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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향-191화 (191/217)

검향 191화

잠시 후 구천의 무사들이 좌우로 넓게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네 명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앞장선 두 명은 냉혹해 보이는 인상의 백의 중년인과 한 자루 칼날을 연상시키는 검객.

뒤의 두 명은 평범한 무복 차림의 단단한 체구의 노인과 등에 칠현금을 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초운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알 것 같았다.

평범한 갈색의 무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

산악과도 같은 기세가 쉴 새 없이 초운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다른 셋 또한 느껴지는 기운을 볼 때 육왕칠사급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풍마에 비하자면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갈색 무복의 노인,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단순히 압도적인 기세 때문이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초운은 그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마치 운명 같다고나 할까? 그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친근했다.

그러나 그런 운명적인 만남임에도 싸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마냥 불편했다.

‘그래…… 사부와 비슷하다.’

사부와는 싸울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가는 길을 한없이 지지해 주고 싶고, 돕고 싶다.

문제는 천왕에게도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이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딜 보고 있는 거냐, 꼬마야.”

백의 중년인이 초운을 향해 물었다.

초운은 천왕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천하제일고수를 봅니다.”

“흥.”

백의 중년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송산을 천하제일고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해했다.

그저 저렇게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아니꼬워서였다.

북해빙궁의 궁주 설라타는 콧방귀와 함께 차가운 냉기로 초운이 서 있던 자리를 얼려 버렸다.

더 놀라운 것은 초운의 반응이었는데, 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설라타의 냉기를 받아 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천왕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설라타는 내심 놀랐으나 드러내지 않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나 그런 그의 걸음을 잡는 이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검객.

해남검문주 용완(龍頑)이었다.

이름보다 그 완고함으로 유명한 그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반선검왕이 실종된 지금 차기 검왕으로 유력한 자였다.

“내게도 기회를 한번 주게.”

“흥.”

설라타가 걸음을 멈추며 습관처럼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스스로를 북천무황이라 여기는 자였다.

언제나 최고로 컸고, 최고를 지향했다. 그래서인지 능력이 없는 자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 능력도 자신과 어느 정도로 비슷해야 대우를 해주지, 그렇지 않으면 개, 돼지 같은 가축 이하로 여겼다.

그런 그가 용완에게 무언가를 양보한다는 것은 그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음을 뜻했다.

용완은 그런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해남검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검사.

그를 칭송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해남검문이 만들어지고 500년, 심검을 얻은 자는 그가 최초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라 여겼다.

좁디좁은 해남도를 벗어나 드넓은 강호에서 육왕칠사 같은 고수들과 겨루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해남검문의 대륙 진출이라는 명분으로 검문의 어른들을 설득했고, 진천군을 따라 참전할 수 있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천왕 송산은 그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절대강자였고, 풍마 또한 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북해빙궁에서 황제처럼 산다는 이상한 이름의 친구도 생겼다.

한데 어느 날 풍마가 떠났다. 그것도 약관이 지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청년과 무승부를 이루고.

그가 떠난 것은 아쉬웠지만 용완은 또 다른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드디어 그 청년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설라타가 먼저 손을 쓰긴 했으나 그 정도론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큰 걸 보여 줄 생각이다.

“나는 설가처럼 쉬운 남자가 아닐세, 청년.”

그가 웃는 낯 그대로 발도했다. 오 장 앞에 떨어진 초운을 향해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들어 갔다.

이번만큼은 초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송산에게서 눈을 떼고 보이지 않는 검세를 피했다.

촤악!

땅에 가늘디가는 선이 그어졌다.

아니, 땅에 새겨졌다 표현하기보다는 대지에 금이 그어졌다는 게 옳다.

무려 초운이 있던 자리부터 시작된 검흔이 수십 장이나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검을 집어넣은 용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남들처럼 부수거나 얼리는 화끈한 기술은 없네. 하지만 무엇이든 자를 수 있지.”

초운이 대지에 난 검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자네 것도 보여 주지 않겠는가, 청년?”

“이미 보여드렸습니다.”

“……뭐?”

그때 설라타가 용완을 향해 말했다.

“소매를 봐라, 용완.”

용완은 그제야 오른쪽 소매를 들었다. 그러나 베인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소매에는 얇은 선이 그어져 있었고, 용완이 그 선을 건드리니 그 선을 따라 소매가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선이라고 여겼으나 사실은 검흔이던 것이다.

“후후후…… 중원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어…….”

그가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송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엔 고마움이 가득했다.

송산이 답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용완도 옆으로 물러났다.

남은 것은 천왕 송산과 칠현금을 든 노인 심영이었다.

“선배님들도…… 제게 인사를 하실 겁니까?”

초운이 먼저 물었다.

그러자 송산 대신 심영이 답했다.

“그렇다네. 이번엔 나일세.”

“……제가 이번에도 인사를 버틴다면 천왕께서 나서 주시는 건가요?”

“그건 나의 인사를 받고 나서 생각할 일이라네, 젊은이.”

그가 등에 멘 칠현금을 허공에 띄우며 말했다.

아주 작은 행동이었으나 설라타는 물론이고 용완까지 안색을 굳히며 뒤로 물러섰다.

심의경의 고수들이 긴장할 정도의 힘은 대체 무엇일까.

초운이 궁금해하는 동안 심영은 검지로 금줄을 튕겼다.

띠리링---!

탄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초운의 신형이 뭔가에 부딪힌 것처럼 뒤로 튕겨져 나갔다.

쾅---!

그대로 산자락에 깊숙이 틀어박혔던 초운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빠져나와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해를 보지 않았군.”

심영의 중얼거림에 초운이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혹…… 금마(琴魔)이십니까?”

“오랜만에 듣는 별호로군.”

설라타나 용완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별 반응 없었지만 좌우로 넓게 갈라진 구천의 무사들은 달랐다.

금마(琴魔).

육왕칠사 중 칠사의 일인으로, 수많은 살육의 주인공인 희대의 악당이자 육왕칠사가 일만 인의 무력을 감당함을 몸소 증명한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자가 송산의 측근으로 살고 있었다니, 진천군의 무사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내 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금마 심영의 탄금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강기나 강환이 아닌 순수한 음파가 초운을 덮쳤다.

암향표로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초운일지라도 큰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쾅-! 콰콰쾅!!

그가 칠현금 위에서 어지러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초운이 서 있던 자리는 땅이 무너지고 폭발했다.

무려 반 다경에 걸친 탄음이 절정에 달하자 그를 말린 것은 송산의 목소리였다.

“그만하게. 화산을 없애 버릴 생각인가?”

“아…… 주군.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흥에 겨워서…….”

“쯧. 악사들이란 별수 없구먼…….”

혀를 차던 송산이 앞을 바라보자 화산의 한 귀퉁이가 아예 깎여 내려간 듯했다.

산맥의 일부를 깎아버린 그 위력 앞에 구천여 무사들은 말을 잊었다.

옷이 여기저기 찢기고 낭패한 몰골의 초운이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하지만 여전히 부상은 없었다.

송산은 그런 초운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

초운은 대답 대신 눈을 반개하고 호흡을 정돈했다. 송산의 박수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진탕해 왔기 때문이다.

좀 전의 금마의 탄음과는 비교도 안 될 음공이라 할 수 있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초운은 금마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손속에 사정을 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구천여 무사들 사이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산을 깎아버린 결전이었건만, 그게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었다 하니 허탈해진 것이다.

모두의 마음속엔 공통적으로 부러움과 경외심이 가득 찼다.

간혹 질투도 섞여 있었으나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아닐세. 자네가 잘한 게지.”

심영이 기꺼운 얼굴로 초운을 칭찬하며 송산의 뒤로 물러섰다.

드디어 천하제일고수와 마주 서게 된 초운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포권을 취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천왕은 친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노선배님의 인사를 받아 낸다면…… 화산에 대한 침공을 멈춰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겠구나.”

여전히 친근한 목소리. 하지만 대답은 거절이었다.

“잠시 멈춰 주시기라도…….”

“네 사형을 구해야 하기 때문일 테지? 그것도 아니 된다.”

이미 혈월의 보고를 심영으로부터 들은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초운은 일말의 희망마저 없애 버리는 그의 대답에 분노보다 의구심이 생겼다.

“……그럼 왜 저를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악 사형이 없는 세상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는다면 자신도 죽어야 했다.

더 이상 친인을 잃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원랜 그럴까도 생각했지. 우리 네 명의 ‘인사’를 잘 받아 낸다면 네 사형을 구해 낼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주는 것을…….”

“한데…… 왜…….”

송산이 나이에 맞지 않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만 욕심이 생겨 버렸지 뭐냐.”

“……예?”

그리고 이어진 송산의 말은 초운은 물론이고 진천군 전체를 놀라게 했다.

“너, 내 제자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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