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향-196화 (196/217)

검향 196화

장왕의 독설에 금마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젊은 시절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독설이 조금은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잊었소? 난 무인이 아니라 악사요.”

“하긴, 네 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자는 그 늙은이뿐이었겠지.”

장왕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마는 그 스스로를 무인이라 여기지 않는다. 젊은 시절 기연을 얻어 음공을 익혔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하나 그뿐이다. 그는 강한 힘을 지닌 ‘악사’일 뿐, 그 근본이 어디 가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나 문제는 그의 음공이었다.

너무도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건만 제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음공을 펼치지 않기 위해서는 냉정함이 요구된다.

하나 그리하면 좋은 음을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흥에 겨워 마음 가는 대로 음을 펼치면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웃거나, 죽을 때까지 운다.

사람을 피모래로 만들어 바람결에 흩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이렇듯 그의 소리가 닿는 곳은 곧 사지(死地)가 되어버리는 터라 그는 함부로 음을 연주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타인이 죽음을 맞이하니 그로서는 고역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연 따위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그가 강호의 은원에 얽혀 수많은 사람을 죽이긴 하였으나 살인을 즐기는 이는 아니다. 때문에 그는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왔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남들에게 불운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곁에는 그의 음을 제대로 듣고, 심지어 즐겨 주기까지 하는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송산.

당금 천하의 천하제일인이었다.

장왕이 그를 향해 말했다.

“어디 얼마나 발전했는지 확인 좀 해볼까?”

“허허, 발전? 그 말은 내가 당신께 해야 할 말이 아니었소?”

“남들이 들으면 내가 너한테 진 줄 알겠다?”

“아니었소?”

둘은 과거 여러 차례 겨룬 적이 있었다.

희대의 무림 공적이던 금마였기에 그를 쫓는 무인들은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본래 세상사에 큰 뜻을 두지 않던 장왕이 금마와 겨루게 된 것은, 그의 지인이 금마를 쫓다 비명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살왕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넌 내 손에 죽었을 거다. 무엇보다…… 네 알량한 금음 따위 내겐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잊은 게냐?”

“허허, 그대들의 무공 또한 내게 통하지 않음을 잊었소?”

악사란 음(音)에 마음을 담아야 비로소 자기 몫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직업.

그런 악사들 중에서도 천재로 이름 높던 금마 심영이 심의경에 도달할 수 있던 것도 어찌 보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힘은 특이하면서도 강력했다.

과거 장왕과 사흘 밤낮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이 그 증거였다.

장왕이 불쾌함 가득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심영 또한 들고 있던 칠현금을 튕길 준비를 하였다.

“엇! 잠깐, 잠깐 멈추시지요.”

그때 마영이 둘 사이로 끼어들며 막았다.

“뭐냐.”

장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마영이 볼을 긁적이며 되물었다.

“벌써 싸우실 생각입니까?”

“저놈과 싸우라고 나를 부른 것 아니었냐?”

“글쎄요…… 그게 그렇다기보다…….”

“성질 긁지 말고 재깍재깍 대답해라. 확 죽여 버리기 전에…….”

장왕이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마영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장왕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금마를 바라보았다.

“선배, 꼭 싸우셔야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금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웬 헛소리인가? 싸우라고 돗자리 깔아 준 사람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시라는 뜻이었지, 돗자리 깔아 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허.”

“생각해 보십시오. 애초에 선배께서는 진천군에는 자신이 존재하니 우리보고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렇다면 역으로 따져서, 선배께서 여기 장왕 어르신께 막힌다면 나머지 인원은 어찌 되겠습니까?”

“음…….”

뒤에서 듣고 있던 장왕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차갑던 얼굴을 풀었다.

자신과 금마가 싸움을 시작한다면 적어도 네 시진 안에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흘 밤낮을 겨루게 될지도 모른다.

그사이에 패도맹과 천상련의 연합이 진천군을 친다면 진천군은 패할 수밖에 없다.

금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진천군을 사실상 통솔하는 자였고, 모두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금마가 마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에겐 아직 생강시가 있네.”

“팔십여 구 정도 남은 괴물들 말입니까? 그런 거라면…….”

마영이 말을 하다 말고 왼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패도맹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더니, 한 무리의 무사들이 등장했다.

마영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뭣이?”

금마가 새로이 나타난 무사들을 자세히 보니, 과연 그들은 생강시였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아흔이 넘었다. 진천군 측의 생강시를 넘어선 것이다.

“어허…… 생강시? 게다가 저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진천군이 데리고 온 생강시지요. 소공께서 다 해치우기 전에 급히 가로채느라 힘들었습니다.”

장왕 또한 놀라 마영에게 물었다.

“생강시를 훔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금마는 장왕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생강시는 성천궁의 비술로 만들어진 것.

생강시를 훔치기 위해선 비술의 핵심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게 노출되는 것이었다면 성천궁은 수백 년 전에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영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금마의 그러한 추측을 일거에 뒤집어버렸다.

“예, 맞습니다. 훔쳤지요.”

“그럴 리가 있나!”

금마는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있었습니다.”

“성천궁이…… 그쪽에 붙었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천궁의 비술을 깼는가?”

마영이 검지를 흔들며 답했다.

“저는 저희가 훔쳤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훔친 건 성천궁 쪽입니다.”

“뭐라?”

늘 여유롭던 금마는 오늘 여러 번 놀라는 중이었다. 이어진 마영의 말은 그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생강시의 제조법은 본래 천마(天魔)의 혈족(血族)이라 불리는 새외의 조씨 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 비술의 일부가 이백여 년 전 벌어진 작은 사건으로 인해 성천궁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훔쳤다는 게 맞겠죠. 비술을 어떻게 깼냐 물으셨습니까? 다행히 우리에겐 조 씨 일족의 고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으음…….”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새외에 가 본 적도, 관심도 없던 그조차 조씨 일족에 대한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무공도, 그렇다고 주술도 아닌 마도(魔道)의 괴이한 비술을 사용한다는 일족.

누군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온순하기 그지없는 자들이나, 건드린다면 무시무시한 보복을 가한다는 악명으로 유명했다.

그런 일족의 인물이 패도맹의 울타리 안에 있다?

진천군, 아니 반천련의 입장에선 생강시를 빼앗긴 것보다 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어쩌시렵니까. 계속해볼까요? 장왕께서 선배를 상대하시면 저희는 편합니다. 어차피 송산 어른께선 움직이지 않으실 테니까.”

“음…….”

송산은 적제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패왕과 자웅을 겨루고 싶어 했으니까.

오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따른 금마는 그의 성품을 잘 알았다.

‘주군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금마는 자존심 때문에 무모한 일을 벌이다 자멸하는 인간을 경멸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그는 사공이 많은 배나 마찬가지이던 진천군을 지금껏 이끌어 온 실질적인 관리자였다.

그만큼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깨달은 그는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믿었던 생강시까지 막혀 버린 이상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마영을 향해 물었다.

“패도맹의 무림 일통이 코앞이로군…….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그의 물음이 항복 선언임을 깨달은 마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한 사람치고 크게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전음을 날렸다.

“…….”

마영의 전음을 듣고 난 금마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 갔다.

* * *

해남검문의 문주는 대대로 해남도에서 가장 강한 검객이 된다.

강함을 구분하는 것은 꽤나 지루하고 소모적인 일로, 현 문주인 용완도 힘겨운 싸움 끝에 문주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형제를 잃었고, 아내도 잃었으며, 사부까지 잃었다.

결코 평탄한 삶을 살아오진 않은 것이다.

대체로 심의경에 이르는 이들은 지옥을 맛보아도 여러 번 맛보는 경우가 흔했고, 그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가슴에 바람의 검을 쑤셔 넣고 있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서토의 패자라고 불리며 온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는 절대자이나, 사실 그는 멸문한 화산의 제자로 무림맹의 귀주 지부에 속해 있다가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과 새외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했다.

수백, 수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새외를 평정한 그는, 중원으로 돌아와 사천을 먹고 패도맹을 세운 후 천하일통이란 야욕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 해남파의 풍운아 용완의 심장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쿨럭…….”

입에서 주르륵 흘러나온 피가 용완의 상의를 적신다.

절대고수의 고강한 내공 덕분에 절명하지 않은 것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할 만한 부상이었다.

“대단…… 하군…….”

“너도 좋았다.”

“하지만…… 졌다…….”

“당연하지, 넌 나보다 약하니까.”

죽음을 앞둔 이에게 좀 관대할 만도 하건만 적제는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기보다 자신의 승리를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가 죽어 가는 용완을 동정했다면 오히려 그답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용완 또한 그게 더 편했다.

해남도의 검객은 동정받지 않는다.

강한 것을 동경하는 것만큼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순리였다.

용완은 입술을 씰룩이며 몇 마디 더 하고 싶어 했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한 그를 바라보며 적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것은 그 나름의 예의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은 천하제일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허허, 대단하군. 해남검문주의 쾌검은 천하일절이라 할 만한 것인데 그 속도를 따라잡다니.”

“따라잡은 게 아니오. 더 빨랐던 거지.”

그의 의형검은 이미 뜻이 이르는 곳에 검이 도달하는 경지. 시간이나 공간은 의미 없었다.

해남검문주 또한 그 같은 이치를 얼추 깨닫고는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 경지가 적제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였다.

송산을 향한 적의(敵意)가 살기로 변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만한 고수의 살기는 단순한 적의나 살의의 표현이라기보다 살인 병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의지 자체가 곧 힘인 그의 의형검은 살기가 일어남과 동시에 송산의 목을 노렸다.

하나 송산은 귀여운 재롱을 보듯 피식 웃을 뿐 피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