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97화
“이런이런, 너무 급하군.”
송산이 손을 슬쩍 휘젓자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적제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늙어서 분위기 파악 안 되는 거요?”
“그럼 그렇다고 해 두게.”
송산은 여유 만만했다. 적제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점점 더 거슬렸다.
그때 송산이 그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천상련도 잡아먹은 것 같고……. 이제 배가 좀 부른가?”
그의 물음에 적제가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직 멀었소. 아마 이 배는 천하를 다 삼켜야 좀 잠잠해질 테니까.”
그의 대답에 송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아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요?”
“……자네처럼 생각하던 사내가 존재했었지.”
“그게 누구요?”
“그냥 듣게, 어차피 수백 년 전 인물이라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이니.”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그리 중얼거리며 적의를 가라앉히는 적제였다. 어차피 의형검은 공력의 여하에 관계없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고, 그때 필요한 것은 죽이고자 하는 마음뿐이니.
송산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그는 자네처럼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였지. 그 또한 세상을 갖고 싶어 했어.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늘은 그에게 세상을 파괴하길 원했다는 점이랄까?”
“천마로군.”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니 모를 리가 없다. 일국을 없애 버린 희대의 악마.
수십만 정병을 상대해 몰살시킨 괴물. 신화나 전설이 아닌, 불과 수백 년 전에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대로 그는 나라를 없애고 중원을 일통했지. 천마신교의 세상이었어.”
“당신의 선조가 그를 없앴고 말이야. 당시의 천마와 날 비교하니 어떻소? 또다시 사문의 영광을 재현할 생각이오?”
적제가 비아냥댔지만 송산은 고개를 저을 뿐,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다.
“천마는 처음부터 미쳐 버린 괴물이 아니었다네. 오히려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더군. 그저 그의 운명이 국가의 멸망을 위해 흘러갔을 뿐, 그가 미쳐 버린 건 모든 것을 이룬 다음이었지.”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자네의 허기짐은 채워지지 않을 걸세.”
“…….”
“어떠한 고결한 대의도, 숭고한 목적도 자네의 정복욕은 채워주지 못할 게야. 그것은 그저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유일 뿐. 모든 것을 이룬 자넨 또 다른 목표를 찾겠지. 아마도 세상은 자네로 인해 피와 비명이 끊이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까, 내가 천마처럼 미쳐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막을 자는 먼 옛날 천마를 때려죽인 천왕류의 후예, 바로 당신이고?”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군. 아니, 그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세상에는 그리 알려질 것이네.”
송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적제 또한 마주 보며 웃었다.
“하하하하, 그럴 능력은 되시오?”
송산은 대답 대신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우르릉---!
대지가 진동하며 그의 의지에 호응한다. 그가 얻은 심의경의 끝은 바로 대지(大地)와의 동조였다.
두 걸음째.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서 첫 번째 걸음이 약간의 떨림 정도였다면, 지금은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반천련의 대총사였던 제갈정오의 죽음에 대한 비보를 들었던 날, 송산은 그저 산책하듯 걷는 것만으로 자신이 머물던 장원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적제에게 보이는 것은, 그때에 비해 수십 배는 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천왕류의 비전인 역왕보(力王步).
송산이 가장 즐겨 쓰는 무공이었다.
본래는 진각으로 상대의 중심을 흐트러뜨리는 정도이나, 송산 정도의 고수가 사용하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적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하! 오늘 적제가 천왕을 넘는다!”
그의 의지가 바람을 불러들여 검형을 이루었다.
二章
“역시나…… 싸우는군.”
귀면호리는 모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추연희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무섭지도 않아요? 그것보다 우리 너무 가까이 있는 거 아닌가요?”
“괜찮아, 이 정도 거리는.”
귀면호리는 적제와 천왕, 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추연희가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 안도의 한숨과 함께 되물었다.
“정말요?”
“응, 나는 괜찮지. 추 낭자는 죽겠지만.”
“뭣이!”
추연희가 귀면호리의 뒤에서 목을 졸랐다.
“잘못했습니다.”
목이 부러지기 전에 순순히 잘못을 인정한 귀면호리였다.
“불사(不死)라면서 엄살이 심하군요.”
“죽지 않더라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저기 젊은 쪽이 초운 공자의 사부님이라죠? 어떻게 될까요?”
“글쎄…….”
귀면호리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드러난 것만을 보았을 땐 천왕의 승리가 확실해 보인다.
하나 운명이란 것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특히 하늘이 짜 놓은 운명은.
“한쪽은 하늘이 선택한 인간, 또 한쪽은 하늘이 인간을 위해 내려 준 무공…….”
특히 무공 쪽은 과거 하늘이 선택한 파괴자를 쓰러뜨린 전력이 있었다. 게다가 귀면호리와도 악연이 깊었다.
마도와 인연을 맺은 후로 그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을 즐겼다.
이는 선인지경에 도달하여 불사자가 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저 무식한 천왕류가 막아섰지…….’
한 방에 절명한 적도 있었고, 목이 뽑혀 나간 적도 있었다. 몸이 여섯 조각으로 토막 나 팔다리는 동서남북 끝자락에 묻히고, 머리는 대륙의 중심부에, 몸통은 황하에 버려진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부활하니 저 송산으로부터 삼대 전의 전승자는 귀면호리의 몸을 가루로 만들어 바다에 뿌려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한 악연 때문인지 그는 천왕류의 전승자들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고, 그 때문에 적제가 이길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천왕류가 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군. 뼛가루를 빻아서 바다에 뿌려 버릴 줄이야……. 부활하는 데만 거의 오십 년을 소모해야 했지.”
“아무리 불사라지만 대단하네요. 그 정도면 신선 아닌가요?”
추연희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육신만 불사일 뿐, 혼백은 불멸이 아니야. 혼백까지 찢어발길 충격을 받게 되면 나도 죽을 수밖에 없어.”
“천왕류는 강력하잖아요.”
“강력한 건 인정하지만 내 혼백을 찢어발길 수준은 안됐지.”
영혼이란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제아무리 강력한 일격도 그의 혼백에 충격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때 사는 게 너무도 지루한 나머지 자살 시도까지 해 보았던 귀면호리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몸은 되살아났다. 자신을 죽여줄 사람을 찾기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천하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천왕류의 무인조차 실패했던 일을 어느 누가 성공하겠는가.
잠시 회상에 빠져 있던 그는 다시 전장에 집중했다. 그러나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 바로 옛 친구가 남긴 기운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기운은 불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동질감.
천하에 또 다른 반선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단 두 명뿐이었다.
“분명 녀석의 흔적은 여기까지인데…….”
“여기 오면 찾을 수 있을 거라더니…… 벌써 몇 시진째인지 알아요? 괜히 위험한 데 와 가지고.”
추연희가 떨리는 음성으로 투덜댔다.
제 딴에는 애써 두려움을 감추고 있지만, 불과 일 마장 앞에서 경치가 시시각각 뒤바뀌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 마, 이래봬도 본좌는 반선이다. 근방에 수백 종의 결계를 쳐 두었으니 저들의 힘은 미치지 못할 거야, 아마도…….”
“그 아마도는 뭐예요, 아마도는!”
“세상일은 변수라는 것이 있는 법이고, 저런 괴물들이 부딪치는 꼴은 나도 몇백 년간 구경한 일이 거의 없어. 이 결계를 쓰는 것도 처음이란 말이야. 그래도 일 마장이나 떨어져 있으니 결계가 먹힐 테지만…….”
우르르릉--- 쾅!!
그때 멀리서 또 한 번 땅이 뒤집어졌다.
당장 물만 채우면 작은 호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구덩이가 수십 개씩 생겨났다 다시 메워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귀면호리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추연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뭣하면…… 조금 더 뒤로 물러날까?”
* * *
송산은 날붙이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무기를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천왕류의 역대 전승자들이 무기를 쓰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천마를 쓰러뜨린 천왕류의 시조만 하더라도 검을 썼고, 그 이후의 전승자들도 검(劍), 도(刀), 창(槍), 심지어 활(弓)을 쓰는 등 여러 병기를 익혔다.
하나 전승자들 사이에서조차 병기가 통일되지 않는 것처럼, 사실 천왕류라는 무공 자체가 병기의 유무와는 상관없었다.
그저 익히는 자에게 가장 맞는 것이 곧 무기가 되었고, 송산의 경우에는 그것이 권(拳)을 중심으로 하는 박투였을 뿐이다.
그는 압도적인 힘을 원했기에 천왕류는 그에게 누구도 넘지 못할 강력한 힘을 주었다.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슬쩍 뻗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주먹에서 터져 나온 압력은 적제를 압사시킬 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적제는 급히 몸을 틀어 피했다. 아니, 이것을 피한다고 할 수 있을까?
주먹 한 방에 이십 장 깊이의 구멍이 뚫리고 지하수가 솟아오를 정도다.
범위 또한 넓어서 보통의 고수였다면 피하는 도중에 피떡이 되었으리라.
하나 적제는 바람을 지배하는 자. 그는 눈 깜빡할 사이에 오십 장 밖에 모습을 드러내며 의지의 범위를 확장했다.
그러자 사방 일백여 장이 검우(劍雨)로 뒤덮였다.
적제의 의지하에 만들어진 검(劍)의 비(雨)는 천지 사방을 촘촘하게 채우더니 송산을 향해 내리꽂혔다.
한줄기 한줄기마다 지독한 살의를 담은 심검.
하나를 백으로 나누었다 해서 위력이 백분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의형검 본연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덕분에 화산이 무슨 수난인지, 산 귀퉁이가 깎여 나간다.
그의 옛 사문이 위치한 위대한 성산이나 지금 적제의 머릿속 추억 따윈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최강의 적을 쓰러뜨리는 데 혼신을 다할 뿐이다.
그가 사천당가의 만천화우를 참고하여 창안한 천지검우(天地劍雨).
육왕칠사의 고수인 당위룡이 직접 펼치는 만천화우조차 뛰어넘는 초절기였다.
하지만…….
쉼 없이 쏟아지는 검의 빗줄기 속에서 거대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처음엔 어린애 주먹만 하던 것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사방 오십여 장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구체로 화했다.
적제의 검우는 그것에 가로막혀 소멸되었다.
당황할 만도 하건만, 적제는 개의치 않고 구체를 노려보며 씩 웃었다.
“역시 쉽게 죽어주진 않는다는 건가?”
읊조리듯 중얼거린 그가 천지검우의 시전을 멈추었다.
그러자 구체 또한 희미해져 갔고, 그 안에서 송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군, 아주 좋아. 당년의 청명자라 할지라도 자네만큼은 아니었을 거라네.”
그는 청명자를 거론하며 그를 칭찬했다.
천하제일고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육왕칠사 중에서도 송산이 인정하는 고수는 한손에 꼽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