 그놈들이 세상의 균형이니 뭐니 하며 사람 뒤통수 얼마나 잘 치는지 몰라? 곽호도……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만. 그 얘긴 그만하지.”

“흥.”

악휘구는 혼란스러웠다.

천선이니 우화등선이니 하는 얘기들을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네놈은 요즘 신분이 뭔데 그리 찾기가 힘들어?”

귀면호리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기억을 봉인하고 화산의 제자로 있다가 지금은 정의회의 회주지.”

“허허, 천상련주이면서 천상련에 반하는 정의회주가 되었다고?”

정의회는 천상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구대문파의 후예들이 모여 세운 곳.

유기는 화산의 제자 신분으로 그곳의 회주가 되었다.

하나 스스로에게 걸어 놓은 기억의 봉인이 헐거워지고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유희를 잠시 접어 둔 상태였다.

“천상련과의 인연은 이미 끝났어. 지금은 화산의 후예로 정의회를 이끄는 백발의 미청년이지.”

“설정이 점점 정교해지는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잖아. 그 때문에 땅속의 뇌옥에서 지냈던 거고.”

인간이 필요 이상의 수명을 살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광기에 잠식된다.

특히 신선이 되지 못한 채 반선의 몸으로 하계에 사는 선인들은 인간과 다름없기 때문에 그 폐해가 심각했다.

반선이 미쳐 버리는 경우 하계엔 재앙이나 마찬가지.

그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 유기가 스스로의 기억을 봉인하고 유희를 통해 미치는 것을 방지했다면, 귀면호리의 경우엔 칩거와 수면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했다.

깊은 곳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아를 보존하는 것.

그가 잠이 많은 것도 사실은 광기의 잠식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10년 넘게 잠만 잔 적도 있었다.

유기가 천상련주 시절, 그에게 뇌옥의 관리를 맡긴 것도 오랜 친우인 그를 배려해서였다.

악휘구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해 또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유기 사형께서 천상련주였단 말입니까?”

그의 물음에는 귀면호리가 나섰다.

“네 유희가 들통 날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날 만나지도 않았을 테지. 내가 대신 설명해 줘도 될까?”

유기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전에…… 손님이 찾아온 것 같군.”

“손님?”

귀면호리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검은 구름과도 같은 형체가 날아오고 있었다.

“오호, 반가운 녀석이로군.”

귀면호리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활짝 웃었다. 하나 목소리에선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는 자인가?”

유기가 그를 향해 물었다.

“곽가 놈의 첫 번째 제자야. 내 뇌옥을 탈출한 탈옥수이기도 하고.”

“음, 벌써…….”

유기는 뭔가 아는 것이 있는 듯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 * *

검게 물든 피를 토해내며 중년의 사내는 중얼거렸다.

“번천(飜天)이 시작된 이상,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의 몸은 그의 양신을 견뎌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화등선을 거부하는 대가로 받은 일종의 천벌.

인간의 껍질을 벗고 신으로 화해야 하건만, 그것을 거부하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화산으로 향했다. 그의 제자는, 그가 만든 마지막 괴물은 먼저 그곳으로 갔을 터.

번천계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자신이 그곳에 제때 도착하느냐였다.

* * *

악휘구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저것’은 결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신(神)이나 마(魔)도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 근원에 자리 잡은 공포…….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허공답보를 펼치며 서서히 내려오는 흑의 장포의 청년은 아름다웠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귀면호리나 유기도 보기 드문 미남자들이었으나 청년의 아름다움은 달랐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마치 거울 속의 인물처럼 인세에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감이었다.

“도망간 죄수가 여기까진 어인 일인가?”

귀면호리의 물음에 청년은 싱긋 웃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완벽한 미소.

하지만 그것이 정말 웃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눈빛이 죽은 자의 것처럼 생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 옥주.”

“네 물건?”

귀면호리의 물음에 청년은 검지를 들어 누군가를 가리켰다.

귀면호리와 유기, 그리고 악휘구 등은 자기도 모르게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선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던 추연희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귀면호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저건 왜?”

“마녀 사요의 마정을 지녔으니 회수해야지요.”

사요는 과거 초운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한 구대호법신마 중 하나였다.

그녀의 마정은 천응의 손을 거쳐 추연희의 단전에 심어졌고, 그녀를 검마라는 이름의 마인으로 만들었다.

“회수하고 싶다면 조금 기다려라. 조만간 마정이 튀어나올 테니까.”

청년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귀면호리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저는 미식가라서 말이지요.”

“뭐…….”

귀면호리가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청년의 몸에서 사이한 기운이 안개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흑색의 안개에 닿은 잡초나 나무는 급격히 시들었다.

아니, 시들었다기보다 나무 주위의 시간만 빨리 흐르는 듯 늙어 갔다.

유기는 그 기운이 보통이 아님을 느끼고 악휘구의 몸 주변에 결계를 펼쳐 주었다.

“나오지 말거라.”

“……이건.”

“결계다.”

짧은 대답.

하지만 악휘구는 금방 이해했다.

흑의 청년이 내뿜는 검은 기운의 범위가 더욱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유 만만해 보이던 고수가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황을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귀면호리는 유기와 마찬가지로 추연희의 주변에 결계를 펼쳤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번에 펼친 결계가 수십 종은 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결계의 벽이라 할 만한 것으로, 흑의 장포의 청년이 뿌리는 검은 안개도 그 결계를 뚫진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알량한 사기(死氣)를 믿고 있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죽음이 비켜 간 불사자, 반선이니까.”

불로불사하는 자에게 죽음의 기운은 불편할지언정 치명적이진 않다.

하지만 흑의 청년은 여유로웠다.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군요. 저의 사기(死氣)는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청년이 어깨를 으쓱대며 답했다.

“침식을 위한 것이지요.”

“아뿔싸!”

귀면호리가 급히 돌아보니 그가 펼쳐 놓은 수십 종의 결계가 사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개와 같은 기운은 이미 마지막 결계를 침식하는 중이었고, 추연희는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이에 귀면호리가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공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떠오르며 청년을 공격했다.

쾅---!

청년의 몸이 흔들리며 몸의 절반이 날아갔다.

하지만 육편이 튀거나 하는 상식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모래나 안개가 흩어지듯 검은 기운이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맙소사!”

경악한 얼굴의 귀면호리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의 뇌옥에 갇혀 있을 때만 하더라도 저것은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형상이었다.

한데 산악이라도 한순간에 찢어발길 만한 위력의 공격을 받아 놓고 순식간에 몸이 복구되었다.

이는 반선인 자신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복구되는 과정을 보면 눈앞의 청년은 인간의 피와 살이 아닌, 그저 기운의 덩어리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같은 현상의 존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곽호 놈이 시해선(尸解仙)의 육신을 훔쳤구나!”

시해선(尸解仙).

보통 신선이 되는 법 중 가장 하급의 방법을 뜻한다.

일반적인 천선이 몸속에 양신을 키워 우화등선하는 것이라면, 시해선은 일단 죽음을 맞이한 뒤 육신의 껍질을 깨고 나와 선계에 오른다.

두 방법이 다른 점은, 우화등선하는 경우 속세의 육신이 자연스레 소멸되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고, 시해선이 되는 경우엔 육신이 하계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시해선은 선계에 들며 자신의 육신을 소멸시키지만, 선계에 드는 황홀감으로 인해 그것을 잊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시해선의 유해(遺骸)는 대부분 좋지 않은 용도로 쓰였다.

귀면호리는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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