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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93화 (193/217)

검향 193화

“그대가 적제라는 말도 안 되는 별호의 사내인가?”

먼저 나선 이는 설라타였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북천무황이라 칭했다.

그의 일족에게도, 그가 다스리는 북해의 주민들에게도 그 같은 별호를 강요할 정도였다.

때문에 중원으로 넘어 온 후부터는 적제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왕(王)도 아니고 제(帝)라니……. 그 같은 별호는 자신의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처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 의해 칭송받기까지 했다.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적제라 불리고 있다만, 그러는 너는 누구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후후, 본좌는 설라타. 북해의 빙궁에서…….”

“아아!”

그때 적제가 그를 검지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그러고 보니 내 강아지와 닮았구나!”

“강아…… 지?”

적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한 무사가 기다란 쇠사슬을 목에 두른 채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는 설라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이름은 설파룡으로, 설라타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설라타는 설파룡을 보고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 한눈에 알아보진 못했다. 그는 중년의 겉모습과는 달리 장성한 자식만도 백 명이 넘는다.

거기에 손자들까지 합하면 직계 혈족의 수만도 수백이 훌쩍 넘는다.

게다가 철저히 능력만을 따지는 그의 성품은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러니 그가 설파룡을 한 번에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심지어 그는 설파룡을 중원으로 보낸 다음 날 그에 대해 잊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적제가 그의 기억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얘가 네 아들이라던데…….”

“아들?”

아들이란 소리에 그제야 기억을 조금 떠올린 설라타는 설파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왜 거기 있는 것이냐?”

“헤헤…… 헤헤헤…….”

설파룡은 대답 대신 실실 웃고 있었다.

그는 과거 적제의 기세에 눌려 심령을 제압당해 미쳐 버렸다.

여전히 절대고수로서의 능력은 지니고 있지만, 그는 적제의 명이 아니면 싸우지도 먹지도 않았다.

설라타는 미쳐 버린 아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타까운 마음보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저리 될 거면 차라리 죽어주는 게 좋았다.

북해빙궁의 체면을, 그리고 궁주인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다.

“그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

“어이, 백구야. 저놈은 네가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헤헤…… 헤헤…… 나 아들 맞는데…….”

“아니라는 걸 어떡하느냐. 아,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주면 되겠구나.”

“증…… 거…….”

“그래, 예전에 내게 들려준 그것 말이다.”

적제의 말에 설파룡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빙령의…… 기경팔맥을…… 인당…… 백회…… 거궐…….”

“헉! 저놈이 지금 무슨 짓을!”

설라타는 대경실색하였다.

지금 설파룡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빙백신공의 심법 요결.

그걸 수많은 무사들 앞에서 큰 목소리로 또랑또랑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

설라타가 발을 크게 구르자 땅이 얼어붙으며 설파룡의 발치에서 얼음의 창이 튀어 올랐다.

그저 얼음뿐이라면 절대고수인 설파룡을 해할 수 없으나, 심의경의 고수가 펼친 수법답게 얼음 자체가 지닌 힘은 강환을 능가했다.

하지만 그의 한 수는 어디선가 날아온 바람 앞에 모조리 파훼되고 말았다.

이에 설파룡의 안색은 더 하얗게 변했다. 갑작스레 쓴 기술이라 해도 이리 쉽게 파훼될 게 아니었다.

“누구냐…….”

“나지 누구겠나.”

적제는 평소와 다르게 언행이 좀 거칠었다.

천왕으로 인해 화가 많이 나 있기도 했지만, 상대를 도발하기 위한 의도도 없지 않았다.

지금 이곳 화산은 복마전이나 다름없었다.

구천에 달하는 무사들은 둘째치고 천왕 송산을 포함한 네 명의 고수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 하나하나가 무사 일만에 달하는 전력.

육왕칠사, 혹은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었다.

때문에 지금의 전력으론 승산이 전무했다.

조금 있으면 지원이 도착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쪽에 한 명이 더 많았다.

고수 간의 싸움에서 비슷한 전력이라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쪽이 유리한 법이다.

그래서 그는 설파룡을 이용하면서까지 설라타의 속을 긁었고, 그 계책은 상당히 잘 먹혔다.

드득-- 드드드득---!

“이놈이…….”

설라타의 단전 속에서 잠들어 있던 빙령이 깨어났다.

대기가 얼어붙으며 일천여 개의 얼음의 창이 만들어졌다.

창 하나하나는 강환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닿는 즉시 사방 십여 장을 얼음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것이 일천 개나 모여 적제를 둘러쌌다.

적제는 설파룡을 자신의 무사들에게 던져 버리고 빙창을 바라보았다.

“우습군.”

“뭣!?”

설라타는 더 화낼 생각도 못했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분노를 감추고 의념을 내보냈다.

일천 개의 빙창이 적제를 향해 내던져졌다.

아니, 내던져지려는 찰나였다.

어째서인지 창은 허공에 멈추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나타난 적제의 신형이 그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어…… 어?”

설라타는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울컥하며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너무 빨랐다.

분명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척을 느꼈다. 한데 그가 자신의 목을 가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아무리 회복이 빠른 고수라 해도 목이 반이나 잘리는 치명상에는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지금 버티고 있는 것은 고강한 내공 덕분이었다.

설라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목을 자른 사내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떻게…….

-바람은 피할 수 없는 법이지.

-그랬군…… 그랬어……. 그래서 보이지가…… 않…….

전음을 잇던 설라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적제는 왠지 속인 것 같아 씁쓸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 이제 치매 걸린 늙은이나 상대해볼까?”

그는 다시 거친 언어로 도발을 이어 갔다. 하지만 거기에 응하는 자는 없었다.

“사부님…….”

어느새 다가온 초운이 적제를 불렀다.

“아아, 미안해할 거 없다. 나라도 흔들렸을 테니까.”

내심 서운했었지만 초운이 다가와 불러 주니 그런 마음이 눈 녹듯 녹아 없어졌다.

게다가 좀 더 일찍 도착해 놓고도 빨리 나서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그는 제자에게는 대범하게 웃어 넘겼다. 하지만 천왕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양당 간에 결판이 나야 한다. 내야 할 결판이라면 분풀이라도 속 시원하게 하고 싶었다.

“초운아.”

“네, 사부.”

“너는 산에 오르거라. 가서 그 바보 곰탱이 놈을 구하거라.”

초운이 놀라 물었다.

“알고 계셨군요.”

“귀천대원을 너에게 붙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하지만 제가 남아 있어야…… 저들 모두가 마음을 다뤄요.”

초운의 말에 적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 정도야 알고 있다. 혹, 이 사부가 그런 대비도 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고 보는 것이냐?”

“음…….”

“그러니 걱정 말고 곰탱이 놈을 구해 오거라.”

적제가 믿음을 주기 위해 미소를 짓자, 초운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산에 오르기 전 초운은 천왕을 지나쳤다.

그는 왠지 모를 미안함에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너는 걱정 말고 네 사형이란 아이를 구하거라. 아까 하려던 대답은 나중에 들으마.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초운은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화산의 요새를 향해 경공을 펼쳤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지 오르는 동안 사부와 천왕 쪽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았다.

초운이 육안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사라지자 천왕이 적제를 향해 몇 걸음 옮겼다.

초운에게 보냈던 기세를 몇 배나 뛰어넘는 기세가 적제를 덮쳤다.

하지만 놀랍게도 적제는 그 같은 기세를 태연하게 받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기세를 일으켜 대항했다.

적제와 불과 열 걸음을 앞에 두고 마주한 천왕이 그를 향해 물었다.

“이제 그 대비가 무엇인지 좀 보고 싶군.”

* * *

초운이 화산파의 요새에 도착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암향표는 축지의 비술. 공간을 뛰어넘어 달리는 것이기에 경공으로 활용할 때의 속도는 중원 제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곳은 요새라 이름 붙여졌으나 요새라 불릴 만한 것은 없었다.

과거 초운이 수행 삼아 뛰어다니던 길도 그대로였고, 도관이나 전각들도 대부분 무사했다.

다만 그 안이 화산파의 도사가 아닌 마인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당장 화산파를 다시 열어도 문제없을 것만 같았다.

초운은 감상에 빠지려 하지 않았지만 밀려들어오는 추억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저쪽의 작은 연무장에선 당장에라도 사제들이 소소 사형이라 부르며 달려와 안길 것만 같았다.

연못에서 몰래 낚시하던 사형들이 사백들에게 걸려 혼나는 모습도 선했다.

도림평에 내려가면 장로 할아버지들이 바둑을 두고 있지 않을까.

‘매화도 그대로구나…….’

마음이 조급해 잊고 있었다. 지금의 화산은 매화가 만발하는 시기였다.

흩날리는 매화 꽃잎 아래 십사수매화검을 펼치던 일들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어느새 걸음은 일검쟁패가 열리던 대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한 번은 부딪쳐야만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강력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황현이 그곳에 있음을 뜻했다.

한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임에도 그는 뛰지 않고 걸었다. 화산파의 곳곳을 눈에 새겨 두겠다는 듯 천천히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일다경이 흐르고 그는 결국 대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검쟁패가 열리던 비무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연무장 안에는 부서진 검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그것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초운은 연무장 입구에서 눈을 살며시 감았다.

눈부셔서가 아니라 죽어 가면서도 자신을 찾던 사제들의 비명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극복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초운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때 연무장의 끝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운은 그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사형.”

황현의 발끝이 허공에 한 자 이상 떠오르며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연무장 바닥에 깔린 검의 파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팔딱였다.

초운의 오 장 앞에서 멈춰 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사제. 약속을 지키러 왔느냐?”

약속.

오랫동안 초운을 짓눌러 온 한마디였다.

그는 과거 황현과 약속했다.

인성을 버리고 마인화한다면 죽여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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