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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94화 (194/217)

검향 194화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악 사형은 어디 있습니까?”

“뭐야? 약속을 지키려 온 게 아니었어?”

그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운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악 사형은…… 어디 있습니까?”

“너 여전히 재미없는 놈이구나. 오랜만에 사형을 만났으면 안부도 묻고 그래야지.”

“악 사형은…… 어디 있어…….”

초운의 기도가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존대하지도 않았고, 황현의 얼굴을 보며 구슬픈 얼굴로 웃지도 않았다.

지금 초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악휘구의 안위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황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짧고 담백하게 답했다.

“그놈 죽었어.”

단 한마디에 초운은 비틀거렸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귀를 어지럽게 했다.

“죽어? 악…… 사형이…….”

“응, 그렇다니까. 말 안 듣고 까불기에 확 죽여 버렸지.”

황현은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답했다.

“죽어……? 죽었…… 어?”

초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평소의 초운과 달리 그 모습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황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까지 했다.

“큭큭큭큭. 이거야 원, 우리 사제가 충격이 워낙 컸나 보네? 하여튼 어떡하니, 네가 좀 더 빨리 왔다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거야 원…… 넌 또 구하지 못했구나? 사.형.제.를.”

“죽었구나……. 죽었어…….”

초운의 눈빛은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황현은 이때다 싶어 자전마공을 펼쳤다.

그의 왼손에서 수십 장에 달하는 전격의 창이 솟아났다.

그러자 연무장 내부에 떨어져 있던 검의 파편들이 허공에 떠올라 창의 주변을 휘돌기 시작했다.

어린애 손바닥만 한 파편 하나하나는 전격을 가득 담은 병기.

그는 오늘을 위해 수천 자루의 검을 부숴 연무장에 깔아 두었다.

시간이 갈수록 창의 주변을 휘도는 검편의 수는 늘어났다.

이윽고 수만 개의 검편들이 천지를 가득 채웠다.

전격의 창을 높게 치켜든 황현이 초운을 비웃었다.

“너도 보내 주마, 네 사제들 곁으로.”

전뢰신영화(電雷神影化).

전격의 창에 깃들어 있던 기운의 일부가 그의 몸에 내려앉았다. 그의 전격이 갑주처럼 몸을 보호했다.

천지만검(天地萬劍).

오직 마왕으로 화해야만 시전할 수 있는 자전마공의 비기가 수백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신한다.

오십여 장에 달하는 전격의 창.

그리고 그 주변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회전하는 검편들.

황현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죽어라!”

천벌(天伐)!!

그가 창을 내리쳤다.

* * *

“말리지 않으실 겁니까?”

청년이 그에게 묻자 곽호는 고개를 저었다.

청년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는 당신이 염원하던 것 아닙니까? 그가 죽는다면 후회할 겁니다.”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고 초운을 바라보던 곽호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는 균형자다.”

“알고 있습니다.”

“하늘이 육신을 허락한 진선이지.”

“아직은 아닙니다.”

청년의 부정에 곽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더라도 언제고 그리될 게야. 신선이란 건 그런 거니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곧 알게 될 게다, 곧…….”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 * *

콰아아아아…….

모든 것이 움직이는 그림 같다.

현실성이 없다고나 할까? 마치 처음 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느리고 조용하다.

그러나 훗날 알게 되었듯 그것은 마음의 영역.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뛰어들 때 생기는 현상.

하지만 초운은 지금 보이는 것들이 모두 현실임을 알았다.

현실이 느려진 것이다.

‘아니, 아닌가? 내가 빨라진 건가?’

그러나 이내 다 귀찮아졌다. 세상이 느려지든 내가 빨라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자신은 어느 누구도 지켜 주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창을 내려치는 황현의 얼굴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왜 날 미워하는 거지? 아니…… 애당초 미움이란 왜 있는 것인가…….’

세상은 느려졌으나 그렇다 해서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전격의 창은 자신을 향해 계속 다가오는 중이었다.

창 주변을 휘도는 검편들은 하나하나마다 가공할 만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런 것들이 무려 수만 개다.

‘세상엔 미움이 넘치는데, 왜 하늘은 방관하는가.’

몇 개의 검편들이 초운의 몸을 갈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초운은 모든 것을 피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검편은 아직 수만 개나 남아 있었다.

‘세상이 잘못되었는데…… 왜…… 대체 왜…….’

초운은 멍한 눈으로 반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검편이 아무것도 불어넣지 않은 반검에 맞고 튕겨져 나간다. 심지어 변화의 근원이 되는 무극검마저 펼치지 않았다.

그는 검편들 사이로 보이는 얕은 흐름에 부러진 검을 집어넣었을 뿐이다.

‘나는 청연자 할아버지께 산다고 했다.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가를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이다.’

초운의 반검은 다시 요소요소마다 흐름을 끊었다. 세상의 시간이 아주 조금씩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왜 나를 살도록 하였을까…….’

언제부턴가 궁금했다. 아니, 의심해 왔다.

‘나는 과연…… 인간일까?’

마지막 의문을 떠올린 그 순간,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부러진 반검 위에 검의 형상이 덧씌워진다.

그 위로 전격의 창이 내리쳐졌다.

콰아아앙!!

연무장이 사라졌다. 아니, 연무장이 있던 바닥이 아예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과거 화산파의 영광을 나타내던 ‘터’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산 밑으로 토사처럼 흘러 내려갔다.

삼천에 달하던 마인 중 사분지 일이 가루가 되거나 산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화산이 폭발하며 내뿜은 빛은 무려 이백 리 밖에서도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 * *

“으하하…… 으하하하……! 이겼나? 이긴 건가?”

이젠 요새라 부르기도 힘든 폐허 속에서 한 사내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웃고 있었다.

우르릉…….

폭발의 여력으로 인해 땅이 흔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우선 중요한 것은 승부의 결과였다.

곽호의 예언대로 될 것인가, 아니면 예언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계획은 바로 살아남기 위한 것.

그는 간절히 원했다, 초운이 산산조각 나 있기를.

제발 죽어 있기를, 죽어주기를.

그래야 자신에게 자유가 찾아온다.

괴물을 각성시키기 위한 제물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인생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사부인 곽호가 내건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 절망해야 했다.

아니, 절망하기 전 자신의 눈을 의심부터 해야 했다.

자신의 눈앞에 쓰러져 있는 한 청년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지? 어떻게…….”

분명 눈빛이 죽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분명 이 세상 그 무엇도 죽일 수 있는 절대 비술을 썼다. 한데 어떻게 살아 있단 말인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마인.

거짓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슬픔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주위에 떨어져 있는 검편 하나를 부여잡았다.

날카로운 검편에 의해 손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다른 때 같으면 이런 무기는 필요도 없을 것이나, 모든 힘을 탕진한 지금은 이런 파편조차도 아쉬웠다.

그가 절룩거리며 초운을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그를 방해할 사람은 없다. 절망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죽이면 되는 것이다.

틱…… 티틱…….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의 살가죽은 경질화되었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마공의 후유증은 한계를 벗어나 마왕이 된 그조차 벗어날 수 없었다.

기분에 취해 모든 힘을 다 소모한 결과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은 부스러져 가고 있었다.

털썩---! 파직…….

힘이 없어 무릎을 꿇었으나 무릎뼈가 부서졌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황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향했다.

무릎이 사라져 버린 그는 팔꿈치로 기었다.

이윽고 초운의 지척까지 도달하였을 때 오른팔은 사라져 버렸다.

남은 한 팔로 다시 기어가던 그는 마침내 초운을 죽일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곧 허탈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초운의 목을 가르기 위해 주워들었던 파편이 부서져 버린 오른팔에 있었던 것이다.

아쉬운 얼굴로 초운을 바라보던 그가 큰대자로 누웠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렸다.

손가락이 모래처럼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졌다, 졌어……. 크큭. 결국 당신 말대로 되어버리는군, 곽…… 호…….”

어디선가 거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완전히 부수었다.

바람이 잔잔해지고 남은 것은, 왼손을 하늘로 치켜든 사람 형상의 모래 덩이뿐이었다.

초운이 눈을 뜬 것은 바람이 잔잔해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一章

수백 년 전 이 땅에 천마(天魔)가 태어났다.

하늘이 그 사악함을 인정한 절대의 마신(魔神).

오직 파괴를 위해 태어난 불쌍한 괴물.

아홉의 마왕(魔王)과 열 명의 선인(仙人)이 그를 숭배하여 천마신교를 세웠고, 그의 뜻에 따라 국가를 전복하고 세상을 파괴했다.

그러나 딱 그 정도가, 딱 거기까지가 하늘이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하늘의 뜻과는 달리 그의 파괴는 그치지 않았다.

그를 따르던 마왕과 선인들은 수많은 마공을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마인들도 세상에 쏟아져 나왔다.

피가 강이 되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협기는 모습을 감추고 악의는 세상을 감쌌다.

인간의 통곡이 하늘까지 닿던 시절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왕류의 시조 진요(鎭妖)다.

그는 아홉의 마왕과 열 명의 선인을 차례차례 죽이고 그들이 남긴 마공서를 파기했다.

운명처럼 천마와 맞닥뜨린 그는 칠 주야에 걸친 사투를 펼쳤다.

그 사투의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강이 메마르고 산과 들이 뒤바뀌었으며 수만 명의 양민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처절한 사투 끝에 천마는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바다에 떨어져 수장되었고, 그렇게 세상은 구원 받았다.

진요가 천마를 죽이자 사람들은 그를 두고 천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칭송을 뒤로하고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오십 년, 혹은 백 년에 한 번씩 그의 후예가 나타나 악인과 위선자를 쳐죽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천왕류라 불렀으며 송산은 열한 번째 전승자였다.

하늘이 선택한 괴물과 그 괴물을 징벌한 유파.

그리고 그 힘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자를 잘 두었더군.”

“부럽소?”

“수십 년 만에 천하 기재를 보았는데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화산의 홍복이로다. 반선이 기꺼워하겠군.”

반선은 화산의 반선검왕, 청명자를 뜻했다.

천왕 송산에 맞설 가능성이라도 있던 유일한 고수였지만, 그는 십여 년 전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미친, 남의 제자 가로채려 해놓고선.”

천왕 송산을 향해 독설을 내뱉은 사내는 바로 적제(赤帝).

화산의 불타 버린 도적에는 적오자라 올라가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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