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향 192화
전설에 나오는 마왕지경(魔王之境)에 이르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가령 산 아래서 송산과 대치 중인 초운을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다던가 하는 일.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게다가 허공을 미끄러지듯 유영할 수도 있었다.
허공답보와는 다른 일종에 축지였다.
허공을 나는 것이 무공이었다면, 황현은 진작에 곽호에게 도전했을 것이다.
이는 심의경의 고수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은 마공의 이능에 불과했다.
그저 전격으로 인해 얻은 끌어당기는 힘을 미는 힘으로 바꿨을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강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절대고수를 손쉽게 제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의경에 도달한 고수는 예외였다.
그 힘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 못했으나, 만약 곽호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도망치는 게 낫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딪쳐 볼 만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정확히는 내 피가 아닌 타인의 피로 이기기를 원했다.
그래서 초운을 이곳에 오게 만들었다.
그가 진천군의 손에 죽는다면 패도맹이 들고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그리만 된다면 결과는 아무리 봐도 양패구상.
설사 한쪽이 이긴다 해도 힘이 빠진 곳을 그와 삼천여 마인들이 처리하면 된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산 밑을 바라보던 황현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장 산 밑으로 달려가 천왕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
“제자라니…… 죽이지 않고 제자라니…….”
산 위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황현처럼 초운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는 최측근인 심영도 몰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심영은 송산을 오랫동안 모셔 온 경험 덕분에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소?”
설라타가 물었다.
하지만 심영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데 놀라지도 않는단 말이오?”
“……주군께선 변덕이 심하시다오.”
“허허…….”
설라타는 쉽게 웃지 않는 자이다. 웃더라도 간혹 남을 비웃는 것이 다였다.
그런 그가 난생처음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용완은 의외로 침착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 또한 초운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지 천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초운을 해남검문으로 초빙하여 심득을 나누는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송산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형을 살리고 싶을 게 아니냐.”
“그야…… 그렇지요.”
“내 제자가 된다면 화산을 치지 않겠다. 아니, 내 직접 네 사형을 구해주마.”
천하제일고수가 직접 악휘구를 위해 나서 준다면 일은 쉽게 풀릴 것이다.
하지만 초운은 그럴 수 없었다.
“저는…… 사부님이 계십니다.”
“무슨 상관이냐? 정 뭐하면 그냥 무공만 전수받아도 된다. 전수받고 네가 적당하다 싶은 놈 골라 전해 주거라.”
정말 최고의 조건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초운을 다시 한 번 부러워하는 중이었다.
무사들 중에 ‘싫으면 나한테 넘겨!’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만큼 천왕류라는 이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천왕류라는 이름 앞엔 늘 천하제일이란 이름이 따라 붙는다.
전승자는 빠르든 느리든 언제고 천하제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 부서지지 않는 금강불괴의 육신.
주먹질 한 방에 산도 무너뜨리는 무적의 권.
무엇보다 더 대단한 것은 수백 년 전, 파괴의 화신이라 불리던 천마를 격살한 절대무공이라는 점이었다.
인간이 감당 못할 괴물을 때려죽이기 위해 하늘이 내린 무공. 그것이 바로 천왕류였다.
천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눈 한 번 꾹 감고 내게 오면 사형을 살릴 수 있다.”
“으음…….”
“사형을 살리고 싶지 않으냐?”
초운은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진짜 사제지간도 아니고, 그저 무공만 전수받는 것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사부님도 용서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천왕도 그가 흔들리는 것을 알았는지 좀 더 파고들었다.
“네가 천왕류를 전수받는다면 천하제일이 될 수도 있겠지.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저…… 는…….”
갈등하던 초운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 결정하였나 보구나. 어서 말해 보거라.”
“저…… 는…….”
모두의 시선이 초운에게로 집중되었다.
초운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으나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노인네가 치매가 왔나! 감히 내 제자를 훔치려고 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초운이 소리쳤다.
“사부님!!”
한편 천왕 송산은 웃는 낯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심영은 그것이 그가 분노했을 때 보이는 표정임을 알았다.
모든 이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서쪽의 패자이자 붉은 제왕.
화산의 마지막 매화검수라 불리는 풍운아.
적제(赤帝).
그가 수천의 무사들을 등진 채 서쪽에서 나타난 것이다.
九章
“초운을 잡으면 일이 쉽게 풀리리라 여기는 것들이 있을 테지.”
그리 중얼거린 붉은 용포의 사내는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거대한 교자는 흔들리지도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교자를 끌고 있는 자들의 무공 수위는 모두 절정이었다.
교자의 주인은 바로 사천의 맹주이자 서쪽의 패자인 적제.
진천군을 맞이할 준비로 한시가 바쁜 이때에 그는 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때 교자 옆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마영의 전음이 적제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의 존재를 잠시나마 감출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지요. 게다가 생강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고.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미끼로 써야 했네.”
-소공께서 그 정도 시련쯤은 이겨 내리란 확신이 있으셨기에 시행한 일이 아닙니까. 그나저나 감상적이 되셨군요. 그 방도를 생각해낸 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주군이십니다.
“큭큭, 그런가? 하나 의외였지. 화산이 지척인데 녀석이 생강시를 사냥하러 다닌 건 말이야. 원래 그 역할은 귀천대의 것이었는데.”
그의 말에 마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음을 날렸다.
-세상이 소공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은밀히 뒤따르던 귀천대가 생강시를 처리한다.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어쩌면 잘된 걸지도 모릅니다. 소공께서 자전마공의 마인과 겨루는 것보다는 덜 위험할 테니까요.
마영은 초운이 황현과 만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자칫 잘못하다 마경에 빠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 마경에 든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쉽게 말해 미쳐 버린다는 뜻이다.
마영이 지켜본 결과 초운은 마경에 빠질 여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먼저 과거 화산파가 멸문하던 시기, 어리디어린 사제들의 죽음에 분노한 초운은 진원지기를 깨뜨려 한계 이상을 끌어 썼다.
잠깐이나마 스스로를 마경에 빠트린 것이다.
이후 무림공적으로 도망 다니는 동안 검귀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하였고, 그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런 상태에서 절대경에 도달한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었다.
무인으로서의 한계를 넘는다고 해서 정신적으로 성숙할 거라는 믿음은 잘못된 인식이다.
그리 따지면 모든 절대고수는 성인군자일 테니까.
절대경에 이르러서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무인으로서 생사결을 펼칠 때 필요한 정신 무장일 뿐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 조금은 더 냉정해질 수 있다고나 할까?
한데 초운은 다르다. 일단 강력한 힘에 비해 너무 어렸다.
이십 대 초반에 절대고수가 된 이는 고금을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착하고 정이 많다는 것은 무인으로서는 크나큰 약점이다.
그런 이가 과거 사형이었던 황현을 죽인다면? 그것이 설사 마성에 물든 황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어쩌면 마경에 빠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초운은 겨우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도 마경에 빠지자 그 곽호를 상대했을 만큼 강해졌다.
하물며 절대고수가 된 지금 마경에 빠진다면 세상이 감당 못할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 자명했다.
마영이 염려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러나 적제는 그런 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화산에 보냈다.
제자가 그런 무모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영은 그런 주인의 마음을 좇아 초운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 그의 그러한 다짐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초운이 진천군을 막기 위해 홀로 떠났다는 귀천대원들의 보고 때문이었다.
이건 무모한 짓을 넘어 멍청한 짓이었다. 마영은 위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쓰려 왔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달려 화산에 도착한 적제가 본 것은 자신의 제자를 회유하는 천왕의 능구렁이 같은 혓바닥이었다.
게다가 제자인 초운은 흔들리는 듯했다.
분노, 아니 그보다 질투심이 먼저였다.
“노인네가 치매가 왔나! 감히 내 제자를 훔치려고 해?”
* * *
“사태가 좀 이상하게 흐를 뻔했지만, 저 바보 사숙이 제때 도착해 주었군.”
황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볼 때 적제나 천왕은 범이었다. 자기 영역에 또 다른 범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그런 기질을 타고난 호랑이.
그 둘이 만난다면 필연적으로 피를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노리는 것이었다.
둘이 싸우는 동안이라면 초운 홀로 산을 오른다 해도 문제없다.
아니, 오히려 그리 해주길 원했다.
곽호는 그가 초운에게 죽어주길 원했지만, 그의 계획대로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 번천계인지 뭔지 하는 계획을 뿌리부터 뒤엎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자신이 초운의 제물이 되는 게 아니라 초운이 자신을 위한 제물이 되어주어야 했다.
“슬슬 준비해야겠군.”
그는 산 밑을 향한 눈과 귀를 거두고 초운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